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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동안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하나님

등록|2014.03.14 10:17 수정|2014.03.14 10:17
좋은 경험이다. 참으로 감사하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 나의 기도 들어 주심을 경험했으니까. 벌써 닷새가 지났다. 우리 교회 최고령 박옥남 할머니가 천국에 가신 지가. 할머니는 백수를 4년 남겨 놓고 96세의 일기로 지난 3월 6일 밤 11시 경 하늘나라로 가셨다.

박옥남 할머니에 대한 소개가 좀 필요할 것 같다. 이분은 내가 덕천교회에 부임해서 전도한 할머니이다. 후손들은 모두 교회 나갔지만 90이 다 되실 때까지 '하나님 믿을 바에야 내 주먹을 믿지'라는 주의로 살아 온 분이다. 따님 등 가족들이 교회 가자고 참으로 애를 많이 썼는데도 끄덕도 않던 분이 우리 교회 나와서 노년부 출범의 주춧돌이 되는 기적의 주인공이시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우리 교회 노년부 회장을 맡으셨다.

박옥남 할머니는 현대사의 산 증인으로 굴곡 많은 삶을 사셨다. 일제 말 동경 대진재 때 외동아들을 잃었고, 거기에 30대 초반에 남편까지 여의어 청상과부가 된 사람이다. 작은 따님이 후덕한 사람을 만나 결혼한 뒤로는 그 사위를 아들같이 든든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위도 50을 겨우 넘긴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육체가 건강하고 정신이 맑아 우리 동네에서 돌아가시기 1년 전까지 혼자 생활하셨다. 이른 바 독거노인(獨居老人)이었던 셈이다.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그 풍습을 몸에 익힌 탓으로 매사가 반듯하셨다. 할머니는 아들과도 같이 생각하던 사위를 먼저 보내고, 느지막하게 교회 나오시면서 목사인 나를 아들처럼 생각하신 것 같다.

세미나 등으로 멀리 출타할 일이 있을 때면 새벽 같이 불러 찰밥을 먹이시곤 했다. 먼 길 떠날 때는 배가 든든해야 한다면서. 그리고 소화가 잘 안 된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호박죽을 끓여 보내 주었고, 생일 때는 나이만큼 새알을 넣어 미역국을 끓여 주시기까지 했다. 나도 할머니가 손수 지어 주신 음식에서 어머니의 손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분이 세상을 뜨신 것이다. 3박4일 동안 진행된 영성 훈련 마치고 부리나케 할머니가 계시는 용인의 한 노인요양원으로 차를 몰았다. 목적지를 찍은 네비게이션이 마음의 촉박함을 잘 읽고 있는 듯 정확하게 길을 안내해 주었다. 노인 요양원은 제법 큰 규모를 갖고 있었다. 말기 암 환자를 비롯해서 죽음을 문 앞에 둔 분들이 마지막 머무는 곳이라고 했다.

여러 동(棟)의 건물이 서 있었고 앞치마를 두른 봉사자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도 보였다. 박옥남 할머니의 방이 있는 건물은 나지막한 1층 신축 건물이었다. 깨끗하게 정돈된 방엔 TV, 가습기, 커피포트 등 최소한의 생활 도구들이 있었고 간병하는 따님 것으로 보이는 침구류도 가지런히 개켜 있었다.

보름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영양 주사만 맞고 있는 분이 우리 내외를 용케 알아보았다. 아주 또렷하게 알아 보셨고 비교적 분명한 발음으로 말도 하셨다. 대화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월요일부터 목사님을 기다렸다는 것, 오시지 않아 나를 버리시지나 않았는지 걱정을 했다는 것, 나중엔 요양원의 목사님이 우리 목사님으로 보이기까지 했다는 것, 찾아주어 무척 감사하다는 것, 당신은 승리해서 이미 천국에 갔다는 것, 목사님 건강과 자녀들을 위해 하늘에서 기도하겠다는 것 등.'

요양원에서 간병을 하던 따님이 깜짝 놀랐다. 일주일 전부터는 거의 말씀을 하지 못한 분이 너무 대화를 잘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조용히 예배를 드렸다. 할머니가 평소 즐겨 부르시던 411장 '예수 사랑하심은'을 부르고 나서 딤후 4:7-8을 본문으로 '선한 싸움 다 싸우고'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만년에 구원 받고 기쁨으로 생활하시다가 편안히 천국 가시는 복을 누리게 해 달라는 요지의 말씀 선포였다. 그리고 402장 '행군 나팔 소리로' ,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두 곡을 부르고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할머니는 평소엔 잘 안 하시는 말과 제스처를 보이셨다. 얼굴을 자근자근 만지시며 사랑한다고 하셨고, 안아 달하고 하셨으며 당신을 남겨두고 가지 말라고도 하셨다. 우리 내외는 따님과 그리고 간간히는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며 그곳에 머무르다가 다음 약속 때문에 자리를 떠야만 했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아내는 혼자라도 할머니에게 남아 하룻밤이라도 함께 지내고 싶어 했지만, 갔다가 다시 오기로 하고 다음 행선지로 출발했다.

