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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를 죽인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서평] 포스트 케인지언 하이먼 민스키의 <케인스 혁명 다시 읽기>

등록|2014.03.13 13:25 수정|2014.03.13 14:03

▲ <케인스 혁명 다시 읽기> 겉표지 ⓒ 후마니타스

'다시'라는 말은 참 많은 느낌을 내포한다. 스치는 수많은 감정 중에서도 진한 아쉬움이나 그리움은 꽤 큰 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다시 보기, 듣기, 읽기' 따위의 과거 지향적인 상품이 득세할 때는 지난 시간에 대한 향수를 동반한다.

'다시'가 붙는다는 건 당시 주목받지 못해 아쉽거나,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를 추억할 만한 동력이 사그라지지 않았단 말이다.

그런 식의 수식어가 붙는 이들은 대부분 시대를 앞서 갔다. 그래서 아련하다. 생전에 단 한 작품만 팔 수 있었던 고흐를 치켜세우며 다시 보고, 요절한 가수 김광석의 노래를 후배들이 다시 부른다. 이상의 시가 20세기 초반에 탄생했단 사실에 놀라며 다시 읽는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특히 학설이나 연구 결과가 후학들의 부단한 노력에도 지금껏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건 대단한 성과다.

대공황 시절 경제학자 케인스는 <일반이론>이라는 책을 냈다. 지금도 '케인지언'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추종하는 학자가 여럿이다. 날로 복잡해지는 경제체제 속에서도 그의 이름은 여태 굳건하다.

대표적인 케인지언 가운데 한 사람인 하이먼 민스키는 케인스의 연구를 다시 읽었고, 바로 그 결과를 <케인스 혁명 다시 읽기>에 담았다. 이 책은 1975년에 초판이, 2008년에 재출간됐다. 올해 2월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은 2008년 것을 옮겼다.

케인스 "자본주의 체제는 내재적으로 결함이 있다"

고전경제학이 득세하거나 신자유주의가 대두될 때, 경제는 여지없이 문제를 발생 시켰다. 대안이 필요할 때 우리는 케인스를 찾았다. 왜 그럴까. 케인스의 문제의식은 분명하다. 그는 <일반이론>의 마지막 장을 시작하며 말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경제사회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는 이 체제가 완전고용을 보장하지 못하고 부와 소득을 임의로 그것도 불평등하게 분배한다는 데 있다."

이어 그는 "심각한 소득 및 부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사회적·심리적 기제가 존재하지만, 오늘날처럼 심각한 불평등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는 없다"며 "유산 상속을 통한 부의 불평등은 결코 정당화할 수 없다"고도 덧붙였다. 결국 기업 활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소득의 불평등을 바람직한 것이라고 본 반면, 부를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발생하는 소득의 불평등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봤다.

케인스는 자본주의 체제를 내재적으로 결함 있는 경제 시스템으로 간주했다. 반면 신고전파 이론가들은 자본주의 경제가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자동적으로 균형을 달성하는 경제 시스템으로 봤다.

또한 케인스가 대공황을 자본주의가 야기한 당연한 결과로 해석했지만, 신고전파는 비정상적인 외부 충격과 정책 실수가 결합돼 나타난 지극히 예외적인 사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런 차이는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시각이 서로 근본적으로 다름을 알려준다.

"케인스는 단 한 번도 장기 균형을 언급하지 않았다. 균형에 관한 케인스의 거의 모든 언급들은 기껏해야 경제 시스템이 향하는 체계 변수들의 이행기적 상태에 관한 것들이다. 마셜과 달리, 케인스는 경제가 그와 같은 체계 변수들로 향하자마자, 내생적으로 결정된 변화들이 발생해 결과적으로는 경제가 향하는 체계 변수들의 체계에 다시 영향을 미친다고 사고했다. 만약 장기 균형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움직이는 과녁, 결코 맞추지 못하고 겨냥하자마자 즉각적으로 애초의 장소에서 벗어나는 유동하는 과녁일 것이다." - 본문 123~124쪽

하여 케인스가 취했던 포지션은 '개혁적 자본주의'정도라 표현할 수 있다. 그는 현존하는 자본주의 경제 질서가 투자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바탕으로 한 평등주의적 경제 시스템으로 대체돼야 한다고 믿었다. 장기간의 균형이 존재할 수 없는 체제에서 그나마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길은 통제이기 때문이다.

