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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이 '항문도'에서 '당사도'로 바뀐 사연

[한국의 섬30] 동학군 항일의거, 소작쟁의... 역사를 품은 섬 당사도

등록|2014.03.08 16:37 수정|2014.03.10 12:01

당사도 선착장 배를 대는 주민 ⓒ 이재언


지명이 세 번이나 바뀐 등대가 있는 오붓한 섬, 당사도(唐寺島).

당사도 가는 '섬사랑1호'는 작은 목포라고 불리우는 노화도 이목항에서 출발 소안도를 거쳐 당사도로 들어간다. 하루 2회 운항하는데 오전에 이목항 7시 20분, 오후에는 3시 40분에 출발하여 소안도에 대고 당사도에 들어간다. 소요 시간은 40여 분 걸린다.

'자지도'라 했다가 '항문도'라 했다가 당사도 된 사연은 이렇다.

당사도는 한 때 사람(남자) 몸의 두 배설기관을 지명으로 딴 희한한 섬이다. 지금도 뱃사람들 사이에서는 '자지도(者只島)'라 불리우고 '당사도'라 하면 지금도 모르는 노인들이나 사람들이 많다. 오히려 여기서는 자지도라고 해야 쉽게 알아듣는다. 섬 모양새가 '다만 지(只)'자와 비슷하다 해서 생겨난 이름이 바뀌고 바뀌었다. 사연이 많다. 예전부터 자지도라고 부르다가 을사늑약 이후 일제가 소안도 맹선리에 소규모 군항을 구축할 때 '항구의 문'이라 하여 '항문도(港門島)'라 했다.

해방이 되고 난 다음 '자지도'란 이름을 되찾았지만 어감이 좋지 않다 하여 1980년대 들어와 당사도라는 이름으로 바꿔 불렀다. 당사도라는 이름이 바뀌게 된 사연도 기가 막힌다. '당사도'라는 이름의 연유는 해상왕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한 통일신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호남대 정종주 교수(한국풍수지리학회 학술연구원)는 "이 섬이 당나라에서 바라보면 임금 왕(王)자의 형세라 하여 당나라 도인이 임금의 명을 받고 와 임금 왕(王)자 가운데 획의 혈처를 깎아내리고 그곳에 절을 하나 짓는다.

섬 모양을 '왕(王)자'가 아닌 '구슬 옥(玉)'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당나라의 절이 있는 섬'이라 하여 당사도(唐寺島)가 된 것이다. 다른 견해로는 신라시대 청해진이 설치되었을 때 당나라를 왕래하는 배들이 이곳에 기항하면서 무사고를 빌었다 하여 당사도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사도 마을 전경 아담한 섬마을 당사도 ⓒ 이재언


섬사랑1호를 타고 배 닿은 당사도 선창에 도착하니 한적하기 그지없다. 포구 주변은 한마디로 썰렁하다. 포구도 작을뿐더러 배도 눈에 뜨이는 것이 별로 없다. 선착장보다 훨씬 높게 자리한 마을길은 깎아지른 해안 절벽만큼이나 경사가 급하다. 마을은 포구에서 오른쪽 구릉지에 있었다. 포구와 조금 떨어져 있다. 오르막길로 해서 올라간다. 길은 한 번 꺾여 들어가는데 왼쪽에 상수원시설이 있다.

여기에 124m 지하까지 파고 들어가 물을 끌어들여 산언덕에 있는 물탱크로 보내 저장해 식수원으로 사용한다.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오른쪽에 넓은 터가 있고 그 앞에 책 읽는 소녀상 동상이 있다. 이 주위는 온통 밭이다. 이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왼쪽에 밭 한가운데에 허름한 하얀색 건물이 나타난다. 바로 치안센터인 소안파출소당사도초소. 그러나 지금은 운영하지 않는다. 마을은 이곳을 지나야 나타난다.

집들이 돌담으로 이루어져 있고 주변은 밭. 집은 그렇게 다닥다닥 붙은 것이 아니고 사이사이에 밭들이 있다. 전형적인 어촌구조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집들이 보이고 바다도 눈에 들어온다. 예전에는 70여 가구가 있었지만 지금은 30여 가구 정도.

