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 외치다 '파벌'이 됐고, 결국 사라졌다
[기획-'혁신모임' 소멸사] 열린우리당 '새로운 모색'부터 민주당 '더 좋은 미래'까지
'빛과 그림자.'
한 정당 내에 '주류'가 있으면 '비주류'가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현 대표 체제를 중심으로 한 주류 그룹의 행보에 불만을 느낀 이들은 '쇄신' 혹은 '혁신'이라는 이름을 걸고 세력화에 나선다.
정치적 목적을 위한 '보여주기'용으로 혁신이 내걸린 때도 있다. 보수와 진보의 양날개를 표방하기 위해 혁신을 빌려온 사례다. 또는 진짜 진보적 의제를 당에 관철시키기 위한 목적을 내세우고 모임을 조직하기도 한다. 그동안 민주당에 숱한 '혁신 모임'이 만들어진 이유다.
가장 최근에 발족한 모임은 '더 좋은 미래'. 올 초 배를 띄운 '더 좋은 미래'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던 과거 혁신 모임의 뒤를 밟을까, 아니면 진짜 변화를 이끌어 낼까? 열린우리당이 창당한 2003년부터 올해까지, 10여 년 동안 만들어졌다 사라진 민주당 내 '혁신 모임'의 흥망성쇄를 짚어봤다.
'새로운 모색'에서 '신진보연대'까지
"우리의 모색은 과거의 낡은 관행과의 결별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열린우리당 창당(2003년 11월 11일) 7개월 여 만인 2004년 6월, 혁신 모임이 발족했다. 당 내 운동권 출신 30~40대 의원 34명으로 이뤄진 '국가발전을 위한 새로운 모색'(우상호·김영춘·이종걸 등)이다. 이들은 "당내 세력 경쟁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모임의 기둥을 이룬 재야파 의원들의 정치적 역할을 강화하려는 움직임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그러나 정치 결사체 수준으로 진화하지 못했고 정치인의 친목모임 수준을 넘지 못했다.
2004년 '중도노선 정당으로 발전시키는데 봉사하는 정치결사'를 표방하며 참여정치연구회(이후 참여정치실천연대, 유시민·이광철·유기홍 등)가 창립했다. 당내 대표적 친노그룹으로 불린 참정연은 출범 후 기간당원제를 중심으로 한 정당개혁 문제와 국가보안법 폐지, 사학법 수정 반대 등을 주장하며 정체성 논쟁의 중심에 섰다. 그러나 당 안팎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2007년 5월 스스로 해체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언론은 "무능한 개혁세력이라는 국민들의 차가운 시선에 못 이겨, 스스로 해체를 결의했다"고 평했다.
2005년 발족한 신진보연대(신기남·이목희·김태년 등)는 "열린우리당이 지난 1년간 정체성을 찾는데 상당히 미흡했다, 지지자들이 기대했던 것에 도달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기대하기 어렵다"며 전격 출범했다. 이듬해 열린우리당 소속 초선 의원 모임인 '처음처럼'(김현미·조정식·최재성 등)은 "계파 영향권을 뛰어넘는 집단적 정치 지점을 구축하기 위해 모임을 결성했다"고 밝혔다. 같은 해 출범한 '소통과 화합의 광장'(문희상·유인태·원혜영·오영식·신계륜)은 중진의원을 중심으로 한 모임으로 "선후배간 소통의 광장으로서 명확하게 자리매김하자"며 출범했다. 모두 변화를 기치로 내걸었지만 이들 모임 뒤를 따르는 수식어는 혁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신진보연대'에는 신기남 의원의 재기 모색을 위한 세 규합이라는 평가가, '처음처럼'에는 정동영·김근태 등 특정 대선주자의 세 확대 차원이라는 평가가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소통과 화합의 광장'의 경우, 당내 양대 계파인 김근태·정동영 측 의원들은 거의 없었고 당시 김혁규 측 의원들이 대부분 소속돼 있어 '소통과 화합'이라는 거창한 목표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부터 제기됐다.
대통합민주신당의 '쇄신' 바람은 531만 표 차이로 대선에서 대패한 후 거세게 불어 닥쳤다. 19명(초기엔 18명, 이후엔 15명으로 줄어듦)의 초선 의원이 주축이 된 '초선 모임(2007년 12월 25일 성명 발표)'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리와 장관, 당 의장과 원내대표를 지냈던 이들의 백의종군을 촉구했다. 2선 후퇴 또는 총선 불출마를 요구한 것. 이같은 기준에 따르면, 당 안팎 유력인사가 모두 총선 불출마 대상으로 분류된다. 이로 인해 유일하게 남는 인물이었던 손학규 전 경기지사를 추대하기 위한 모임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살생부가 난무했을 뿐 구체적인 대안은 없었다.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이는 없는 채 서로를 힐난하기 바빴다. 대선 패배의 원인이 뭔지,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뼈저린 반성은 없었다. '쇄신'이 될 리 만무했다.
