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26회] 혁련지가 마련한 집에서 깜짝 놀란 관조운

[무협소설 무위도(無爲刀) 26] 위약청 (1)

등록|2014.03.07 10:40 수정|2014.03.09 22:35
10장 위약청

무위도無爲刀 ⓒ 황인규


예로부터 '소항숙 천하족(蘇杭熟 天下足)'라고 했다. 소주(蘇州)·항주(杭州)에 풍년이 들면 천하가 풍족해진다, 라는 뜻이다. 소주는 장강이 날다가 주는 삼각주의 비옥한 토양에 힘입어 곡물 생산이 넘쳐났고, 수운과 해운이 만나는 곳이어서 물자 또한 풍부하였다.

이런 조건을 갖추다 보니 상고(商賈)가 몰려들어 소주는 상인의 도시로 이름이 났다. 그밖에 견직과 모직 등을 생산하는 수공업도 발달하였고, 소금의 고장인 양주와도 가까워 염업(鹽業) 유통의 근거지로 흥했다.

소주는 부성(府城)을 중심으로, 동쪽엔 견직과 모직 등을 만드는 장인들이 밀집해 있고, 서쪽엔 상인들과 점포가 몰려 있다. 동쪽의 장인들이 만든 직물은 서쪽의 상인들이 사들여 전국에 유통을 시켰다.

서쪽의 상가는 전국에서 모여든 상인들로 항시 북적였고, 외곽 대운하를 따라 상당가(上塘街)·남호가(南濠街)로 불리는 구역에는 면포 도매상과 견직 도매상, 미곡 상점 등이 줄지어 들어서 있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상인과 엄청난 물자가 성대하게 거래되었다. 그중에서도 풍교(楓橋)의 미곡시장, 남호(南濠)의 어염시(漁鹽市), 동서회(東西匯)의 목패시(木簰市)는 변방에서까지 알 정도로 이름이 났다. 

수당 시대에 만든 대운하가 해자처럼 둥글게 휘돌아가는 남호엔 염업 좌고(坐賈:소매점포)와 도매상들이 즐비했다. 전국의 모든 소금 거래는 이곳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남호의 중심에서 약간 북쪽으로 벗어나 상가와 민가가 서로 섞여드는 곳에, 장원에는 못 미치지만 일반 저택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큰 건물이 하나 있다. 대문에는 체체염방(諦締鹽坊)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살피고(諦) 맺는다(締)는 상인의 의지가 배어있는 상호다.  

체체염방은 소주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염업 도매상이다. 그곳의 가주 내외가 사 년 전 괴질로 급사하는 바람에 다들 가세가 기울 것으로 예상했다. 괴질이 돌 무렵 외지에 출타하는 바람에 횡액을 면한 무남독녀가 어쩔 수 없이 가업을 물려받았다. 염방 경영의 경험이 없는 처자가 복잡다기함은 물론이요, 시장의 과부족을 진단하고 시세를 예측해야 하는 염업 거래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얼마 가지 않아 망하거나 아니면 염방을 다른 곳으로 넘기고 편하게 지낼 것이라고 시장 사람들은 입방아를 찧었다. 그러나 세인들의 우려와는 달리 젊은 처자는 남다른 수완을 보였다. 염방을 부친이 운영하던 수준으로 유지함은 물론 오히려 더 공격적인 면을 보였다. 멀리 류구(琉球 : 지금의 오키나와)까지 거래를 트겠다며 관에 상단 파견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혁련지는 장부를 펼치고는 어제 양주에서 들어오는 소금 사십만 관의 처리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멀리 사천까지 가는 객상에 넘기자니 이문은 높지만, 그자의 신용을 믿지 못하겠고, 근처 항주의 염방에 넘기자니 이문이 박했다.

객상은 물량의 반에 해당하는 만큼의 대명보초(大命寶鈔: 명나라 시대의 공식 지폐. 발행이 남발 되면서 가치가 폭락해 화폐로서의 기능이 별로 없었다)를 선금으로 내놓겠다고 하지만 먼 사천 땅에서 나 몰라라 하고 입 닦고 나면 한낱 휴지조각에 불과한 게 보초이다. 항주의 소금상은 은으로 결제하겠지만 재고가 다 소진되고 나면 지급하겠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이문은 둘째 치고 그동안 묶이는 자금이 문제가 된다. 

"마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나이든 여자 하인이 상념에 잠겨 있는 혁련지를 불쑥 깨웠다. 

"누군신가요?"

혁련지는 자신이 장부를 펴놓고 골똘하게 생각에 잠겨 있을 땐 누구도 방해해선 안 되는 규칙을 만들어 놓았다. 이 규칙을 충분히 알고 있는 하녀인데 도대체 누구길래?

