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덕분에 나도 '졸업'을 합니다
뒷바라지 한 아이의 졸업... "엄마 덕분이야" 한마디에 뭉클
▲ 아이의 졸업식 날아이가 자신의 학위복을 내게 입혀주고 사진을 찍어주었다. 멋적었지만 내심 뿌듯하고 기뻤다. ⓒ 이영미
"엄마! 한 풀었네! 잘 어울리네!"
28일 카카오톡으로 서울에서 보낸 학위복을 입은 내 사진을 보고 꽃다발을 미리 만들어서 전해준 큰 딸아이가 답해왔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장난삼아 이 사진을 보여주면 마치 내가 졸업한 줄로 착각하며 축하해요! 하기도 한다.
그렇게 사무칠 한은 아니어서 큰 아이가 표현한 '한'이란 단어가 적절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때는 중증청각장애로 의료보험제도가 무엇인지, 장애등록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잠잘 한칸 방도 없이 사회에 나왔다. 잠시였지만 기초수급자로 혼자서 세파와 외로움에 힘겨워 사무쳤던 때도 있었다.
그래서 여성가장이 되어서 아이를 무사히 졸업시킨 감회가 남 다르게 깊고 무량하고 아이가 유달리 대견해 보이고 고마운 것은 사실이다. 지금은 꿋꿋하고 해맑아 보이는 작은 아이지만 나와 떨어져 6년간 아주 힘든 사춘기를 보낸 터라 지금의 모습이 더 대견해 보이는 것이리라.
구삭동이로 거꾸로 발부터 나와 나를 긴장시켰던 작은 아이는 여고졸업식도 하지 않고 도 경계를 지나 그냥 맨몸으로 내게로 왔다. 나랑 같이 살 수 있는 여건과 자기의 학업을 어떻게 할 것인지 아무 생각없이 그냥 수능을 치고 바로 오순도순 지냈던 언니도 있는 내 곁으로 왔다.
수능을 보았으니 졸업식과 졸업장은 그저 형식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나와 떨어진 6년간 사춘기 특유의 혼란스러운 때, 이혼가정이란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고 싫었던 그리고 자유롭지 않은 환경을 벗어나 따스한 가슴을 공유하고 있는 언니가 있는 내 곁에 간절히 오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좋은 대학 마다하고 내 곁으로 온 작은 아이
이혼가정의 아이들은 자기들의 소망과 관계없이 어느 한 쪽을 택해야 한다. 그래서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어른들의 결정이나 환경에 따라 한부가정이나 한모가정의 아이들로서 자라나는 경향이 많다. 나중에 성인이 가까워지면 자기들의 의지대로 살고 싶고 가고 싶은 부모를 선택을 할 수 있는 경우도 더러 있다.
작은 아이는 수능결과 충남에 있는 좋은 대학에 합격했으나 그 또한 마다하고 내가 사는 곳의 작은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본인의 의사와 무관한 영양학과에 입학했지만, 아이의 뒷바라지를 내가 감당하게 된 뒤로 아이는 본인이 하고 싶은 경영과로 전과를 하고 학교 고시원에 살다시피 하면서 학업에 매진했다.
아이의 뒷바라지를 위해 나는 보수가 없는 비영리민간단체 대표직을 그만두고 새롭게 큰 조직의 맨 밑바닥에서 상근하는 일터에 들어갔다. 50대가 다 되어서 딸과 아들뻘 되는 상사 아래서 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밤 잠을 아껴가며 여러가지 새로운 자격증도 취득했다. 덕분에 계약직으로 들어갔지만 나중에 정규직이 되었다. 다변화 되는 조직의 빠른 흐름에 적응이 어려워 딸과 아들 뻘 되는 동료들이 줄줄이 떠나갔다.
나도 가끔은 심신이 극한에 달할 정도로 힘들어 긴급치료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여자는 약하지만 한국의 엄마들은 유달리 강한 경향이 있다. 이것은 사랑이라기 보다 한국아줌마의 근성에 가까울 터였다.
심신에 상처투성이 였던 아이가 학업에 비례하여 더 매진했던 것은 건강회복을 위한 운동이었다. 매일 두세시간씩 유산소와 근력운동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표가 나지 않았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서서히 표가 나기 시작했다. 일 년이 지나자 거식증과 과식증도 서서히 없어지고 건강한 체력이 되었다.