독자세력화 꿈꾸던 '진보행동' 마저 자진 해체
'입'으로 외치는 혁신은 민주당 체제에서도 계속됐다. 2008년 민주연대 (김근태 전 의원을 중심으로 한 민생평화국민연대 + 천정배 의원이 이끄는 '민생모임' + 정동영계 참여)가 '야당 속 야당' 역할을 하겠다고 출범했다. 이들은 "선명 야당의 깃발을 높이 들고 민주주의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투쟁해야 한다"고 밝혔다.
2010년 6·2 지방선거 직전인 4월 출범한 쇄신모임(김영진·천정배·이석현·이종걸·추미애·정동영 등)도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광역단체장 후보 경선방식을 두고 "당권파의 전횡이 경선 파행을 초래했다"며 공천 방식에 큰 우려를 나타냈다. 이들은 지방선거가 끝난 후 '민주희망쇄신연대'로 옷을 바꿔 입으며 "민주당의 변화와 쇄신만이 민주당을 살리고 민생을 살리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비슷한 시기인, 2010년 8월 민평련과 386인사들이 모인 삼수회가 의기투합한 '진보개혁모임'(공식출범은 2011년 3월, 원혜영·최재성·백원우·이목희 등)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반쇄신연대 성격이 짙은 모임으로 비춰졌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실제로 쇄신연대에는 "막무가내식 당권투쟁을 한다"고 비판했다.
당내 각종 모임이 창궐하며 이들은 2010년 10·3 전당대회에서 세력별 경합을 벌였다. 모두 '진보'를 내걸었지만 주류와 비주류는 각기 달리 뭉쳤다. 김근태 전 의원을 중심으로 한 '민주연대', 정동영·천정배를 핵심으로 하는 '쇄신연대'. 범주류세력이 결집한 '진보개혁연대'가 각축을 벌였다. 차기 당권을 둘러싼 당내 주도권을 선점하기 위해 계파간 힘겨루기가 액면 그대로 드러난 순간이다. 그 결과, 각 모임은 자파 소속 의원들을 최고위원에 당선시키며 위력을 과시했다.
이 가운데 2010년 11월 486세대 정치인 모임인 '진보행동(우상호·이인영·유은혜)'도 움텄다. 이들은 민주당의 빅 3(손학규·정동영·정세균)에서 독립해 '독자세력화'를 꿈꿨다. 하지만 "확실한 제 3블록이 될 것"이라던 호언장담은 2013년 3월 19일을 기점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당시 우상호 의원은 진보행동 해산을 선언하며 "486은 소장파도 아니고 당 주류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이었다, 기존 관행을 혁파하는 데 주저했다"고 자평했다. 혁신이 아닌 계파의 안위를 좇은 것을 반성한 것으로 읽혔다.
2012년 총선 이후 '민주당 초선의원 네트워크(민초넷)'가 "국회와 당 운영에 개혁적 목소리를 내겠다"며 둥지를 틀었지만 월 1회 이어지던 정기모임도 시들해진 지 오래다. 2013년 초에는 '탈계파·혁신 연구 모임(김관영·김현미·박수현·신경민 등 초재선 22명)'을 표방한 '주춧돌'이 탄생했다. "국민의 이익이나 정당의 가치보다 계파 이익을 우선시하는 정당은 미래가 없다, 계파 정치는 암세포와 같은 것이므로 제거돼야 한다"고 소리 높였던 주춧돌 역시 지금은 활동이 뜸하다.
"결국엔 파벌모임이 됐다가 명멸했다"
이처럼 10여년의 역사 동안 민주당 내에는 숱한 혁신모임들이 나타났고, 대부분 소리 없이 사라졌다. 이유가 무엇일까.
김대중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역임하며 민주당의 역사를 함께해 온 박지원 의원은 "처음엔 혁신모임의 성격을 띠다가 결국엔 파벌모임이 됐다가 명멸했다"고 짚었다. 이어 "또 혁신 모임이 주장하는 바를 지도부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김대중 총재 때도 마찬가지였다"며 "우리는 야당으로서 '소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고 외치면서 정작 우리당 지도부는 혁신파의 주장을 '다수 의견과 다르다'며 무시해왔다"고 진단했다.
