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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명물' 거북이를 기억하십니까?

[한컷도시여행⑨] 광주고속으로 기억되는 도시 광주

등록|2014.03.01 11:37 수정|2014.03.01 11:37

▲ 1970년 고속도로 시대가 시작됐다. 이로 인해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 김대홍


1970년대에 고속도로 시대가 열렸다. 돌이켜보면 무척 놀라운 사건이었다. 1968년 12월 기준 전국 버스는 모두 더해봐야 1만 3천여대 정도에 불과했다. 그중 80km에서 100km를 달릴 수 있는 버스는 50대 정도였다. 전국을 통틀어 고속도로 기준에 맞는 버스는 손꼽을 정도였다는 뜻이다. 그런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고속도로는 많은 것을 바꿨다. 지역 간 이동이 빨라지고 편해지면서 거리와 물류, 여행에 대한 생각틀 자체가 달라졌다. 같은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일 양이 크게 늘어났고, 엄두도 못낼 일을 하게 됐다.

1970년 7월 7일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가 뚫리자 "서울에서 아침 먹고 출발한 뒤 부산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서울에서 저녁을 먹는다"는 너스레가 유행했다. 그럴 만했다. 고속도로가 뚫리기 전까지 부산에서 출발한 어물트럭은 서울까지 16시간을 달려야 했으니. 이제 그 시간이면 부산-서울을 왕복하고도 시간이 남았다.

그 전까지 사람들은 버스를 타고 시내나 이웃 동네를 갈 뿐이었다. 먼 거리를 갈 때 교통수단은 오로지 기차였다.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1970년 한 해만 고속버스 이용승객이 1400만 명을 넘겼다. 고속도로와 함께 기차의 시대가 저물고 버스의 시대가 시작됐다.

10년 넘게 거북이표 버스만 이용, 왜 느린 동물이 상징이었을까

▲ 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버스를 타고 전국 도시 어디나 갈 수 있게 됐다. 가까운 거리는 버스, 먼 거리는 기차라는 공식을 바꿔야 했다. ⓒ 김대홍

태어나기 몇 해 전 고속도로가 뚫렸다. 해서 고속도로와 함께 비슷하게 나이를 먹었다.

가수 혜은이가 부른 '뛰뛰빵빵'(1977년 발표) '제3한강교'(1979년 발표)는 어린 시절 즐겨 들은 노래였다. '뛰뛰빵빵'은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부산까지 달리는 감상을 담은 노래다. '제3한강교'는 경부고속도로 진입 관문인 한남대교의 옛날 이름이다. 흥겨운 그 멜로디가 즐거웠고, 고속도로와 함께 다가오는 여행 느낌이 좋았다.

고속도로와 고속버스가 자리를 잡기 시작하던 시절 살던 곳은 마산이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가는 곳은 광주였다. 방학이면 나주 끄트머리에 있는 외가를 찾았기 때문이다. 나주에 가려면 광주에서 시외버스로 갈아타야만 했다.

당시 마산에서 광주까지 가는 고속도로 구간은 한창 만들던 중이었고, 짧지 않은 구간이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였다. 구불구불한 길이 많았다. 비록 차종은 고속버스였지만 '쌩쌩' 빠르게 달리는 맛은 느끼기 힘들었다. 대신 섬진강휴게소에서 사는 간식이 기대됐고, 창문밖 구경이 즐거웠다.

당시엔 수많은 고속버스들이 경쟁했다. 이들 회사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동물을 상징물로 내세웠다. 독수리, 제비, 사자, 천마, 표범 등 모두 빠른 동물들이었다. 천마는 비록 상상 속 동물이지만 하늘을 날아다니는 말이니 빠르기야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 가운데 광주고속만은 거북이가 상징동물이었다. 다들 빠른 동물을 내세웠는데 느림의 대명사인 거북이가 끼어 있으니 남달라 보였다.

'땅에서는 느리지만 물에서는 빠르다', '안전운행과 성실함을 뜻한다'란 설명을 듣긴 했지만 그래도 '느린 거북이'에 대한 이미지를 깨긴 어려웠다.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빠른 고속버스'와 '느린 거북이'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지만, 그 점이 오히려 재미있었다.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처럼 다른 고속버스를 제치고 가장 먼저 도착지점에 이를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 초창기 고속버스 회사들은 대부분 빠른 동물을 상징물로 내세웠다. 광주고속만은 예외. 거북이가 상징동물이었다. ⓒ 김대홍


수많은 고속버스가 있었지만, 우리 가족이 탄 버스의 상징동물은 항상 거북이었다. 그 시절 고속버스를 타는 일은 오로지 외가에 갈 때 뿐이었고, 1986년까지 광주-마산 구간은 광주고속이 독점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거북이 상징이 좋았는지, 광주고속을 오래 타다 보니 거북이 상징이 좋아졌는지는 알 수 없다.

시간이 오래 흐르다 보면 인과관계가 희미해지는 법이다. 지나고 나면 여러 가지 잔가지들이 사라지고, 가장 굵은 가지 몇 개만 살아남는다. 고속버스 하면 거북이었고, 거북이가 도착하는 곳은 항상 광주였다. 어느 순간 고속버스와 거북이 그리고 광주는 한 묶음처럼 기억 속에 자리 잡았다.

