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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제 교사의 눈물, 저도 압니다

노동당 박은지 부대표의 죽음에 부쳐...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등록|2014.03.11 10:38 수정|2014.03.11 10:38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의 사망소식을 페이스북에서 보았다. 낯선 이름이었다. 교사 출신으로 진보신당에 투신하여 대변인을 거쳐 노동당 부대표가 되었다는 것을 인터넷 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나의 눈에 띈 '교사 출신'이라는 말. 몇 개의 기사를 더 본 후에야 그가 기간제 교사였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기간제 교사로서 아팠던 경험들이 떠올랐다. 나는 기간제 교사 카페에 박은지씨의 명복을 빌어 줄 것을 부탁하는 글을 올렸다.

▲ 기간제교사 카페에 노동당 부대표 박은지씨의 죽음을 애도하자고 부탁하는 글을 캡처함. 10일 9시06분 조회 1385를 기록하며 애도의 댓글이 계속 달리고 있다. ⓒ 송태원


[만화] "나는 박은지"(ejpark2013.tistory.com/m/28)를 보고 박은지씨는 89번이나 이력서를 작성했고 기간제교사 자리를 구했고, 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학교를 그만두게 되고 어디 하소연 할 곳도 없고 억울함에 절망할 때 진보신당이 힘이 되어 주었고 그것을 계기로 진보운동가로 투신하게 된 것을 보았다.

정규교사가 임신을 하면 주위의 축하를 받고 기간제교사가 임신을 하면 축하와 함께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눈치를 받고 그만두게 된다. 노골적으로 그만두라고도 한다.

나 또한 기간제교사로서의 아픔이 있었다. 책꽂이 한구석에 모여 있는 교무수첩을 꺼내어 보면서 당시에는 상당히 마음 아팠던 기억 하나를 떠올려 보았다.

▲ 학교에서의 행복했던 추억과 아픔이 기록되어 있는 교무수첩 ⓒ 송태원


어느 해 3월 어느날 교장실로 내려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교장 선생님 : "아이고, 선생님 수고가 많으시죠. 여기 앉으세요."

교장실에는 교감 선생님, 교무부장 선생님, 그리고 00부장 선생님이 앉아 있었다. 먼저 커피와 녹차 그리고 간단한 다과를 나에게 권했고 잠시 어색한 시간 후 교감 선생님은 말을 꺼내었다.

교감 선생님 : "교무부장 선생님이 연세도 있고 한데... 교감연수를 받아야 하는데 연구점수가 모자라서 송 선생님이 도와주면 어떨까 해서 이렇게 자리를 만들어 봤습니다."

교무부장 선생님은 "나는 체육과고 해서 00대회 작품에 대해 지도할 능력도 안 되고 염치불구하고 부탁을 하게되어 너무 미안하다"고 하였다. 두 손으로 나의 손을 잡으며 "죽어가는 사람 도와준다 생각하고 이번 한 번만 도와주면 평생 이 은혜 잊지 않겠다"고 "교직사회는 좁다, 내가 사립이든 공립이든 자리도 꼭 알아봐주겠다"고 매달리다시피 하며 부탁했다. 생계를 위해 일자리가 절실했던 나는 거절하지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나의 침묵은 승낙이 되었고 3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그 3개월 동안 학생들과 일 주일에 두 번 정도 저녁 늦게(보통9시)까지 보고서 작성과 발표 준비 등을 했다. 다른 날은 혼자서 자료를 찾고 내용을 정리하고 학생들이 알아야 할 것과 기타 등등을 준비했다. 가끔 교무부장 선생님은 밥을 사주었고 누가 주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50만 원 백화점 상품권을 받았다. 00대회 출품작은 최우수상을 받았다. 물론 지도교사는 교무부장 선생님으로 되어 있었다.

최우수상. 나는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부끄러웠다. '이건 아닌데, 이렇게 했어는 안 되는건데.' 단호하게 거절 못한 것이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이런 내가 교실에서 학생들을 만나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

내 마음의 괴로움은 출근을 할 때마다 계속되었다. 1년을 계약했지만 2학기때 나는 사직서를 쓰고 그만 두었다. 나는 더 이상 선생님이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는 5년이란 시간이 흐른 후에야 다시 교단에 설 수 있었다. 5년 전보다 기간제교사 자리를 구하는 것은 더 힘들었지만 다시 선생님으로 불리우며 학생들과 만날 수 있었다. 

임용고시에 도전도 해보았지만 우스운 성적으로 떨어졌다. 매년 기간제교사 자리를 구하며 외줄타기 같은 인생은 계속되었다. 교무부장 선생님의 말은 맞았다. 교직사회는 좁았다. 어느해 기간제교사 자리를 구하던 중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제출하려 간 학교에서 만난 것이다. 나는 허리를 숙이고 인사를 하였다.

첫눈에 나를 알아보는 것 같았지만 "어디서 많이 본 선생님 같은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어디서 만났는지 나에게 물어보았다. "차나 한잔하자"고 하며 교장실로 나를 안내하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결혼도 했고 애들도 있고 생계를 위해 꼭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부탁한 기억만 난다. 그리고 "난 청탁 같은 것 받는 사람 아닙니다"라는 대답을 듣은 기억은 잊혀지지 않는다. "혹시 나빠던 기억 있으면 다 잊고 좋았던 일만 기억하자며 한 번씩 놀러오라"고 하였다. 교장실은 늘 열려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

현재 이 시간에도 카페에는 기간제교사의 크고 작은 아픔을 호소하고 서로를 위로하는 글들을 만날 수 있다.

▲ 기간제교사의 크고 작은 아픔을 이야기는 글의 제목을 캡처하였다. ⓒ 송태원


노동당 부대표 박은지씨가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다 임신해서 쫓겨났다는 것을 읽을 때, 잊고 있던 그때의 눈물이 떠올랐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거나 슬퍼마라"라는 푸시킨의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분노할 때 분노하고 슬퍼할 때 슬퍼하고 싶다. 누군가를 속이는 세상이 아니었으면 한다. 특히 약자을 속이고 분노하게 하는 세상이 아니었으면 한다. 나는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슬프고 분노한다.

"기간제의 애로를 한몸에 짊어진 분이었어요 "

댓글 중 하나다. 고인의 명복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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