참정연의 핵심 일원으로 활동했던 유기홍 의원은 "정치문화를 바꾼다는 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참정연을 중심으로 기간당원제와 국민참여경선 등을 시도했지만 그 때마다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부딪혔다"며 "혁신은 시간이 걸리는 문제다, 이제 새누리당도 오픈 프라이머리를 얘기할 만큼 정치가 바뀌지 않았나, 발전이라는 건 조금씩 뚜벅뚜벅 진행되는 것"이라고 의미부여를 했다. 시간이 조금 걸리고 있을 뿐 나름의 영역에서 느리게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진단이다.
17대 국회 입성 후 다수의 혁신 모임에 이름을 걸었던 우상호 의원은 "우리들은 나이나 유사한 과거 경력 중심으로 뭉쳤을 뿐 공동행동을 하지 못했고, 각자의 계파에 발목 잡혀 있었다"고 진단했다. 또 "개혁그룹은 '나는 개혁정치인'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미래 비전을 공유하지 않았고, 논쟁은 많았지만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고도 말했다. 하나의 뜻을 가지고 하나로 뭉쳐 목소리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개혁그룹이 리더를 키우지 않았다"며 "김근태 선배를 키워줬어야 하는데 그렇지 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그는 지난 11일 '탈계파조직·당혁신모임·정책의견그룹'을 표방하며 발족한 '더 좋은 미래' 소속이기도 하다. 여기엔 민주당 초재선 의원 22명이 함께하고 있다. 우 의원은 "더 좋은 미래는 기존 조직을 반성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기대가 크다, 이후 대중적 정치조직으로 만들려고 한다"며 "우리는 진보블록 집권의 꿈을 전제로 만났고 당의 진보적 정체성을 지켜갈 것이며 정책을 개발해 당이 채택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책과 행동'으로 진보를 보여주겠다는 이들의 다짐은 실현될 수 있을까. 결국 사람의 문제다.
한 정당 내에 '주류'가 있으면 '비주류'가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현 대표 체제를 중심으로 한 주류 그룹의 행보에 불만을 느낀 이들은 '쇄신' 혹은 '혁신'이라는 이름을 걸고 세력화에 나선다.
정치적 목적을 위한 '보여주기'용으로 혁신이 내걸린 때도 있다. 보수와 진보의 양날개를 표방하기 위해 혁신을 빌려온 사례다. 또는 진짜 진보적 의제를 당에 관철시키기 위한 목적을 내세우고 모임을 조직하기도 한다. 그동안 민주당에 숱한 '혁신 모임'이 만들어진 이유다.
가장 최근에 발족한 모임은 '더 좋은 미래'. 올 초 배를 띄운 '더 좋은 미래'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던 과거 혁신 모임의 뒤를 밟을까, 아니면 진짜 변화를 이끌어 낼까? 열린우리당이 창당한 2003년부터 올해까지, 10여 년 동안 만들어졌다 사라진 민주당 내 '혁신 모임'의 흥망성쇄를 짚어봤다.
'새로운 모색'에서 '신진보연대'까지
▲ 지난 2004년 9월 열린 열린우리당 참여정치연구회 모임. ⓒ 장재완
"우리의 모색은 과거의 낡은 관행과의 결별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열린우리당 창당(2003년 11월 11일) 7개월 여 만인 2004년 6월, 혁신 모임이 발족했다. 당 내 운동권 출신 30~40대 의원 34명으로 이뤄진 '국가발전을 위한 새로운 모색'(우상호·김영춘·이종걸 등)이다. 이들은 "당내 세력 경쟁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모임의 기둥을 이룬 재야파 의원들의 정치적 역할을 강화하려는 움직임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그러나 정치 결사체 수준으로 진화하지 못했고 정치인의 친목모임 수준을 넘지 못했다.
2004년 '중도노선 정당으로 발전시키는데 봉사하는 정치결사'를 표방하며 참여정치연구회(이후 참여정치실천연대, 유시민·이광철·유기홍 등)가 창립했다. 당내 대표적 친노그룹으로 불린 참정연은 출범 후 기간당원제를 중심으로 한 정당개혁 문제와 국가보안법 폐지, 사학법 수정 반대 등을 주장하며 정체성 논쟁의 중심에 섰다. 그러나 당 안팎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2007년 5월 스스로 해체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언론은 "무능한 개혁세력이라는 국민들의 차가운 시선에 못 이겨, 스스로 해체를 결의했다"고 평했다.