그 당시 광주에서 나주로 가기 위해 들른 시외버스터미널도 흥미로웠다. 경남과 전남은 시외버스 색깔이 달랐다. 경남에서 직행은 녹색, 완행은 적색이었지만, 전남은 정반대였다. 게다가 경남에선 이미 직행버스에서 여승무원이 사라진 것에 반해, 전남에선 직행과 완행 모두 승무원이 있었고, 직행의 경우 산뜻한 제복을 입은 여승무원이 손님을 안내했다. 전남지역 직행버스가 더 고급스럽다는 느낌을 자연스레 가졌다. 하지만 조금만 더 더듬어보면 그런 기억은 부분 진실이었다. 광주시외버스터미널은 너무 많은 버스가 드나들어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동구 대인동 17에 위치하고 있는 시외버스터미널에는 도내 전 시외버스회사가 입주, 1천대가 훨씬 넘는 많은 버스가 하루 종일 드나들고 있어 장소가 협소하기 짝이 없다…이들이 보유하고 있는 시외노선버스는 무려 1천3백여대. 이 버스들이 광주를 기점으로 도내 3백여 시외노선을 정기운행하면서 태워 나르는 승객만도 하루 5만여명에 달한다." - <동아일보>(1981년 2월 18일)

아마 그 시절 광주시외버스터미널을 능가하는 터미널은 그 전이나 후, 다른 지역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듯하다. 고속버스에서 내린 뒤 시외버스를 타기 위해 이동한 다음, 다시 긴 인파를 헤치고 표를 사야 하는 번거로움은 1992년 끝이 났다. 고속버스와 시외버스를 합친 종합버스터미널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 때 광주에 살던 친척 한 분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터미널"이라며 목소리에 힘을 주던 일이 기억난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시간이 흐른 뒤 광주에서 비엔날레를 보고, 7080년 시대를 테마로 한 충장로축제도 맛보았으며, 전국 5대 빵집이라는 궁전제과도 가봤지만 광주에 대한 기억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1994년엔 광주고속마저 금호고속으로 회사명이 바뀌었다. 그 때쯤엔 고속버스를 많이 타지 않을 때였고, 탄다 하더라도 버스명은 더 이상 중요치 않을 때였다. 해서 광주에 대한 가장 굵은 기억은 고스란히 광주고속과 그 시절 버스터미널 몫이었다.

나주에서 광주로 옮긴 외가, 이제 목적지로 바뀐 도시

▲ 어린 시절 마산에서 광주로 갈 때 탄 버스는 항상 광주고속이었다. 독점이었기 때문이다. 광주고속과 거북이는 아주 익숙한 풍경이었다.(금호고속 호페이지 캡처) ⓒ 금호고속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고속버스를 타는 일은 사라졌다. 방학은 쉬는 기간이 아니라 또다른 방식으로 공부하는 기간이 됐다. 방학이라 해서 고속버스를 타고 외가에 가는 여유는 사라졌다. 대학교에 들어간 뒤 방학이면 이런저런 일로 노느라 바빠서 외가에 가질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훌쩍 흘렀다. 군대에 갈 때가 다가왔다. 외가에 계신 할머니 생각이 났다. 혼자서 고속버스를 타고 외가에 갔다. 새롭게 바뀐 버스터미널이 낯설었다. 고속버스에서 시외버스로 갈아타지 않는데다, 산뜻해진 모습이 좋았지만 아쉬운 기분도 들었다. 한 곳에서 고속버스에서 내린 뒤 시외버스로 갈아탔다.

맥주 몇 병을 사들고 집엘 들어갔다. 외삼촌과 외할머니가 계셨다. 항상 그렇듯이 외할머니는 버선발로 뛰어나오셨다. 군대에 간다 하니 부엌에서 큰 놋쇠밥그릇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잘 갔다 오라는 의미로 못마시는 술 한 잔 받겠다는 것이다.

"어쩔그나이. 우리집엔 맥주잔이 엄써. 이 밥그릇으로 받아야 쓰겄네. 건강히 잘 댕겨와. 알겄지?."

조만간 외가에 들를 생각이다. 할머니 나이가 이제 아흔을 훌쩍 넘겼다. 그 동안 장거리 여행에서 고속버스 시대가 저물고 KTX로 대변되는 철도가 다시 주도권을 잡았다. 세상은 이렇게 달이 지고 해가 뜨는 것처럼 엎치락뒤치락 물고물린다. 고속버스와 시외버스가 드나드는 광주종합버스터미널 또한 몇 해 전 유스퀘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 사이 할머니가 사는 곳은 나주에서 광주로 바뀌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자식들이 있는 곳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이제 광주는 스쳐가는 터미널 도시가 아니라 목적지로 바뀌었다. 그래도 내게 광주는 여전히 고속버스 목적지이자 시외버스로 갈아타는 터미널 도시다. 기억이란, 그 끈질긴 추억의 힘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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