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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 노랫말 쓴 정인보 선생, 죄송합니다

['조선의 얼' 위당 정인보 평전] 해방 69주년, 잠들지 못하는 독립운동가와 후손들

등록|2014.02.28 21:55 수정|2014.02.28 21:55

▲ 평양 재북 인사릉 정인보 묘지 ⓒ 연합뉴스


오늘은 기미년 3·1혁명 95주년이다. 포악한 일제에 맞서 2천만 민족이 3천리 강토에서 총궐기한 날이다. 세계식민지 역사상 국민의 10% 이상이 자발적으로 적국에 비폭력으로 저항한 사례는 일찍이 없었다. 국내뿐만 아니라 한민족이 거주하는 세계 도처에서 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3·1혁명은 비폭력 저항의 우리 국민에게 일제의 야수적인 탄압으로 사망 7500명, 부상 1만6000명, 피검 4600명을 내면서 진행되었다. 이 또한 유례 드문 만행이었다.

3·1혁명 후 국내에서는 이날을 기리는 일체의 기념행사가 금지되었다. 그러나 해외 동포와 독립운동 단체들은 빠짐없이 이날을 기념하면서 자주독립의 의지를 키웠다. 3·1혁명 26주년이 지나서야 우리 국민은 3·1기념행사를 거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해방 후 처음 맞은 1946년의 기념행사는 좌우 세력의 극렬한 대립으로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우익측은 서울운동장에서, 좌익측은 서울 남산에서 각각 3·1기념행사를 열었다. 해방되고  첫 3·1기념행사를 좌우 세력이 따로 거행할 만큼 못난 후손들은 분열상을 보였다. 이어서 남북 분단으로 이어지고 민족분열로 갈라지게 되는 또 다른 앙금이 되었다.

외적 치하에서도 3천리 방방곡곡에서 이념, 지역, 신분, 성별을 가리지 않고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자주독립 운동이 막상 독립이 되고 나서 외국 군정을 겪게 되고, 좌우 두 패로 갈라져 각각 기념행사를 열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정인보에게 노랫말 의뢰한 이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 10월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이와 더불어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을 4대 국경일로 지정한 정부는 정인보에게 4대 국경일의 노랫말을 의뢰했다.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훼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지켜온 청절한 지조, 줄기차게 '조선의 얼'을 탐구해온 폭넓은 학식, 식민사관에 맞선 조선사연구, 민족의 정한을 고아한 문체로 표현한 시조문학, 청빈한 사생활과 지사적인 인품이 조야를 움직인 것이다.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이광수와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의 변절을 지켜보았던 해방 정국의 지도자들은 국경일의 노랫말을 누구에게 맡길까 노심초사했다. 그리고 뜻을 모아 정인보가 추천되었다.

정인보는 한 점 흠결이 없었고 학식이 풍부하고 문장이 유려했으며 지행합일의 양명학자로서 국경일 노랫말의 작사자로서 손색이 없었다. 어떤 이념이나 정파에도 치우치지 않은 당당하고 올곧은 처신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정인보에게는 영광임과 동시에 무거운 부채였다. 백만 년 두고두고 불릴 조국의 4대 국경일의 작사자라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명예로우며 더불어 무거운 짐이었겠는가.

정인보는 1950년 3월 1일 신새벽 맑은 정신으로 '3·1절 노래'를 지었다. 당년 57세, 그러나 이 해 6·25전쟁이 발발하고 그는 북한군에 납북되어 북으로 끌려갔다. 3·1절 노래는 1951년 3·1절 행사 때부터 공식적으로 불리게 되어서, 정작 작사자는 행사장에서 이 노래를 한 번도 듣지 못하고 말았으니, 안타깝고 애달픈 일이었다.

3·1절 노래

기미년 3월 1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義)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 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先烈)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일경의 무차별 총질로 수만명 사망

▲ 표준영정 속의 유관순 열사 모습. ⓒ 윤평호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 33인 중 29인(길선주·김병조·유여대·정춘수 4인은 지방에 있었으므로 불참)은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서 한용운의 주도로 간략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일경에 끌려갔다. 원래는 탑골공원에서 오후 2시에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계획이었으나 학생들의 희생을 우려하여 장소를 옮겼다.

탑골공원에 모인 4000~5000명의 학생·시민들은 예정시간이 지나도록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한 청년이 단상으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독립선언서의 낭독이 끝남과 동시에 학생·시민들은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지도록 외치며 가두로 뛰쳐나왔다. 이로써 해일과도 같은 장엄한 3·1독립시위가 시작되었다.

전국 212개 시군에서 110만 명의 시위가 일어나고 한민족이 거주하는 해외 각지에서도 항일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민족대표들의 비폭력 선언에도 불구하고 일경의 무차별 총질과 매질로 수만 명이 살상되자 분개한 시민들에 의해 일본관헌 166명 사망했고 경찰 헌병관서 159개소, 일반 관서 120개소가 피습되었다. 자업자득이었지만 한민족의 희생과 피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3·1혁명이 5년 후이면 100주년이 된다. 음수사원(飮水思源)이란 말이 있다. 물을 마실 때는 그 근원을 생각하라는 뜻이다. 오늘 3·1혁명 95주년을 맞아 그날의 선열들과 3·1절 노랫말을 지은 정인보 선생을 생각한다. 그리고 노랫말의 의미를 되새긴다.

"이날은 우리의 의(義)요 생명이요 교훈"이라 했던 위당의 노랫말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해방 70주년이 다되어 가는 시점에서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대를 이어 영화를 누리고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은 영락을 면치 못하는 불의와 반생명의 사회가 되고 말았다.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선대를 기리는 각종 상, 기념관을 만들고 동상을 세운다. 이들은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는 교과서를 만들고,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역사를 왜곡한다. 이들은 정계, 언론계, 법조계, 대학, 재계의 실세그룹이 되어 역사를 비틀고, '종북'이라는 부적으로 민주인사들을 겁박한다. 3·1정신이 실종된 지 오래이고, '친일잡탕' 교과서가 배척당하자 '국정교과서' 카드를 들고 나올 만큼 당당해졌다.

3·1항쟁의 날을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라고 힘주어 의미를 부여했던 위당이 저 세상에서 이 같은 오늘의 현상을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실까.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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