조금 더 올라가면 길이 만난다. 이곳이 발전소 가는 길이자 당사도등대 가는 길 합류지점. 등대 가는 길은 왼쪽으로 이어진다. 갈림길에 당사도 등대 가는 길 표시판이 소박하게 세워져 있다. 등대로 가는 길은 조용하다. 오솔길 사이로 나무들이 둥근 터널을 이루었다. 비가 오면 흘러내리는 그 길. 수로가 등대 가는 길을 하고 있다.

과연 등대원이 이 길로 등대에 갈까 생각할 정도로 험악한 길이다. 언덕을 넘어서니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제법 길게 이어진 산길. 등대 가는 길에는 당숲이 있다. 섬 주민들은 음력 9월 9일에 이곳에서 '중구제(重九祭)'를 지낸다.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무사안일을 빈다. 신성한 곳으로 여태껏 나뭇가지 하나 꺾지 않으며 모셔왔다. 선착장과 물양장 지을 비용을 마련하려고 섬에 있는 후박나무를 베어냈을 때도 이곳만은 손대지 않았다.

당사도 등대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등탑 ⓒ 이재언


우측은 항일유적비좌측 깨진 비석은 일인 조난비 ⓒ 이재언


예전 마을 있었던 곳, 지금은 흔적만 남아

마지막 내리막길로 내려서면 조금은 평지가 보이고 주위로 돌담들이 보인다. 이곳에도 예전에는 마을이 있었다. 4~5채의 집이 있었던 것. 지금은 흔적만 남았다. 이곳을 벗어나면 좌우로 이어진 시멘트길이 보인다. 그리고 흑염소가 몇 마리 묶여 있다. 이 시멘트길이 등대원들이 다니는 길이다.

등대는 당사도 남쪽 끝자락이다. 깨끗한 정문을 들어서면 공원화가 된 마당이 보인다. 주변을 빙 두른 난간 뒤로 드넓은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쉼터 옆에 가면 1997년에 세운 '항일전적비'가 있고, 옆에 일부가 파손된 일본의 '조난기념비'가 있다. 1909년 2월 24일 동학군의 일원인 이준화 외 5인이 등대를 습격, 일본인 4명을 살해하였는데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1997년 11월 '소안 항일운동 기념 사업회'에서 세운 것이 '항일전적비(抗日戰績碑)'이고 이 사건으로 일본인 4명이 살해되자 죽은 이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일본이 세운 것이 '조난기념비(遭難記念碑)'다.

항일전적비 건립 당시 '소안 항일운동 기념 사업회'에서 파손되어 방치되어 있던 비의 일부를 항일운동의 중요증거자료로 보존키 위하여 '항일전적비' 옆에 파손된 일부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 조난비는 해방 후 파손되어 비의 일부만이 남아있어서 자세한 기록은 알 수 없으나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등대간수가 1909년 적의 흉탄에 쓰러졌기에 이를 후세에 알리고자 1910년 이 비를 세운다.'

일본은 1876년 체결된 병자수호조약을 빌미로 우리나라에 대한 주요항구의 개항, 해안 측량권, 해도 작성권, 개항장에 거주한 일본인의 치외법권 등을 요구하면서 강제통상을 추진하였다. 일본은 이런 무리한 요구를 강행하기 위하여 우리나라 동해와 서해, 남해에 일본선박을 항행토록 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선박의 안전항해를 돕기 위한 수단으로 우리나라 남단의 자지도에도 1909년 1월 등대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이 지방 사람들이 의분을 참지 못하고 있던 터에 소안출신 동학군 이준화 선생과 해남 이진출신 성명미상의 의병 5~6명이 1909년 2월 24일 자지도등대를 습격 일본등대 간수 4명을 사살하고 주요 시설물을 파괴하는 의거를 감행하였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은 헌병 1개 소대 30여 명을 소안에 파견하여 소요에 대비한 후 맹선리에서 1박 한 후 철수하였다.

당사도 등대 전경 우측은 등탑 전경 ⓒ 이재언


당사도 등대는 1909년 1월에 불을 밝혔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제가 소안군도 해역을 항해하는 일본 군함과 상선들의 안전 운항을 위해 세웠다. 이 등대는 2006년에 등대문화유산(제21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지금의 등대는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 비행기 공격에 대파되었다가 1948년 새로 지어진 것이다. 2008년 새롭게 단장한 등대는 공원 같다. 높이 21m의 늘씬한 등탑이 새로 세워지고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의자도 놓고 나무 바닥도 깔았고 쉼터도 만들고 벤치도 몇 개 만들어두었다. 건물은 4개의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등대 끝에 서서 낭떠러지 바다를 내려다본다. 정말 망망대해다. 등탑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가서 남쪽을 바라보면 여기서 제주도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마을에 세워진 김석주옹 추모비 정자와 비석 전경 ⓒ 이재언


