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현대사 전문작가'가 되었나
지금 내가 걷는 길... 병아리에게 먹이를 쪼아주는 어미닭이 되고 싶다
현대사 전문작가
2008년 4월 5일, 호남의병전적지 가운데 전북 임실의 전해산 의병장 무덤과 전남 화순의 양회일 의병장 쌍산의소, 두 곳을 둘러보자 밤이 늦었다. 양 의병장 후손인 양동하(전 능주 전교) 선생은 떠나려는 나에게 저녁이라도 먹고 가라고 옷소매를 꼭 잡았다.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이 궁벽한 의병지를, 더욱이 영남 태생의 선생이 당신 고장보다 먼저 호남 의병지부터 찾아준 것도 고맙고…."
나는 그분의 손길을 도저히 뿌리치고 떠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고장 특미인 육회비빔밥을 들고나자 밤 9시가 넘었다. 그새 바깥이 매우 컴컴했다.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갔으나 이미 광주행 막차는 막 떠난 뒤였다. 그 고장에는 하룻밤 묵을 만한 숙소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택시를 잡고 광주로 향했다.
광주로 가는 도중에 손전화가 울려 받고 보니 열흘 전에 강원도 산골 내 집까지 찾아와 인터뷰를 하고 간 한 잡지사 기자였다.
"선생님 기사를 다 써 데스크로 넘기려고 하는데 그냥 '작가'라고만 하기에는 좀 부족한 듯하여 '현대사 전문작가'라고 달겠으니 양해해 주세요."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에요. 선생님은 남다른 글을 쓰셨잖아요."
부끄러운 고백
그 얼마 뒤 내 집으로 배달된 그 잡지를 보자 '현대사 전문작가'라는 호칭이 붙어있었다. 그 뒤로 다른 언론에서도 '현대사 연구가' 등의 호칭을 붙여주었다. 아마도 내가 펴낸 책을 유심히 본 편집자들이 그런 호칭을 붙인 모양이다.
내가 유독 근현대사에 관심을 가지고 그 역사 현장을 탐방하는 데는 우리 학생들의 근현대사에 대한 역사 지식이 거의 까막눈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현직에 있던 어느 해, 서울대학교 수시 대입고사가 끝난 다음 날 등교한 한 학생의 표정이 밝지 못했다. 그 사연을 들어보자 구술시험관이 '윤봉길 의사'에 대해 질문했는데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너 그것도 몰랐니?"라고 꾸중하려다가, 순간 그 잘못은 나를 비롯한 교사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는 얼굴이 뜨거웠다.
사실 나도 대학시절 날마다 등굣길에 '왕산로'를 지나다니면서도 그 유래를 모르고 지냈다. 그러다가 느지막이 하얼빈에 가서야 그 유래가 된 '왕산' 선생은 내 고향 출신으로 대한제국 시절 13도 창의군 군사장 허위 선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쥐구멍을 찾고 싶도록 부끄러웠다(이웃마을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은 익히 잘 알면서도).
그 부끄러움으로 나는 1999년부터 국내외에 숨겨진 근현대사의 현장에서 묻힌 역사의 진실을 찾고자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다. 국내 의병지는 물론 중국대륙 네 차례, 미주 세 차례, 일본 다섯 차례, 러시아 한 차례 등을 취재노트와 카메라를 메고 누볐다.
어느 해 여름은 나 혼자 북만주 광야를 헤매며 한 파르티잔의 희생지를 찾기도 했다. 또 어느 해 초겨울에는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행적을 뒤쫓고자 속초에서 배를 타고 극동 러시아 크라스키노, 블라디보스토크, 우스리스크, 포브라니치나야, 쑤이퍼허, 하얼빈, 채가구, 창춘, 다롄, 뤼순까지 홀로 답사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 행 열차를 탔을 때다. 러시아 여승무원이 "러시아어나 중국어를 아느냐"고 물었다. 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그가 다시 물었다.
"Can You speak English?"
"No."
나의 대답에 승무원은 입을 닫지 못하고 난처해 했다. 나는 그 열차를 타고 생수와 비스킷만 먹으며(러시아어를 몰라 사먹지 못해) 40시간 45분 만에 하얼빈에 도착했다. 그때까지 그와 나는 필담이나 손짓으로 소통했다. 그렇게 답사하여 펴낸 책이 <영웅 안중근>이었다.
어린 영혼을 위하여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 소재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세 차례 70여 일 방문하여 한국전쟁 사진 약 2000컷 가까이 수집해 왔다. 그런 뒤 펴낸 책이 <지울 수 없는 이미지 1~3>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이다.
이밖에 펴낸 책이 <개화기와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항일유적답사기> 등이다. 나의 근현대사 탐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이즈음은 <미군정기> 편을 쓰고 있는데, 욕심 같아서는 건강이 허용하는 한 2000년대까지 현대사도 펴낼 생각이다.
사실 나는 사학과 출신이 아닌, 30여 년 고교에서 국어를 가르친 국문학과 출신이다. 그래서 역사 전문가들이 펴낸 책을 참고하여 우리 청소년들이 근현대사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마치 어미닭이 지렁이와 같은 거친 먹이를 병아리들이 먹기 좋게 쪼아 주는 그런 역할을 하고 싶다.
나는 오늘도 여러 문헌과 사진을 뒤적이며 부지런히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 후일 어린 영혼들이 내가 쓴 책을 보고 지난 역사를 제대로 쉽게, 그리고 올곧게 얘기해 주었다고, 그들이 내 이름을 기억해 준다면 더 없는 영광이겠다.
