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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위주의 줄세우기 교육, 서당에서 해법 찾아야

[서평] 한재훈의 <서당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

등록|2014.03.24 14:39 수정|2014.03.24 14:39

책겉그림〈서당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 ⓒ 갈라파고스

북유럽식 교육이 한창 열풍입니다. 무엇보다도 창의적이고, 협동심을 발휘하는 까닭이죠. 우리나라처럼 무언가 외우고, 경쟁하는 교육풍토와는 전혀 다르죠. 더욱이 선생님 한 분당 학생수도 그리 많지 않고요.

그만큼 그 나라들은 우리식의 '현실성'이나 '유용성'이나 '효율성'과는 다른 가르침을 표방하고 있는 게 분명하겠죠. 그 나라들은 '연대성'과 '다양성'을 중심으로 한 '창조성' 교육에 방점을 둔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옛날 우리나라의 서당식 교육은 어땠을까요? 훈장님 밑에 10명 정도의 제자들이 <사자소학>을 따라 외우고 강독하고, 또 <학어집>을 따라 새기는 모습들 말이죠. 아이들도 많지 않으니 훈장님이 일일이 지도해줄 수 있고, 그러면서도 깊은 연대감을 품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서당의 강이 학동들의 수준과 능력을 평가하는 지혜입니다. 서당의 학동들은 학교의 학급처럼 동일한 연령대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서당은 한두 살 차이가 나는 학도들이 마치 계단 꼴 모양과 같은 연령별 구성을 이룹니다."

한재훈의 책 <서당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에 나온 내용입니다. 옛날 서당 속 훈장과 제자들의 가르침을 담은 그림을 볼 때면 늘 훈장을 중심으로 아이들이 빙 둘러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계단 꼴 모양 속에서 서로서로 연대감을 갖고, 그러면서도 일일이 훈장님의 지도를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일대일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학원이 그래도 좋은 것은 학교와는 달리 숫자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죠. 그만큼 선생님과 학생수의 비율이 적당하기 때문에 다들 선생님과 눈을 맞출 수 있고, 그만큼 일대일 교육도 가능한 까닭이겠죠. 옛날 우리나라의 서당식 교육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서당의 하루는 아직 동트지도 않은 이른 새벽, 선생님의 기침과 함께 시작됩니다. 기침이란 잠자리에 일어나신다는 뜻의 기침도 되지만, '어험, 어험' 하시는 선생님의 헛기침소리를 뜻하기도 합니다."(본문 48쪽)

서당의 하루 일과를 알리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을 보니 맨 처음 훈장님이 기침을 하면서 훈장님 나름대로 적어 놓은 <학어집> 낭독한다고 하죠. 성경에 나온 걸로 빗댄다면 <잠언>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훈장님이 그걸 읽고 있으면 제자들도 자기들 나름대로 공부한 것들을 '낭독'한다고 하죠. 물론 이 때의 낭독은 '암송'이라고 하죠. 그래야만 가슴 속에 새길 수 있는 까닭이라고 하죠.

그 이후에 그날 배울 것을 미리 준비한 훈장님으로부터 열 명의 아이들이 둘러 앉아 하나  하나 배워가기 시작한다고 하죠. 물론 그때마다 훈장님은 일대일로 지도를 하고 또 바르게 잡아 주기도 한다고 합니다. 다만 나이 차이가 있는 녀석들은 또 그에 맞게 적절하게 지도해 준다고 하죠.

"아침을 먹고 나면 서당에서는 세필(작은 붓)로 하는 붓글씨 공부를 합니다. 대필(큰 붓)로 하는 붓글씨 공부는 점심 식사 후에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대개 붓글씨라고 하면 예술적 경지를 추구하는 서예를 떠올리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서당에서 요구하는 붓글씨 공부는 서예와는 조금 방향이 다릅니다."(본문 54쪽)

세필과 대필의 붓글씨 공부, 그래서 옛날 서당을 나온 선생님들은 붓글씨가 탁월한 것 같습니다. 글은 그 사람의 인격과 심성을 대변해준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인격과 심성을 서당의 훈장님으로부터 배우는 것도 당연하지 싶습니다.

특별히 이 책에 나오는 '초동서사' 서당은 겸산 안병탁 선생께서 1957년에 문을 연 곳이라고 하죠. 이 책을 펴낸 한재훈 선생은 그곳에 직접 들어가 겸산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겸산 선생은 항상 흰 옷을 고집했답니다. 600년 조선의 끝자락에 나라를 잃은 슬픔을 달래며, 선비의 학문정신조차 무너지게 내버려 둘 수 없다는 뜻으로 그 옷을 입었다고 하죠.

그렇듯 서당의 사유와 공간은 오늘날  '현실성'이나 '유용성' 그리고 '효율성'만 생각하는 학교 풍토와는 전혀 다른 것 같습니다. 이 책에 나온 이야기이기도 합니다만 서양식 교육에 입각한 사람들은 원숭이와 팬더를 짝짓지만, 서당식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원숭이와 바나나를 짝짓는다고 하죠. 그만큼 서당식 가르침에는 관계론적인 사고방식이 바탕을 이룬다고 합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서당식 교육을 통해 오늘날 입시위주의 교육, 성공위주의 줄세우기식 교육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깨달았으면 합니다. 아울러 그를 통해 연대감과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창의성도 얼마나 독보적인지도 새삼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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