"금릉에서 온 유생 관 씨라면 아실거라고 합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혁련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서들이도록 하세요."

늙은 하녀는 주인의 이런 행동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반듯한 이목구비에 학창의를 입은 그 문사가 여주인과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입이 무겁기로 소문난 늙은 하녀지만, 이때만큼은 입이 간지러워지기 시작하는 걸 스스로 알아채지 못했다.

손님용 거실로 안내되면서 관조운은 사년 만에 만나는 혁련지가 예전의 감정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궁금했다. 한편으론 자신이 지금 관에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그녀가 과연 도움을 줄 것인가도 걱정되었다.

그녀는 원숙해져 있었다. 강호를 주유하던 활달한 낭자에서 세상을 쉽게 보지 않고 매사에 신중하고 사려 깊게 행동하는 상인(商人)의 티가 물컥 풍겼다. 

"어서오세요. 관 공자님."

혁련지가 반가운 눈길로 관조운을 맞아주었다.

"오랜만이오, 혁련 소저."

반가이 맞이하는 그녀의 태도에 관조운은 한결 부담이 덜어졌지만, 사년의 세월이 둘 사이에 서먹함을 깔아놨는지 공자니 소저니 하는 호칭이 먼저 나왔다.

관조운은 사부 모충연의 서거 소식과 함께 자신이 지금 은화사와 금의위, 그리고 무림맹의 표적이 되어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진지하게 듣고 있던 혁련지는 관조운의 말이 끝나자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이곳은 이목이 많은 곳이라 위험하니. 공자께서는 일단 제가 따로 마련한 거처에 가 있으세요. 일이 한가할 때면 제가 며칠씩 묵는 집입니다."

혁련지는 자신의 거처가 지금 있는 체체염방의 내실 외에도 성문 근처의 외곽에 조그마한 저택을 마련해 놓고 있다고 했다. 자신은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 되도록 빨리 끝내고는 그곳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품속에서 열쇠를 꺼내 관조운에게 주었다.

서문 근처에 용화관(蓉華觀)이라는 도관이 있고, 우측으로 삼 마장만 더 가면 대나무숲으로 둘러싸인 집이 나오는데 사죽헌(思竹軒)이라는 당호라는 적혀 있을 거에요. 그곳이 제 거처예요. 그녀가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관조운은 아무래도 이목이 번다한 시내를 빨리 빠져나가는 게 낫다 싶어 서둘러 인사를 하고는 말에 올랐다. 진기련과 헤어진 뒤 그녀가 준 은전으로 파양진에서 말을 산 뒤 소주까지 오는 동안 관도는 피하고 소로로 달려왔다. 소주까지는 관가의 방이 미치지 못했는지 성문에 검문이 없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온 것이다.

혁련지가 설명해준 집은 자세한 설명이 없었으면 지나치기 쉬웠다. 대나무숲이 울울창창해 그 안에 인가가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차 한 대 정도 다닐만한 길을 조금 들어가자 사죽헌이라는 현판이 보였다. 대나무를 생각하는 집이라, 어울리는 당호다.  

대문을 두드리자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손으로 밀자 스스럼없이 열렸다. 입구는 크지 않고 겉으론 수수해 보였지만, 막상 안에 들어서자 부호의 집답게 고급스럽고 단단해 보였다. 정원을 지나 현관을 여니 이 또한 잠겨 있지 않았다.

현관을 지나 거실에 들어서자 관조운은 깜짝 놀랐다. 집안의 가구란 가구는 모두 엎어져 있고 그밖의 살림살이가 바닥에 어지러져 있다. 관상용 도자기는 산산조각나 있고, 족자며 액자는 바닥에 나뒹굴어 있다. 방문마다 열려 있어 관조운이 둘러보았다.

침실은 이불이 뭉쳐져 있고, 서실에는 모든 책들이 책장에서 나와 바닥에 널려 있다. 무예를 좋아하고 상업에 뜻을 둔 사람치고는 책이 꽤 많군. 관조운은 속으로 생각했다. 다시 거실로 나와 다른 방으로 연결된 통로를 따라 들어가니 부엌이 나왔다. 부엌은 그나마 괜찮았다.

관조운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누군가 들어와서 집안을 마구 헤집은 것이다. 관조운은 거실 구석에 나동그라진 의자를 세우고는 그 위에 앉았다. 무슨 일인지 몰라 멍하니 있다 보니, 피로가 몰려왔다. 정신없이 쫓길 때는 몰랐는데 비교적 안도할 수 있는 곳에 왔다 싶으니  피곤이 파도처럼 밀려온 것이다. 관조운은 의자에 앉아 졸다가 이내 곯아떨어졌다.
덧붙이는 글 월, 수, 금, 주3회 연재합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