2005년 발족한 신진보연대(신기남·이목희·김태년 등)는 "열린우리당이 지난 1년간 정체성을 찾는데 상당히 미흡했다, 지지자들이 기대했던 것에 도달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기대하기 어렵다"며 전격 출범했다. 이듬해 열린우리당 소속 초선 의원 모임인 '처음처럼'(김현미·조정식·최재성 등)은 "계파 영향권을 뛰어넘는 집단적 정치 지점을 구축하기 위해 모임을 결성했다"고 밝혔다. 같은 해 출범한 '소통과 화합의 광장'(문희상·유인태·원혜영·오영식·신계륜)은 중진의원을 중심으로 한 모임으로 "선후배간 소통의 광장으로서 명확하게 자리매김하자"며 출범했다. 모두 변화를 기치로 내걸었지만 이들 모임 뒤를 따르는 수식어는 혁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신진보연대'에는 신기남 의원의 재기 모색을 위한 세 규합이라는 평가가, '처음처럼'에는 정동영·김근태 등 특정 대선주자의 세 확대 차원이라는 평가가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소통과 화합의 광장'의 경우, 당내 양대 계파인 김근태·정동영 측 의원들은 거의 없었고 당시 김혁규 측 의원들이 대부분 소속돼 있어 '소통과 화합'이라는 거창한 목표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부터 제기됐다.
대통합민주신당의 '쇄신' 바람은 531만 표 차이로 대선에서 대패한 후 거세게 불어 닥쳤다. 19명(초기엔 18명, 이후엔 15명으로 줄어듦)의 초선 의원이 주축이 된 '초선 모임(2007년 12월 25일 성명 발표)'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리와 장관, 당 의장과 원내대표를 지냈던 이들의 백의종군을 촉구했다. 2선 후퇴 또는 총선 불출마를 요구한 것. 이같은 기준에 따르면, 당 안팎 유력인사가 모두 총선 불출마 대상으로 분류된다. 이로 인해 유일하게 남는 인물이었던 손학규 전 경기지사를 추대하기 위한 모임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살생부가 난무했을 뿐 구체적인 대안은 없었다.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이는 없는 채 서로를 힐난하기 바빴다. 대선 패배의 원인이 뭔지,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뼈저린 반성은 없었다. '쇄신'이 될 리 만무했다.
독자세력화 꿈꾸던 '진보행동' 마저 자진 해체
▲ 2008년 9월 30일 오후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민주당 내 진보개혁성향 전·현직 의원 모임인 (가칭)'민주연대' 발기인대회에서 지도위원을 맡은 김근태 전 의원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권우성
'입'으로 외치는 혁신은 민주당 체제에서도 계속됐다. 2008년 민주연대 (김근태 전 의원을 중심으로 한 민생평화국민연대 + 천정배 의원이 이끄는 '민생모임' + 정동영계 참여)가 '야당 속 야당' 역할을 하겠다고 출범했다. 이들은 "선명 야당의 깃발을 높이 들고 민주주의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투쟁해야 한다"고 밝혔다.
2010년 6·2 지방선거 직전인 4월 출범한 쇄신모임(김영진·천정배·이석현·이종걸·추미애·정동영 등)도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광역단체장 후보 경선방식을 두고 "당권파의 전횡이 경선 파행을 초래했다"며 공천 방식에 큰 우려를 나타냈다. 이들은 지방선거가 끝난 후 '민주희망쇄신연대'로 옷을 바꿔 입으며 "민주당의 변화와 쇄신만이 민주당을 살리고 민생을 살리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비슷한 시기인, 2010년 8월 민평련과 386인사들이 모인 삼수회가 의기투합한 '진보개혁모임'(공식출범은 2011년 3월, 원혜영·최재성·백원우·이목희 등)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반쇄신연대 성격이 짙은 모임으로 비춰졌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실제로 쇄신연대에는 "막무가내식 당권투쟁을 한다"고 비판했다.
당내 각종 모임이 창궐하며 이들은 2010년 10·3 전당대회에서 세력별 경합을 벌였다. 모두 '진보'를 내걸었지만 주류와 비주류는 각기 달리 뭉쳤다. 김근태 전 의원을 중심으로 한 '민주연대', 정동영·천정배를 핵심으로 하는 '쇄신연대'. 범주류세력이 결집한 '진보개혁연대'가 각축을 벌였다. 차기 당권을 둘러싼 당내 주도권을 선점하기 위해 계파간 힘겨루기가 액면 그대로 드러난 순간이다. 그 결과, 각 모임은 자파 소속 의원들을 최고위원에 당선시키며 위력을 과시했다.
