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산사타이베이에 있는 사찰로 열심히 신에게 기도하는 모습 ⓒ 장슬기
대만의 거리는 깨끗했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타이베이(대만의 수도) 시내는 조용했다. 서울로 따지면 명동에 해당하는 거리에는 향을 가득 피워 놓아 경건한 사찰이 여러 곳에 있었다. 사찰이 참 많았는데 그곳엔 특정 종교의 신이 아닌 여러 잡신을 모셔두었다.
대만 길거리에는 복권 판매점도 많았다. 우리나라에 있는 복권 전문점보다 분위기가 개방적이고 밝았다. 야시장에는 여러 가지 도박성 오락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많았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찰이나 복권 판매점 혹은 야시장에 모인 대만인들은 무엇을 그렇게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던 것일까? 구석구석을 여행하며 이렇게 종교적 행위에 열광하는 모습이 한국과 참으로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 복권판매점타이베이 시내에 있는 한 복권판매점 ⓒ 장슬기
서울 야경에 흩뿌려진 빨간 십자가들만으로 대만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SNS에서 올라오는 수십 장의 지폐 사진을 공유하며 인생 대박을 기원하거나, 특정 스포츠 선수의 메달 획득 소식에 자신의 소원을 섞어 버리는 일종의 종교행위는 평일 대낮에 향을 피워놓고 동물 신에게 간절히 기도하는 대만인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로또에 빠진 어른들과 토토에 빠진 청년들의 모습이나 도박성 오락 시설이 여기저기 숨어있는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국민당과 새누리당이라는 거대 정당의 장기 집권과 정권교체로 인해 현재의 야당이 두 번 집권했던 '정치적 경험', 일제 식민지배뿐 아니라 외세에 휘둘리며 제대로 자신의 영토의 주인인 기억이 희박했던 '역사적 경험' 때문일까? 한국과 대만은 그렇게 슬프게 닮아있다.
"종교는 번민하는 자의 한숨이며 인정없는 세계의 심장인 동시에 정신없는 상태의 정신이다. 그것은 민중의 아편이다."
마르크스는 <헤겔법철학 비판>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과 대만의 민중은 아편에 흠뻑 취해 있다. 현실적인 행복을 추구하지 못하고 종교행위에 빠져 있다.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 우리가 건강하면 아편이 필요하지 않듯이 국민 개개인이 거대한 압력에 심하게 억눌리지 않는다면 종교는 필요하지 않다.
한숨을 쉬고 있는 자들은 왜 번민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구조적 억압에 대해 개인적이고 일시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종교로 사회를 지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종교를 아편이라고 밝힌 뒤 이렇게 덧붙인다.
"민중의 환상적인 행복인 종교를 폐기하는 것은 민중의 현실적인 행복을 요구하는 일이다. 민중에게 자신의 상태에 대해 그리는 환상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태를 버리라고 요구하는 일이다. 따라서 종교에 대한 비판은 종교를 후광으로 하는 고통스러운 세계에 대한 비판을 내포하고 있다."
이제 왜 대만의 거리가 깨끗했는지 알 수 있다. 대만의 공공장소는 오로지 '치안(Police)'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치안은 거리를 항상 깨끗하게 하며 침묵하게 한다. 갈등이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만든다. 광장에서의 여러 가지 토론과 길거리의 시위와 같은 '정치(Politic)'의 공간일 수 없게 만든다. 공공장소의 주인을 권력으로 만들 뿐 결코 민중일 수 없게 만든다.
사회적 억압이 있어도 "외롭고 힘들다"며 뛰쳐나와 외치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개인적 구원만을 염원하는 사회. 이 사회는 민주주의를 향해가는 사회가 아니다. 17세기, 네덜란드가 지배하기 시작해 스페인, 중국을 거치며 작은 섬의 주인인 적이 없었던 사람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경험했으면서도 일제가 다른 지배자들과 달리 근대화를 시켜줬다며 일본을 칭송하는 대만인들을 보며 다시 한 번 깨끗한 거리가 주는 불편함에 대해 느끼게 되었다.
"땅에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선다."
보조국사 지눌은 넘어진 곳, 바로 거기서 우리가 일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야근이 많아 피곤하다면 회사 현장에서 노동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등록금이 많아 부담되면 학교 현장에서 교육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취업난이 심각해 삶이 팍팍하다면 문제의 원인을 찾아 그곳을 향해 외쳐봐야 한다.
그런 삶의 외침들이 공통된 중심을 향할 때, 우리는 치안(Police)이 아닌 정치(Politic)를 발견하고, 개인적 구원이 아닌 구조의 변화를 이뤄내며, 인간적 가치인 연대를 실현할 수 있다. 아무런 사회적 그물망도 없는 위태로운 절벽에서 종교적 한풀이에 의지해 버텨가는 비루함 속에서 우리는 온전히 주인이 되기 힘들다. 우리가 넘어진 곳들로 돌아가서 아편을 불태우자. 거기서 민주주의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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