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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박 대통령'의 인기... 언제까지일까

[서평] 타리크 알리와 올리버 스톤의 대담 <역사는 현재다>

등록|2014.03.26 20:07 수정|2014.03.26 20:07
작년 내내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사태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이른바 '역사전쟁'으로 일컬어지는 교학사 역사교과서 사태는 역사를 향한 우리 사회의 신경증적인 관점의 이면을 잘 보여 준다. 우리에게 역사는 과거가 아니다. 역사는 현재이다. 역사는 우리 삶에 부단히 영향을 미치는 살아 있는 존재다.

가끔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유신시대에 관한 책을 읽고 서평기사를 올린다. 비단 박정희 시대를 다룬 책의 서평기사가 아니더라도 글에 '박정희'와 '유신'을 언급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글 조회수가 급증한다. 달리는 댓글 수도 보통 기사와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아진다. 한마디로 반응이 뜨겁다. 당대인을 사로잡는 '역사 상품'으로 박정희의 힘 덕분이리라.

파키스탄 출신 역사가와 세계적인 영화감독의 대담

▲ <역사는 현재다> 책 표지. ⓒ 오월의봄

'우리의 오늘을 있게 한 역사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달린 <역사는 현재다>는, 파키스탄 출신의 영국 역사가 타리크 알리(1943~현재)와 미국의 세계적인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1946~현재) 사이의 대담을 엮은 책이다. 책 제목을 통해 드러나는, 역사에 대한 대담자들의 관점은 다음 대목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월리스(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시절의 부통령-기자 주)라면 확실히 원자폭탄을 투하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렇게 벌어진 일들이 사람들의 삶을 뒤바꿔놓죠. 그 사건들은 우리의 삶을, 그리고 수백만 명의 삶을 그렇게 뒤바꿔왔죠. (127쪽)

이는 단지 월리스를 칭찬하자고 던진 말이 아니다. 역사는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 과거의 역사적 사건은 과거를 지나 현재를 거쳐 미래에까지 끝없이 영향을 준다는 말이다. 역사가 우리의 삶을 바꾸고, 현재가 과거와 연결된다는 것은 이들 두 대담자의 한결 같은 관점이다.

대담자들은 러시아 혁명에서 시작해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 중동 사태 등을 거치면서 팍스 아메리카나와 신자유주의, 미국과 이슬람의 관계 등을 동시다발적으로 다룬다. 전체적으로 통시사와 주제사가 혼합된 방식이라 할 만하다.

대담자들이 '우리의 오늘을 있게 한 역사'의 가장 주된 장본인 중 하나로 지목한 국가는 미국이다. 대담자들이 보기에 미국은 지나치게 많은 나라에 정치적·군사적으로 개입해 왔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이와 같은 미국의 간섭은, 올리버 스톤의 말대로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크게 바꿔 놓았다.

타리크 알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미국이 '제국'의 궤도에 막 들어서게 된 역사적인 첫 관문이었다고 본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패권적인 제국의 위상을 갖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그런데 그는 미국으로 대변되는 부르주아 문명(또는 유럽 자본가 문명)이 20세기 전반에 이루어진 제1·2차 세계대전과 600만 유대인의 죽음, 콩고와 기타 많은 지역에서 일어난 야만적인 전쟁과 학살의 주요 배경 원인이었다고 본다.

(올리버 스톤) 그것(제1·2차 세계대전 중의 수많은 죽음들-기자 주)도 부르주아 문명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타리크 알리) 다르게 설명할 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르주아 문명과 그 문명의 여러 가지 다른 흐름 사이의 경쟁 때문입니다. ··· 경쟁은 매우 파괴적입니다. 그래요, 매우 파괴적이에요. 개인의 정신에 특정한 부정적 효과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더구나 국가가 경쟁에 가담하면, 수백만 명의 희생으로 이어지죠. (186~188쪽)

올리버 스톤은 미국을 이든·초트·예일·하버드 등과 같은 명문 학교를 나온 사람이 만들어 왔다고 말한다. 타리크 알리는 이들을 '국가 지식인(state intellectual)'으로 부른다. 이들 명문교 출신들은 해외 대사관과 국무부 등 국가기관에서 '제국'의 여러 가지 업무를 담당한다.

타리크 알리는 이와 같은 엘리트 교육 체계가 미국 '제국'의 체제와 그 관리자들을 계속 재생산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지금 시점이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이 필요한 때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과거 역사를 반복해 서로 싸우고, 그런 과정을 통해 이 행성을 파괴할 작정인가?" (188쪽)

이른바 자칭 '선의 축'인 미국을 향해 이렇게 말해도 될까. 테러에 관한 대담자들의 분석을 통해 이 문제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미국의 '근본주의자'들, 오사마 빈 라덴과 다르지 않았다

타리크 알리는 '테러와의 전쟁'이 '이상한 개념'이라고 말한다. 미국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테러는 새삼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는 테러리즘의 역사를 '현실'로 정의한다. 세상의 변화를 위해 모인 이들로 구성된 소규모 집단이 전략상 목표를 타격하는 일이 테러였기 때문이다. 그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아나키스트들이 대통령과 주지사, 러시아의 차르 암살을 기도했다는 예를 든다.