이 가운데 2010년 11월 486세대 정치인 모임인 '진보행동(우상호·이인영·유은혜)'도 움텄다. 이들은 민주당의 빅 3(손학규·정동영·정세균)에서 독립해 '독자세력화'를 꿈꿨다. 하지만 "확실한 제 3블록이 될 것"이라던 호언장담은 2013년 3월 19일을 기점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당시 우상호 의원은 진보행동 해산을 선언하며 "486은 소장파도 아니고 당 주류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이었다, 기존 관행을 혁파하는 데 주저했다"고 자평했다. 혁신이 아닌 계파의 안위를 좇은 것을 반성한 것으로 읽혔다.
2012년 총선 이후 '민주당 초선의원 네트워크(민초넷)'가 "국회와 당 운영에 개혁적 목소리를 내겠다"며 둥지를 틀었지만 월 1회 이어지던 정기모임도 시들해진 지 오래다. 2013년 초에는 '탈계파·혁신 연구 모임(김관영·김현미·박수현·신경민 등 초재선 22명)'을 표방한 '주춧돌'이 탄생했다. "국민의 이익이나 정당의 가치보다 계파 이익을 우선시하는 정당은 미래가 없다, 계파 정치는 암세포와 같은 것이므로 제거돼야 한다"고 소리 높였던 주춧돌 역시 지금은 활동이 뜸하다.
"결국엔 파벌모임이 됐다가 명멸했다"
▲ 민주 초·재선 모임 '더 좋은 미래' 공식 발족민주당 소속 초·재선 의원 22명으로 구성된 당내 혁신 모임 '더 좋은 미래' 가 2월 1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발족식을 가졌다. ⓒ 남소연
이처럼 10여년의 역사 동안 민주당 내에는 숱한 혁신모임들이 나타났고, 대부분 소리 없이 사라졌다. 이유가 무엇일까.
김대중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역임하며 민주당의 역사를 함께해 온 박지원 의원은 "처음엔 혁신모임의 성격을 띠다가 결국엔 파벌모임이 됐다가 명멸했다"고 짚었다. 이어 "또 혁신 모임이 주장하는 바를 지도부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김대중 총재 때도 마찬가지였다"며 "우리는 야당으로서 '소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고 외치면서 정작 우리당 지도부는 혁신파의 주장을 '다수 의견과 다르다'며 무시해왔다"고 진단했다.
참정연의 핵심 일원으로 활동했던 유기홍 의원은 "정치문화를 바꾼다는 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참정연을 중심으로 기간당원제와 국민참여경선 등을 시도했지만 그 때마다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부딪혔다"며 "혁신은 시간이 걸리는 문제다, 이제 새누리당도 오픈 프라이머리를 얘기할 만큼 정치가 바뀌지 않았나, 발전이라는 건 조금씩 뚜벅뚜벅 진행되는 것"이라고 의미부여를 했다. 시간이 조금 걸리고 있을 뿐 나름의 영역에서 느리게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진단이다.
17대 국회 입성 후 다수의 혁신 모임에 이름을 걸었던 우상호 의원은 "우리들은 나이나 유사한 과거 경력 중심으로 뭉쳤을 뿐 공동행동을 하지 못했고, 각자의 계파에 발목 잡혀 있었다"고 진단했다. 또 "개혁그룹은 '나는 개혁정치인'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미래 비전을 공유하지 않았고, 논쟁은 많았지만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고도 말했다. 하나의 뜻을 가지고 하나로 뭉쳐 목소리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개혁그룹이 리더를 키우지 않았다"며 "김근태 선배를 키워줬어야 하는데 그렇지 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그는 지난 11일 '탈계파조직·당혁신모임·정책의견그룹'을 표방하며 발족한 '더 좋은 미래' 소속이기도 하다. 여기엔 민주당 초재선 의원 22명이 함께하고 있다. 우 의원은 "더 좋은 미래는 기존 조직을 반성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기대가 크다, 이후 대중적 정치조직으로 만들려고 한다"며 "우리는 진보블록 집권의 꿈을 전제로 만났고 당의 진보적 정체성을 지켜갈 것이며 정책을 개발해 당이 채택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책과 행동'으로 진보를 보여주겠다는 이들의 다짐은 실현될 수 있을까. 결국 사람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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