자본소득은 줄이고 적절한 소득분배를 보장하라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민스키가 케인스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에 의해 먹칠이 돼 버렸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경제학자들 중에는 대공황 당시에 케인스의 이론이 성공을 거둔 원인으로 시대적 상황을 꼽는 이들이 있다. 케인스주의의 당위성을 내제적인 자본주의의 불안정함보다는 특수한 상황에서 찾는 움직임 말이다.

결국 그런 주장을 바탕으로 50년대 후반, 신고전파와 결합한 케인스주의자들은 전후 경제 회복을 자신들이 제안했던 정책들이 일군 성과라고 찬양했다. 그러나 민스키는 그 시기를 일시적이고 지극히 예외적인 상황으로 봤다. 당시는 마치 '완전고용'이 달성된 것처럼 보이던 기간이다.

이 과정에서 케인스주의에 대한 해석은 '자본주의 제도들을 부분적으로 개선하면 경제 위기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을 수 있고, 공황도 온건한 형태를 띠게 될 것'이라 귀결됐다. 그런 그릇된 믿음이 진정한 케인스주의를 중단시켜 버렸단 것이다. 민스키는 이 경제정책들이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 완전고용이 '누구를 위한 어떤 종류의' 완전고용인지 자문하자고도 주장했다.

하여 그는 강력한 두 가지의 주장을 통해 '케인스의 혁명성'을 다시 읽자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는 불완전하며, 정부가 시스템을 반드시 구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이다. 자산 시장의 극단적인 혼란은 현 체제에 내재한다. 그리고 자산 가격의 급변은 실물경제의 팽창과 축소라는 경기순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민스키가 말하는 케인스의 두 가지 교훈은 이렇다. 첫째는 정부가 정책을 통해 완전고용에 가까운 경제 상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 둘째는 역시 정부가 정책을 통해 형평성 있고 바람직한 소득분배 상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민스키는 첫 번째 교훈인 완전고용을 달성하기 위해 고안된 정책들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케인스의 두 번째 교훈은 사라져 버렸다고 주장했다. 보수주의자들이 케인스주의를 이용할 때, 정부의 조세와 지출 정책은 금리생활자의 안락사를 촉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사용된다고도 지적했다.

민스키는 금융시장에서 자산의 거품과 그 거품의 붕괴가 자본주의가 가진 근본적인 불확실성 속에서 점차 커져간다고 했다. 따라서 경제적으로 고요한 시기가 오래 지속될수록 금융시스템의 취약성도 따라서 커진다. 평온함이 길어질수록 후폭풍이 거세단 말이다. 결론적으로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평등을 달성하기 위해 투자의 사회화를 주장한다.

"사회정의는 적절한 고용량을 보장하고 균등한 소득과 부의 분배를 보장함으로써 가장 잘 확보될 수 있다. 경제적 효율성과 정의는 투자의 사회화가 완전고용을 달성하고 자본의 희소성을 제거할 때 비로소 달성될 수 있다. 이를 통해 자본소득이 획기적으로 줄어들고, (소득과 유산에 대한) 직접세가 적절한 소득분배를 보장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 본문 259쪽

우리는 자본주의가 스스로 균형을 달성하는 완벽한 시스템이 아니란 사실을 경험을 통해 깨닫고 있다. 신자유주의자들로부터 경제를 구하기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점점 힘을 얻고 있다. 민스키가 살아있었다면 아마, 탐욕과 야만이 지배하는 이 괴물에게 족쇄를 채우려는 우리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케인스 혁명 다시 읽기>, 하이먼 민스키 지음, 신희영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2014.02, 1만7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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