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간디는 있는데 김구는 왜?
[3.1절 특집] 우리 화폐엔 왜 독립운동가 없나... 해외 화폐와 비교해 보니
▲ 백범 김구 선생대한민국 화폐에는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그는 물론 어떤 독립운동가의 사진도 실려있지 않다. ⓒ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갈무리
'미국은 벤자민 프랭클린, 중국은 마오쩌둥, 인도는 간디, 필리핀은 호세 리잘, 그리고 대한민국엔 김구'
이들 사이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일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로 자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앞장서 나라를 구했다. 그런데 위 인물들 중 백범 김구만 갖지 못한 큰 차이가 하나 있다.
백범만이 유일하게 자국 화폐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자주권을 빼앗겨본 경험이 있는 나라들은 안다. 독립이 얼마나 중요한 역사인지. 각국 정부가 자국의 화폐에 독립운동가를 새겨 넣는 이유다. 국민 생활과 가장 밀접한 화폐에 독립운동가를 그려넣음으로써 독립의 의미를, 그들의 정신을 이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언론인 박구재는 그의 책 <지폐 꿈꾸는자들의 초상>에서 "세계 주요국의 은행권 앞면 도안은 인물 초상이 전체의 83.2%를 차지하고 있다"면서 "인물 초상은 한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성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지폐엔 누가?
백범 김구가 화폐의 주인공이 될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1945년 해방과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수차례 화폐도안이 변경됐다. 그런데도 우리 지폐에선 김구를 필두로 한 항일 독립운동가가 전면에 나서지 못했다.
근대 인물 중 유일하게 1950년 대 '환'으로 통용되던 지폐에서만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이 삽입됐을 뿐이다. 이마저도 독립 운동과 관련이 없고, 국민적 동의 없이 대통령 스스로 내세운 결과였다. 결국 1960년 4·19혁명과 1962년 긴급통화조치 이후 화폐에서 자취를 감췄다.
▲ 한국 지폐 주인공들조선시대 이씨 집안 사람들만 가득? ⓒ 한국은행 홈페이지 갈무리
이에 대해 유승광 공주대 역사교육과 객원교수는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는 차치하고 그 어떤 독립운동가도 우리 지폐에서 찾아보기 어렵다"면서 "정치적 논쟁이 필요 없는 조선시대 인물들만 넣음으로써 독립운동가의 정통성을 저해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비판했다.
유 교수는 이어 "항상 반복되는 말이지만 친일청산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코 김구와 윤봉길을 우리 화폐에서 볼 수 없을 것"이라 주장했다.
실제로 2009년 발행된 5만원권 지폐 인물엔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선정됐다. 남성 일색인 화폐 인물에 여성이 선정됐다는 점에서 진일보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조선시대 부계사회의 대표적인 현모양처'라는 지적을 피할 순 없었다. 마지막까지 신사임당과 함께 후보로 거론된 인물이 3·1 운동을 주도한 유관순 열사였다는 점에서도 논란은 증폭됐다.
정종국 독립유공자후손협회 회장은 "정부가 1945년 해방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상해 임시정부 출신 독립운동가를 고려하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국민 개개인이 독립에 대해 자긍심을 가질 수 있겠냐"며 "일본에 큰소리 못내는 것도 임시정부부터 이어져 내려온 정통성을 스스로 외면했기 때문"이라고 일갈했다.
정 회장의 강한 비판엔 이유가 있다. 현재 사용되는 우리나라 화폐 도안은 모두 15·16세기 조선시대 인물들이다. 세종대왕과 황희 정승, 율곡 이이, 신사임당, 이순신 장군이 주인공이다.
"독립운동가 없었다면, 오늘 우리의 모습은?"
▲ 외국 지폐의 주인공들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미국 100달러 주인공 벤자민 프랭클린, 중국 마오쩌둥, 인도 간디, 필리핀 아기날도. ⓒ 세계화폐박물관 홈페이지 갈무리
하지만 독립을 경험한 대부분의 국가는 독립운동가를 자국의 큰 자산으로 삼았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과 중국, 인도, 필리핀이다. 이들 국가는 독립운동가를 전면에 드러내며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가장 고액권인 100달러 지폐에 벤자민 프랭클린이 새겨져 있다. 그는 '시간은 금이다'와 같은 명언을 다수 남겼으며, 미국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이다. 1776년 미국 '건국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과 함께 독립선언문을 만들었다. 유의할 점은 벤자민 프랭클린만이 아니다. 미국 달러 속 지폐 인물 대부분이 미국 독립과 관련돼 있다. 미국내에서 독립운동의 가치가 얼마나 높게 평가받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인도 지폐의 주인공 역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끈 마하트마 간디다. 그의 얼굴이 모든 지폐에 새겨져 있다. 화폐 가치에 따라 색깔과 새겨 넣은 조형물에만 차이를 뒀다. 가장 가치가 높은 500루피 지폐엔 '소금행진'이라 불리는 역사적 사건의 삽화를 담아 독립운동의 정신을 강조했다. '소금행진'은 1930년 3월 12일 마하트마 간디가 인도인들과 함께 아쉬람에서 단디까지 행진하며 영국에 소금세 철폐를 주장한 사건이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는 독립운동의 가치를 더욱 짙게 드러냈다. 양국 초대 대통령인 아기날도와 수카르노가 모두 독립운동가 출신이기 때문이다. 특히 인도네시아에서는 동일 가치의 화폐에 각기 다른 독립운동가의 초상을 삽입했다. 여성 독립운동가를 고려한 정부 차원의 선택이다.
"독립정신은 국민 생활 속에 투영돼야 한다"
'친일 반민족 행위자 재산 조사위원회' 조사관을 역임한 고상만 민주당 김광진 의원실 보좌관은 작금의 세태에 대한 비판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대부분의 독립단체들이 보훈처의 눈치만 본다"며 "가해자 일본이 제멋대로인 이유도 우리 스스로 청산하지 못한 역사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고 보좌관은 이어 "삼일절은 노는 날이 아니라 분노해야 하는 날"이라며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에 총 맞으며 대한독립을 외친 날"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지속하고 유지하는 길은 '아우내 장터'에 가서 행사 한 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지폐 같은) 국민 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투영될 수 있는 실천이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문화재발굴현장에서 연구작업을 해온 전영호 연구원 역시 "친일파가 기득권 세력을 장악하고 사회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세태를 뿌리 뽑지 못하는 이상, 김구 같은 근현대사 독립운동가는 우리나라 화폐 주인공이 될 수 없다"고 단정지었다. 전씨는 그러면서도 "독립운동에 관한 역사 만큼은 정치적 견해와 상관없이 공통적으로 공감할 수 있도록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