중학교 때 이미 세차장 알바부터 다양한 알바를 했던 아이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틈틈이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알바를 했다. 스스로 거둔 유기견인 도란이의 생존비인 밥값과 병원비를 감당하기 위해서였다.
"엄마가 내 졸업의 일등공신이야!"
아이가 입학한 지 얼마 안 되는 어느 비가 오는 날... 아이는 얼마나 오랫동안 떠돌아 다녔던지 몸의 털과 귀의 털이 바닥을 질질 끌고 냄새나고 더러우며 온갖 피부병투성이인 유기견 시츄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
동물에 대한 애착이 별로 없는 나는 질색을 했다. 그러나 아이가 그 유기견을 너무 애처롭게 보면서 자기의 동생을 삼고 싶다고 간절히 원해 아이의 이름과 비슷한 이름으로 도란도란 살라고 도란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어 치료를 받아 같이 살았다. 같이 사는 조건으로 도란이의 생활비는 아이가 책임을 지는 조건이었다.
동물알레르기가 있는 아이는 도란이와 같이 있으면 알레르기로 얼굴과 팔 다리에 발진이 일어나 힘들어 하면서도 10년째 도란이를 잘 감당해내려는 모습이 무척 대견하다. 아이는 영양학과에서 경영학과로 전과를 하고 아르바이트와 운동하는 시간 이외에는 학업에 파묻혀 살았다.
그래서 그 학교 개교 43년 역사상 처음으로 3년만에 전체 수석으로 졸업을 하게 되었다. 아이는 다시 계획을 짜서 아르바이트를 더 늘리고 취약했던 여러 가지 분야의 공부를 하면서 서울의 대학원에 진학하는 준비를 몇 년 했다.
그리고 소망하던 대학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나도 나름대로 주말에도 전라도 지역의 원거리 강의를 자처하면서 아이의 뒷바라지를 했지만 일년 후 아이는 내 부담을 덜어주려고 일본인 교수의 조교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역의 복지관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자원봉사를 했다.
드디어 2년이란 시간이 지나고 아이는 무사히 졸업을 했다. 졸업을 하는 날! 아이는 내게 자신의 학위복을 입혀주면서 "엄마 덕분에 잘 졸업했어! 엄마가 내 졸업의 일등공신이야!" 라고 말했다.
참 고마웠다. 이 세상의 모든 엄마라면 당연히 해야할 뒷바라지인데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덕분에라고 말해주는 게 고마웠다. 아이는 초등학교 때 나와 떨어져 산 지 6년 만에 여고 졸업식도 하지 않고 내게 왔었다. 내게 와서 같이 살면서 별 탈이 없이 서로 합심하고 화기애애 했던 것은 아니었다.
가령 나는 옛날처럼 같이 밥먹고 생활을 공유하기를 원했지만, 아이는 이혼가정 아이들의 한 특징처럼 6년간 눈치보며 살았던 안타까운 습관대로 혼자서 밀폐된 곳에서 식사하는 방식이 서로 적응이 되지 않아 힘들었다. 그리고 유달리 직설적이고 감정표현을 잘하기도 하여 오해도 잘 해서 소통이 잘 안 되어 힘들었던 순간들도 참 많았다.
그러나 아이가 바라보는 방향을 같이 바라보고 아이가 가고 싶은 곳에 대한 이야기를 가슴으로 들어주면서 경제적인 힘도 나눠줄 수 있는 그런 엄마이고자 노력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아이와 나의 마음은 하나로 되는 순간들이 많아졌다.
아이의 이야기를 가슴으로 오래 들어주다 보니, 아이는 물질문명에 가끔은 뒤처져 힘들어하는 내 이야기를 가슴으로 들어주며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가끔은 조언이 아니라 잔소리처럼 여겨지는 것은 내가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일까?
이제 졸업한 아이가 취업을 하고 사회생활에 자리를 잡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 반대로 천직인 붓쟁이이자 선비인 햐암(시골선비)의 생활로 되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 아이가 졸업하면서 15년간의 내 사회생활도 졸업을 준비해 노후를 대비하는 셈이다.
그러나 아마 엄마로서는 아이가 살아있는 한, 그리고 내가 정신을 잃어버리거나 세상을 떠나지 않고 살아있는 한 영원히 졸업을 하지 않은 채 아이의 길에 성원을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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