2008년 4월 5일, 호남의병전적지 가운데 전북 임실의 전해산 의병장 무덤과 전남 화순의 양회일 의병장 쌍산의소, 두 곳을 둘러보자 밤이 늦었다. 양 의병장 후손인 양동하(전 능주 전교) 선생은 떠나려는 나에게 저녁이라도 먹고 가라고 옷소매를 꼭 잡았다.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이 궁벽한 의병지를, 더욱이 영남 태생의 선생이 당신 고장보다 먼저 호남 의병지부터 찾아준 것도 고맙고…."
▲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5층 사진자료실에서 한국전쟁 자료들을 스캔하고 있다. 그때 내 노트북이 없어 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 것을 빌려갔다(2004. 2). ⓒ 박도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갔으나 이미 광주행 막차는 막 떠난 뒤였다. 그 고장에는 하룻밤 묵을 만한 숙소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택시를 잡고 광주로 향했다.
광주로 가는 도중에 손전화가 울려 받고 보니 열흘 전에 강원도 산골 내 집까지 찾아와 인터뷰를 하고 간 한 잡지사 기자였다.
"선생님 기사를 다 써 데스크로 넘기려고 하는데 그냥 '작가'라고만 하기에는 좀 부족한 듯하여 '현대사 전문작가'라고 달겠으니 양해해 주세요."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에요. 선생님은 남다른 글을 쓰셨잖아요."
부끄러운 고백
그 얼마 뒤 내 집으로 배달된 그 잡지를 보자 '현대사 전문작가'라는 호칭이 붙어있었다. 그 뒤로 다른 언론에서도 '현대사 연구가' 등의 호칭을 붙여주었다. 아마도 내가 펴낸 책을 유심히 본 편집자들이 그런 호칭을 붙인 모양이다.
▲ 연해주 연추(현, 극동 러시아 크라스키노)에 있는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비 앞에서 기자(2009. 10.) ⓒ 박도
내가 현직에 있던 어느 해, 서울대학교 수시 대입고사가 끝난 다음 날 등교한 한 학생의 표정이 밝지 못했다. 그 사연을 들어보자 구술시험관이 '윤봉길 의사'에 대해 질문했는데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너 그것도 몰랐니?"라고 꾸중하려다가, 순간 그 잘못은 나를 비롯한 교사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는 얼굴이 뜨거웠다.
사실 나도 대학시절 날마다 등굣길에 '왕산로'를 지나다니면서도 그 유래를 모르고 지냈다. 그러다가 느지막이 하얼빈에 가서야 그 유래가 된 '왕산' 선생은 내 고향 출신으로 대한제국 시절 13도 창의군 군사장 허위 선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쥐구멍을 찾고 싶도록 부끄러웠다(이웃마을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은 익히 잘 알면서도).
그 부끄러움으로 나는 1999년부터 국내외에 숨겨진 근현대사의 현장에서 묻힌 역사의 진실을 찾고자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다. 국내 의병지는 물론 중국대륙 네 차례, 미주 세 차례, 일본 다섯 차례, 러시아 한 차례 등을 취재노트와 카메라를 메고 누볐다.
어느 해 여름은 나 혼자 북만주 광야를 헤매며 한 파르티잔의 희생지를 찾기도 했다. 또 어느 해 초겨울에는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행적을 뒤쫓고자 속초에서 배를 타고 극동 러시아 크라스키노, 블라디보스토크, 우스리스크, 포브라니치나야, 쑤이퍼허, 하얼빈, 채가구, 창춘, 다롄, 뤼순까지 홀로 답사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 행 열차를 탔을 때다. 러시아 여승무원이 "러시아어나 중국어를 아느냐"고 물었다. 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그가 다시 물었다.
"Can You speak English?"
"No."
나의 대답에 승무원은 입을 닫지 못하고 난처해 했다. 나는 그 열차를 타고 생수와 비스킷만 먹으며(러시아어를 몰라 사먹지 못해) 40시간 45분 만에 하얼빈에 도착했다. 그때까지 그와 나는 필담이나 손짓으로 소통했다. 그렇게 답사하여 펴낸 책이 <영웅 안중근>이었다.
어린 영혼을 위하여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 소재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세 차례 70여 일 방문하여 한국전쟁 사진 약 2000컷 가까이 수집해 왔다. 그런 뒤 펴낸 책이 <지울 수 없는 이미지 1~3>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이다.
이밖에 펴낸 책이 <개화기와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항일유적답사기> 등이다. 나의 근현대사 탐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이즈음은 <미군정기> 편을 쓰고 있는데, 욕심 같아서는 건강이 허용하는 한 2000년대까지 현대사도 펴낼 생각이다.
▲ 박도 엮음, 사진으로 보는 근대사 편 <개화기와 대한제국> ⓒ 눈빛출판사
▲ 박도 엮음, 사진으로 보는 근대사 편 <일제강점기> ⓒ 눈빛출판사
사실 나는 사학과 출신이 아닌, 30여 년 고교에서 국어를 가르친 국문학과 출신이다. 그래서 역사 전문가들이 펴낸 책을 참고하여 우리 청소년들이 근현대사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마치 어미닭이 지렁이와 같은 거친 먹이를 병아리들이 먹기 좋게 쪼아 주는 그런 역할을 하고 싶다.
나는 오늘도 여러 문헌과 사진을 뒤적이며 부지런히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 후일 어린 영혼들이 내가 쓴 책을 보고 지난 역사를 제대로 쉽게, 그리고 올곧게 얘기해 주었다고, 그들이 내 이름을 기억해 준다면 더 없는 영광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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