하지만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이란 본질적으로 미국 외교 정책이 자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들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미명 아래 동맹국들의 도움으로 세계 곳곳에서 원하는 대로 사람들을 감금하고 체포한다.

이라크를 대상으로 한 미국의 태도가 대표적이다. 타리크 알리는, 미국의 이라크 제재 결과로 어린이 50만 명이 사망한 사실을 변호한, 클린턴 정부 시절 유엔 대사를 맡고 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의 말, "네. 그런 희생을 치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199쪽)를 인용한 뒤, "미국엔 이런 정신 상태를 가진 지도자들이 있"(199쪽)다고 일갈한다.

미국과 미국 지도자들의 이런 모습은 어떻게 해서 형성된 것일까. 올리버 스톤의 말처럼, 역사를 무시하거나 부정하려는 경향이 강한 미국의 모습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미국 제국이 다른 제국과는 다른 특이한 기원을 갖고 있다는 올리버 스톤의 지적에 대해 타리크 알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이는 자신들의 선함과 위대함을 내세우는 종교 근본주의자들의 신념과 관련이 있습니다. 미국에 왔던 근본주의자들, 즉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의 사고방식이 기본적으로 와하비파나 오사마 빈 라덴과 다르지 않았다는 얘기예요. 사실 프로테스탄트 근본주의와 와하비 근본주의 사이엔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219쪽)

타리크 알리는 그 근거로 이들 '근본주의자'들이 여성을 어떻게 다뤄 왔는지를 보라고 말한다. 올리버 스톤은 세일럼 마녀 재판을 예로 든다. 1692년,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 마을에서 180명이 넘는 마을 사람들이 마녀로 고발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 결과 25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귀한 목숨을 잃은 것이 세일럼 마녀 재판 사건이었다. 그것은 미국의 '근본주의'적인 본질의 한 측면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자 인간의 집단적 광기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다음 차베스'는 어디서 나올까

올리버 스톤은 마지막 장인 '역사의 복수'를, 타리크 알리의 저서 <근본주의의 충돌> 중 일부를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전문가나 정치인이 인정할 필요가 있는 보편적 진실이 있다. 노예와 소작농이 항상 주인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로마 제국 시절 이래로 역사에 기록된 엄청난 격변이 발생할 때마다, 예정대로 진행된 일련의 사건이 아니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태가 결정적 원인이 된 경우가 많았다. 21세기라고 해서 이 사실이 달라질 이유가 무엇인가?" (212쪽)

이 인용문에서 타리크 알리가 강조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낙관이다. 올리버 스톤은 타리크 알리가 언젠가 지성으로 인해 비관론자가 되고 의지로 인해 낙관론자가 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고 소개한다. 위 인용문에 대한 논평에서도 타리크 알리는 낙관론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어야 역사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감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때 그가 예로 들고 있는 나라는 남미의 베네수엘라와 차베스다. 그는 베네수엘라를 '희망의 축'이라고 명명한 바 있는데, 그것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말한다. 올리버 스톤은 타리크 알리에게 '다음 차베스'가 어디에서 나올지 묻는다.

글쎄요, 정확히 예측하기는 어려운 질문이네요. 제 생각엔 남아시아나 극동 지역에서 우리를 놀라게 할 무언가가 나올 것 같아요.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무언가가요. 사람들은 경제 거인으로서 중국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중국 체제가 어떤 효과를 낳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농민 봉기, 노동계급의 공장 점유, 불온하고 격정적인 지식인 계급, 이러한 일들이 모두 벌어질 수 있습니다. (215쪽)

▲ 서울 상암동에 위치한 '박정희 기념·도서관'. ⓒ 권우성


역사에 대한 성급한 희망은 자칫 섣부른 판단을 불러올 수 있다. 하지만 타리크 알리의 말처럼, 어느 정도의 '낙관론'은 역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감지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지리멸렬한 현실에서 희망을 얻는다.

한국에서 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 그의 딸 박근혜 대통령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하지만 역사 상품으로서 이들이 갖는 진가가 끝까지 지속될까. 타리크 알리 식의 의지의 낙관론에 따라 의심스럽다고 여기고 싶다.

그가 말한 역사의 '낙관론'에 따르건대, 우리나라는 분명 세상을 놀라게 할 무언가가 나올지도 모르는 극동 지역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지성의 비관론에만 시달리는 이들에게 의지의 낙관론으로도 무장한 이 책을 권하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역사는 현재다> (타리크 알리·올리버 스톤 대담, 박영록 옮김 | 오월의봄 | 2014. 2. 7. | 238쪽 | 13,000원)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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