용인시 처인구 외곽에 있는 Cafe 토기장이에 들렸다. 이른바 카페 교회라고 부르는 이곳은 평일엔 카페로 활용하며 사람들에게 대화의 공간으로 제공되다가 주일엔 예배당이 되어 온전히 주님께 드려지는 공간으로 변하는 곳이다. 새롭게 시도되는 열린 예배 공간이라고 하겠다. 5년 전 이 카페 교회 출범 예배를 드릴 때 내가 참석해서 축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주어진 환경과 갖고 있는 생각의 편차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 담임 목사님과 나는 그 뒤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밤이 늦어 귀가했다. 할머니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튿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잠을 청해야만 했다. 3월 7일(금) 오전 10시, 이충구 목사님이 담임으로 있는 한빛은혜교회에서 빌립전도훈련 54기 개강을 하는 날이고 나는 거기에 참석하겠다고 약속해 두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새벽 6시 39분 기차표를 예매하고 잠이 들었다.

이튿날 구포역에 내려 역사를 빠져 나오려고 하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할머니의 따님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그는 먼저 목사님 내외분께 감사하다는 말부터 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어제 밤 11시쯤 운명하셨음을 전했다. 우리가 다녀 간 뒤 7 시간 만에 돌아가신 것이다. 우리가 방문해서 드린 예배가 임종 예배가 되고 말았다. 아주 편안하게 눈을 감으셨다고 하지만 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하지 못한 데 대해 죄송한 마음이 몰려 왔다.

따님의 감사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다. 마지막 임종 예배를 드려 어머니가 편안하게 천국 가시게 되어 감사, 그 누구도 전도할 수 없던 분을 목사님 내외분이 전도하여 어머니 인생의 말미 8년 동안 행복하게 사시게 해 준 것에 대해 감사, 혼자 사시던 어머니를 친 어머니처럼 돌봐 준 데 대해 감사. 하지만 나는 도리어 따님에게 감사했다. 어머니를 마지막까지 지극 정성으로 모신 따님의 효성이 고마웠다. 요즘 보기 드문 딸이었다.

따님의 노인에 대한 사랑의 마음은 남달랐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 노년부 할머니들에게 절기 때마다 선물을 보내왔고, 할머니들이 좋아하시는 일회용 믹스 커피는 그가 도맡아 공급했다. 지난 겨울 성탄절에는 할머니들께 두툼한 목도리를 선물해서 우리 교회 노인 분들을 추위에서 보호해 주었다. 할머니들은 목도리로 인한 방한의 따뜻함에 더해 따님의 훈훈한 마음으로 지난 겨울은 아주 따스하게 보낼 수 있었다.

따님은 어머니의 부음 소식을 전하면서 장례 절차는 생략하니 목사님 내외분이 올라오시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할머니가 젊으셨을 때 당신의 시신을 병원에 기증하셨다는 것이다. 그분이 시대를 앞서는 개명된 분임은 이런 데에서도 읽혀진다. 시신은 2년 뒤에 수습되어 유족이 원하는 절차에 따라 장례 의식이 진행되니 그 때 내게 집례를 부탁하겠다고 부연했다.

목회자인 나는 많은 사람들의 마지막을 자주 접한다. 대부분 의식이 없는 상태로 마지막 숨을 거두는 현장에 있게 되는데, 박옥남 할머니는 특별한 경우이다. 음식을 끊고 보름 정도를 영양 주사에 의지하다가 우리 내외를 만나기 위해 5 일 정도를 더 버티신 것이 된다. 생의 마지막 날 두 시간 여에 걸쳐 생생하게 대화하신 뒤 일곱 시간 뒤에 하늘나라 가셨다는 것은 상식선에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 영역이다. 하나님의 은혜란 말 이외의 것으로는 해명이 되지 않는다.

금년 96세의 우리 교회 최고령 박옥남 할머니는 천국에 가셨다. 천국 가서 우리 덕천교회와 부족한 종과 성도들을 위해 그리고 평소 마음 아파하셨던 쇠락한 예배당 건축을 위해서도 기도하시겠다고 약속했다. 한 영혼을 천국에 보내고 슬픔과 기쁨이 이렇게 혼재되기는 내게 흔치 않은 일이다. 천국에의 소망과 확신, 박옥남 할머니의 부음을 듣고 그분이 살아계실 때 이상으로 든든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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