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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라 불리고 허름한 집에서 산 국가주석

[베트남 캄보디아 여행기 1] 훌륭한 지도자가 국가 운명을 좌우한다

등록|2014.03.23 17:20 수정|2014.03.24 09:03

▲ 베트남인들에게 국부로 추앙받는 호치민의 모습. 거의 모든 상가와 관공서에도 걸려 있었다 ⓒ 오문수


아내와 함께 베트남여행에 나섰다. 베트남은 우리나라보다 더한 외세의 압제와 무력침공을 물리치고 독립과 통일을 이뤘기 때문에 어디서 이런 힘이 나왔는가 궁금해서다.

베트남의 역사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끝까지 굴하지 않고 일어선 결기의 역사다. 중국으로부터 천년 동안 지배를 받고 일어났지만 또 다시 프랑스 지배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의 지배를 받다가 일본이 패망하자 흑심을 보인 프랑스와 8년간의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이겼다. 어디 그것뿐인가? 세계 최강인 미국을 이기고 중국과의 전쟁에서도 매운 맛을 보여준 저력 있는 나라다.

베트남 공항관리들의 얼굴은 엄격하고 딱딱했지만 신속하게 입국심사를 해줬다. 그러나 베트남 방문을 마치고 곧바로 캄보디아 시엠립 공항으로 날아가 입국심사를 당해본 대부분의 한국인 승객들은 모멸감을 느꼈다. 공정함과 부당함. 인접국인데 어디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결론은 훌륭한 지도자와 그를 중심으로 단결한 국민성 때문이라는 답을 얻었다.

베트남의 국부이자 '호 아저씨'로 불리는 호치민

▲ 호치민의 시신이 방부처리돼 안치되어 있는 호치민 묘 ⓒ 오문수


호치민은 베트남의 정치가이며 국부로 추앙받는다. 본명은 응우옌신꿍, 자(字)는 띳티인, 호치민은 가명이며 '깨우치는 자'라는 의미다. 그의 부친은 프랑스 식민치하에서 명맥을 유지하던 응우옌 왕조의 관리가 되었으나 자신의 일이 식민지 경영의 주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에 번민했다.

결국 불복종을 이유로 해직된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호치민과 형, 누나도 주변에 민족주의 사상을 전파하며 반식민지 독립운동에 참여해 수감됐다. 본인도 프랑스-베트남학교 재학시절 징세 반대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쫒겨나고 만다.

호치민은 잠시 민족주의자 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지만 독립을 위해서는 서양 나아가 세계를 더 자세히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프랑스 해운회사에 견습요리사로 취직했고 정원사, 청소부, 사진수정가, 화부 등을 전전했다.

그밖에도 영국, 미국 등을 전전하며 신문물과 사상을 배웠다. 이때의 경험으로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타이어, 스페인어, 독일어, 러시아어에도 능했다.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 최해성씨가 호치민에 대한 베트남 사람들의 평가를 들려줬다.

"세상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하는데 호치민은 먼지 안 나는 사람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데 내가 무슨 각하냐?'며 '호 아저씨라 불러라'고 해서 사람들이 '호 아저씨'라고 불러요. 또 '자신의 친척 10촌까지는 공직을 주지 말라'고 해서 친인척 비리를 막았죠."

하노이엔 호치민이 기거했던 옛 주석궁이 있는데, 이곳은 본래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 총독부였다고 한다. 당연히 호화로운 곳이지만, 호치민은 정작 이 옛 총독부 관저를 쓰지 않고, 주석궁 안의 연못 옆에 작고 허름한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아이들이 와서 수염을 당기면서 '파파 호호'라는 애칭으로 불러주면 미소 지으면서 손수 베트남 고유악기를 치고 아이들을 위한 노래를 불러주며 같이 놀아주곤 했다. 하루는 아랫사람이 아이들이 마구 뛰어놀면서 시끄럽다고 화내자,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처럼 활기찬 곳은 없다면서 놔두라"고 했단다.

▲ 호치민 묘 바로 건너편에 있는 베트남 국회의사당 모습 ⓒ 오문수


▲ 호치민 묘가 바라보이는 바딘 광장 모습. 베트남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장소로 1954년 9월 2일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한 곳이다. ⓒ 오문수


낡은 옷 기워 입고 폐타이어 잘라 신발 만들어...

호치민은 낡은 옷을 기워 입기 일쑤였고, 폐타이어를 잘라 신발을 만들어 신었다고 전해진다. 그 뿐만 아니라 하노이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는 고가 귀중품은 커녕 고물 라디오 한 대와 책 몇 권이 있는 게 전부였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검소한지를 보여준다.

또한 3찬만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왜 3찬만을 드시냐고 물으니 "내가 반찬 하나를 더 먹을 때마다 우리 국민 하나가 더 죽는다"라고 했다고 한다. 자신이 가는 곳을 경호원들에게 알리지 않았는데 이는 갈 곳을 알리면 그곳에 있는 주민들이 귀찮기 때문에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시키고, 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도자기 상자에 담아 하나는 북부에, 하나는 중부에, 하나는 남부에 뿌려다오. 무덤에는 비석도 동상도 세우지 말라. 다만 단순하고 넓으며 튼튼한 통풍이 잘 되는 집을 세워 방문객들을 쉬어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 방문객마다 추모의 뜻으로 한두 그루씩 나무를 심게 하라. 세월이 지나면 나무들은 숲을 이룰 것이다."

▲ 하노이 시내의 오토바이 모습에 활력을 느꼈다 ⓒ 오문수


그는 젊은 시절부터 일본을 무척 견제했다. 2차 대전 당시 프랑스를 몰아내고 일본이 잠깐  베트남을 차지할 당시 많은 베트남인이 같은 아시아인이라며 기뻐하자 "어리석다!"고 비난하면서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아 행복하다고 하던가?" 하며 같이 독립운동을 하던 수하들과 측근들을 꾸짖었다. 박원순 시장이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로 있던 시절에 <호치민 이야기>의 추천사로 썼던 글이다.

"훌륭한 지도자가 있다는 것은 국민들에게 더 없는 행운이자 행복입니다. 위대한 지도자는 역사를 이어가며 후손들에게 삶의 등대가 되고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용기와 열정의 불꽃이 됩니다. 아마 세기를 넘나들며 호치민만큼 온 국민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은 지도자는 드물 것입니다."

베트남에서 시집와 여수에 살고 있는 부티항에게 호치민에 대한 평가를 직접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호 아저씨요? 그 아저씨는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고 국민을 많이 사랑하며 어떻게 하면 국민들을 편하게 잘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자신의 시신은 화장하고 무덤도 동상도 세우지 말라고 한 호치민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고 방부처리 돼 호치민 묘에 안장되어 있다. 그를 너무나 사랑한 국민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무덤에는 방부처리 해 유리관에 모셔진 호치민 시신이 살아 있을 때처럼 검소한 복장을 입고 잠들어 있다. 6.4지방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이런 훌륭한 지도자는 없을까?
덧붙이는 글 여수넷통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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