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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지나 드러난 유해 35구... 왜 집단 매장 됐나

진주 용산고개 '보도연맹 희생자' 매장지 발굴... "확인사살 가능성"

등록|2014.03.03 10:27 수정|2014.03.03 10:27
국가가 외면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지를 민간단체들이 발굴했더니 최소 35구의 유해가 나왔고, 일부는 '확인 사살' 되었을 가능성이 컸던 것으로 밝혀졌다. 60년이 지나 일부 역사적 사실이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은 3일 오전 경남 진주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 유해발굴 현장에서 설명회를 가졌다. 공동조사단은 박선주 교수(충북대)를 발굴단장으로, 지난 2월 24일부터 유해 발굴작업을 벌였다.

▲ 경남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에 있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매장지에 대한 발굴작업이 진행되었다. 사진은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팀이 발굴작업을 벌이고 있을 때 모습. ⓒ 윤성효


발굴 결과, 최소 35구의 유해와 82점의 유품이 나왔다. 매장지에 습도가 높고 산성도가 높아 유해 보존상태는 매우 나빴고, 머리뼈 부분 20개와 허벅지뼈 기준 70개, 정강뼈 15개, 위팔뼈 6개 등이 나왔다. 유해의 주인공은 남자 어른으로 추정된다.

유품은 버클 14개와 탄두 15개, 탄피 1개, 옷핀 2개, 철제품 1개, 고무줄 2개, 단추 47개가 나왔다. 발굴조사단은 총기류(카빈 소총)에 의해 사망했고, 일부는 확인사살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유해 매장지는 가로 7m, 세로 4m 정도의 편편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지표에서 아래로 30cm에서 유해가 산자락을 따라 가로로 길게 출토되었다. 유해는 주로 매장지 좌우에 몰려 있었고, 2~3명이 겹쳐서 나타났다.

이곳은 진주-산청 국도(3번)변에 있는 명석배수지 앞쪽에 있는 매장지다. 용산리 3개 골짜기 5군데에 718구의 시신을 매장했다는 마을 주민들의 증언이 있는데, 우선 한 군데를 발굴한 것이다.

이번 유해발굴은 진주유족회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 공동조사단은 "불법적인 국가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의 유해를 수습하여 적절한 장소에 안치함으로써 피해자와 유족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기 위한 조치"라며 "이를 통해 국가가 국민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무엇인지를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2005년 만들어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9년까지 전국 159개 지역에 대한 지표조사를 했고, 그 중 우선 10개 지역, 13개 지점에 대한 발굴조사를 하고 말았으며, 이명박정부 뒤부터 활동이 중단됐던 것이다.

한국전쟁유족회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족문제연구소,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4․9통일평화재단, 포럼진실과정의 등 시민단체들은 지난 2월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을 결성하고, 진주 명석면 용산고개를 첫 발굴지로 선정했던 것이다.

이들 단체는 "과거 청산 작업의 하나로 6․25전쟁 전후 희생된 민간인의 유해를 인도적 차원에서 발굴․안치하고, 실질적인 과거청산에 필요한 법과 제도가 구비될 수 있도록 국민적 관심을 모아내며 민간 차원에서 과거청산 작업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가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밝혔다.

▲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은 경남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에서 지난 2월 24일부터 민간인 집단희생 유해발굴 작업을 벌이고, 3월 4일 현장설명회를 열었다. 이곳에서는 최소 35구의 유해와 버클, 탄두, 탄피 등 82점의 유품이 나왔다. ⓒ 민족문제연구소


공동조사단은 "매년 지속적으로 유해 발굴을 통해 민간인희생사건의 실상을 기록하여 역사적 교훈으로 삼을 것이며, 하루 속히 국가가 발굴조사에 나설 수 있도록 강력하게 촉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발굴작업에는 영남대와 충북대, 경희대, 고려대, 간디학교(산청) 학생들이 자원봉사했고, 한국전쟁유족회 진주유족회(회장 강병현)와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지회장 이기동, 사무국장 강호광)가 공동주관 단체로 참여했다.

유해 주인공은 진주지역 보도연맹사건 희생자들로 판단

용산고개 발굴과 관련해 공동조사단은 "유해와 유품의 상태를 분석하고 많은 증언들을 종합한 결과, 희생자들 다수는 '진주지역 보도연맹사건 희생자'들로 판단할 수 있다"고 밝혔다.

기록자료와 증언 등에 의하면, 진주형무소에는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1000여 명의 재소자가 수용되어 있었고, 전쟁 직후 일반 재소자는 장기수를 제외하고 모두 석방되었으며, 남은 재소자 대다수는 전쟁 전 좌익활동 때문에 연행되어 형을 받은 기결수 또는 미결수였다.

공동조사단은 "진주경찰서 구금자 중 '갑'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1950년 7월 21일경 살해되었고, 나머지 보도연맹원들도 7월 26일경까지 몇 차례에 걸쳐 집단살해되었다"며 "진주형무소에 구금된 보도연맹원과 재소자들은 7월 22일부터 CIC와 헌병, 경찰에게 끌려 나갔으며 7월 22~26일 사이 집중적으로 처형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증언도 있다. 신판도(당시 18세)씨는 "사람들이 죽은 다음 날 지서 경찰이 와서 한 집에 한 사람씩 10명을 데리고 가서 시체를 묻으라 했고, 용산리에 있는 하진박골, 우참새무골, 아래참새무골에서 사람들이 죽었는데, 나는 우참새무골에 갔었다"고 진술했다.

▲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은 경남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에서 지난 2월 24일부터 민간인 집단희생 유해발굴 작업을 벌이고, 3월 4일 현장설명회를 열었다. ⓒ 민족문제연구소


구수회(당시 10세)씨는 "용산치(고개)에 죽은 진주형무소 재소자들의 시신이 산골짜기에 널브러져 있어 아버지가 마을사람들과 함께 시신을 매장하러 갔고 아버지로부터 '시신이 너무 많아 구덩이를 파지 못하고 고랑에다 시체를 던져놓고 흙을 덮었다'는 말을 들었다"며 "용산치에 소 먹이러 자주 갔는데 그때도 시신이 여러 곳에 있었고 뼈가 굴러가니는 것은 예사였다"고 증언했다.

심상수(당시 16세)씨는 "형의 시신을 찾으러 갔더니 용산리 골짜기에 포승에 묶인 채 총을 맞은 시신들이 엎어져 있었다"며 "깊은 골짜기를 따라서 구덩이를 파지도 않고 그냥 죽였고, 총살 시킨 후 인근 주민을 동원해서 골짜기에다 그냥 장작더미 쌓듯이 쌓은 뒤 흙을 덮어 놓았더라"고 밝혔다.

공동조사단은 앞으로 '미발굴 유해가 더 있는 지 여부', '유해 발굴지의 활용 방안', '추가 유해 발굴과 안치 관련 대책' 등에 대해 검토해 나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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