당사리 사무소이자 노인 회관 근처에는 겨우 차 한 대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골목길이다. 골목길을 따라 계속 가면 양쪽에 교회건물이 보인다. 오른쪽 밭에 있는 동화 속의 건물처럼 잘 만들어진 건물은 다름 아닌 천주교회. 말 그대로 공소다. 건물 하나만 있고 부속건물은 전혀 없다. 그 맞은편에 있는 것이 기독교인 교회로 등대교회다.

마을 한 가운데에 추모비가 하나 있다. '김해인고김석주공찬송추모비'. 추모비 뒤를 보니 추모의 내용이 적혀있는데 1974년도에 세워진 추모비다.

'嗚呼라! 金公은 日帝虐政時에 海南千某氏의 個人所有였든 者只島를 買收하기 爲하여 七個星霜 勞苦中 地主로부터 西紀 1941年 8月 15日字 사드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洞民 各 個人 私有財産으로 만드려 地主로부터 小作의 奴隸生活을 免케 한 그 功을 洞民은 追慕하고 千秋萬代永世不忘코저 金公의 讚頌碑를 建立하나이다. 西紀 1973年 8月 15日 者只里洞民一同'

일하는 주민 마을에서 만난 부부 ⓒ 이재언


당사도에 처음 들어온 시기는 조선시대 선조 때로 청주 황씨가 처음 들어왔으며 그 후 김해 김씨, 전주 이씨 등이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비석의 내용에 의하면 원래 이 당사도는 해남의 천아무개씨의 개인 섬이었다고 한다. 마을주민들이 소작생활을 하던 섬이었는데 김석주 옹이 일제 강점기 때 섬사람 몇 명과 함께 지주로부터 이 섬을 매입하기 위해 7년 동안 노력을 하여 마을사람들의 재산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마을사람들이 소작하면서 이 앞에 원래 앞이 안보일 정도로 무성했던 큰 나무들을 베어다 팔아서 십시일반으로 이 섬을 샀다는 것이다. 그게 1941년 8월 15일자로 섬은 완전히 당사도 주민들의 소유가 되었다. 그렇게 하여 지금의 섬으로 만들었고 그것을 추모하여 이 비석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그 아들이 이곳에 사는데 이곳에서 가장 큰 기와집이 아들집이라고 한다. 김용일 옹은 김석주 옹의 자식 중에 유일하게 생존해있는 이곳 유지로 당사도 공소의 회장이자 직전 노인회장이었다고 한다.

답사 중 만난 낚시객 낚시가 잘된 섬 당사도 ⓒ 이재언


당사도 민박집당사도의 유일한 민박집 ⓒ 이재언


임철우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그 섬에 가고 싶다>(1993년)가 촬영됐던 곳. 이 마을 전체가 촬영지라고 한다. 섬 주민 모두가 단역으로 영화에 출연했다. 영화 속에 보여진 귀성도 학교 운동장이 당사도 초등학교 운동장을 배경으로 찍은 것이라고 한다. 가장 많은 뭍사람들이 한꺼번에 섬에 들어왔던 그 때, 잠 잘 곳이 없어 섬 주민들은 자신의 집 방 한 칸을 내줬다.

영화 촬영지였는데 학교는 폐교된 지 10년이 넘었단다. 그 자리에 지금의 태양광발전소가 들어섰는데 2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마을회관에 부착된 마을현황에 의하면 가구는 비농어가 2세대 포함하여 모두 26세대다. 인구는 모두 46명인데 이 중 65세 이상이 28명이란다. 선박은 11척이나 있고 소가 8마리, 돼지가 20마리다. 그리고 해조류양식으로는 김 양식이 2곡, 다시마 양식이 1곳이라고 되어 있다.

▣ 당사도 개요
당사도는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면에 딸린 섬으로 면적 0.1.461㎢, 해안선 길이 8㎞, 산 높이 171m 삼각산, 인구는 26가구 46여 명이다. 소안도 서쪽 약 3.5㎞, 완도항에서 20.8m의 해상에 위치한다.
☛  당사도 가는 길 - 노화 이목항 섬사랑 1호, 오전 7시30분,  오후 3시40분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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