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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이면 됐다, 헤어지자

나의 담배 이야기 첫번째

등록|2014.03.18 15:21 수정|2014.03.18 15:21
보건소의 금연상담실를 찾았다. 20년간 성실하게 꾸준히도 피웠던 담배(하루 한갑)를 끊기 위해서다.

▲ 부산광역시 북구 보건소내에 있는 금연상담실 ⓒ 송태원


담배와의 첫 만남은 대학을 입학하고 나서였다.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소줏잔을 기울이며 한 개비 담배를 피우던 과선배의 모습이 꽤나 멋져 보였다. 나도 그때 한 개비 담배를 얻어 불을 붙였다. 태어나서 처음 피웠던 담배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피운 담배지만 매캐한 게 느낌이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뭔가 인생의 깊은 맛을 알게 된 것 같았다. 그 후로 가끔 담배를 태운 적은 있었지만 본격적인 흡연자는 아니었다.

"요새 군대는 참 좋다. 구타가 어디 있노."

내가 흡연자가 된 곳은 군대다. 가끔 집합이 있었다. "쌍팔년(1988년)도면 너네 다 죽었다"며 고참의 사랑의 매(?)와 간단한 얼차려가 있고 난 후에는 어둠속에서 담배를 나누어 피며 그 때의 시름을 연기로 날리곤 했다. 동기나 한달 선임이 나에게도 담배를 건네곤 했지만 몇 모금 빨지는 않았다. 아직 흡연자는 아니었다. 훈련 중 "담배 일발장전"에 흡연자들이 다 같이 연기를 뿜여낼 때 난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십분간 휴식을 즐겼다.

축구를 좋아한 나는 무릎을 다쳐(슬관절 연골파열)로 수술을 하고 국군통합병원에 입원을 하게 됐다. 어느 정도 걸어다니게 됐을 때 내 주위 베드(침대)에 있는 환자들의 담배와 음료수 심부름을 해 주게 되었다.

휠체어를 타거나 거동이 불편한 환자(심부름을 부탁하기 곤란한 후임병)들의 담배도 사다주고 음료수도 사다 주고 하면서 고맙다며 건네준 담배 한 갑이 나를 본격적인 흡연자가 되게 했다. 한 번씩 피웠지만 언제든지 안 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그 후 20년이 지속된 것이다.

중간 중간 금연을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이틀을 넘기지 않았다. 금연일기를 적어 봐야지 하며 새해가 시작될 때나 새 학기가 시작하는 3월에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시작을 한 적은 없다. 금연일기를 적을 만큼 담배를 끊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 금연상담실에서 금연서약서를 적고 제공받은 구강청결제, 목캔디, 사탕, 니코틴 패치 ⓒ 송태원


▲ 금연상담실에 비치되어 있던 홍보물과 금연길잡이 책자 ⓒ 송태원


지금(18일 낮 12시 07분)은 마지막 담배를 피우고 4일 12시간 09분이 흐른 시점이다. 이틀간의 금단증상은 나의 예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금연 길잡이에 적힌 대처방법으로 물을 많이 마시며 흡연 욕구를 참아냈다. 첫날은 물을 3리터 이상 마셨다. 물을 많이 마신 부작용은 금연 이틀째가 되는 날, 심각한 현상으로 나타났다. 설사였다.

흡연 욕구를 이겨내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두통은 없어지지 않았고 게다가 설사까지 하게 되었다. 집중력 저하, 두통, 그리고 설사는 나를 극도로 짜증나게 했다. 금연 이틀째 금단증상에 의한 피로감은 "담배는 스스로 끊을 수 있는게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

그 때 생각난 것이 '20년 함께한 담배와 이별하기'를 글로 적어 보자는 것이었다. 이 글을 쓰면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길 것만 같았다. 현재 집중력 저하는 심각하다. 지금 적고 있는 이 글도 임시저장을 누르지 않고 그냥 닫아 버리고, 계속되는 오타에 짜증이 장난이 아니다. 담배 한 개비면 해결이 된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어제는 "그렇게 힘들면 그냥 담배 펴"라고 아내가 말했다. 하지만 어렵게 시작한 담배와의 헤어지기를 멈출 수는 없다. 두 딸과 아들의 기대가 너무 크다. 실망시킬 순 없다. 앞으로 살아있는 동안 꾸준한 글쓰기와 담배와의 이별 여행을 계속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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