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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국경 넘기... 이럴 줄 몰랐다

[맞벌이 가족 리씨네 여행에세이 ⑦] 너무 싱거운 국경 넘기

등록|2014.04.09 11:44 수정|2014.04.09 11:44
#1. 국경을 넘었다. 너무 싱겁다

깔끔하고 세련되게 정비된 프랑스의 작은 마을은 우리만 보기 아까울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인구밀도가 낮은 동네인지 사람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이 살긴 살겠지?' 그럼에도 지중해풍으로 불리는 그 색감으로 나열, 정돈된 집들을 볼 때면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오렌지색을 머금은 밝은 황토빛의 집들은 밝고 맑은 하늘색, 담장을 둘러 싼 나무의 초록색과 편안하게 어우러진다. 한 편의 작품이다.

프랑스의 국도 옆 아기자기한 풍경을 뒤로 하고 오늘 스페인으로 간다. 섭섭하지 않은 이 마음. 아마도 여행의 종착 지점이 프랑스이기에 나중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와, 저기 시골장이다. 사람들이 많아!"

마트보다 전통시장에 가면 더 흥이 나는 우리다. 더군다나 유럽에 들어와서 처음 만나는 시골장이라 순간 관심이 확 쏠린다. 리옹을 떠난 후 사람들이 복작복작 모여 있는 것을 오랜만에 보니 더욱 그렇다. 이토록 사람이 반가운 걸 보니 그간 사람이 그리웠던가보다. 들렀다 가면 좋으련만. 어쨌든 시장이라 가서 눈으로 보면 또 사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 같아 구경을 않기로 했다. 물론 갈 길도 멀고. 필요한 장은 다 봤으니 더 살 것도 없고.

그래도 궁금하다. 저 곳이. 저 곳엔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 덩어리들이 있을 텐데. 모처럼 프랑스 시골 사람들의 표정과 정취를 느낄 수 있을 텐데. 내 엉덩이는 옴짝옴짝 하나 남편의 핸들은 무조건 직진이다. 아쉽지만 이내 눈길을 거뒀다.

'싱싱한 과일이라도 좀 사면 좋을 텐데.'

추억거리는 없고 아쉬움만 있다. 햇살이 좋고 바람이 시원하다. 아이 둘 낳고 수술한 시력, 1.0 정도의 쓸 만한 내 눈이 차창 밖의 한 장면을 순식간에 낚아챘다.

"어, 좌판에서 체리를 파네!"

찌릿찌릿 눈빛 교환을 주고 받은 후 남편은 100m쯤 앞에 차를 세웠다. 아이들 손을 잡고 다시 걸어 올라왔다. 1kg에 3유로이다. 아저씨가 직접 따 와서 파는 것 같은데 아침부터 부지런히 나오셨는지 점심도 안 되어 얼마 남지 않았다. 옆에 작은 종이상자를 보니 아마도 저것이 1kg 짜리 같다.

잠깐 쉴 겸, 시골 장을 지나친 아쉬움을 달랠 겸 조금 맛보고 싶었다. 그런데 저건 너무 많다. 우린 500g만 달라고 했다. 아저씨는 별다른 표정 없이 고개를 까딱하시더니 저울에 올려보지도 않으시고 플라스틱 용기에 체리를 가득 담으셨다. 정량은 아닌 것 같다. 얼른 떨이를 하고 싶으신 건지, 인심이 좋은 건지, 훨씬 많이 주셨다. 달리는 차 안에서 운전석 앞뒤로 건네 가며 먹기엔 불편할 것이 분명하여 우린 좋은 햇볕과 휴식을 핑계 삼아 국도 옆 잔디밭에 앉았다. 씻지 않았지만 맛은 좋다. 부디 무농약 자연산이었길.

무농약 체리겠지? 그래야만 해! 잠깐의 휴식이다. ⓒ 이성애


"뭐야, 저 앞에 건물 있잖아. 톨게이트인가봐. 돈 내는 건가 본데?"
"그런데 사람이 없네. 경찰이라고 써 있잖아. 검문하는 곳인가봐?"
"(황당하고 김빠지는 느낌으로) 야,  우리 지금 스페인으로 넘어온 것 같아."

순간 옆을 보니 철제 간판에 '에스파냐'라고 써진 것이 휙 지나간다. 철제 간판은 과거 몇 년간 관리를 하지 않은 듯 낡았다. 아까 톨게이트로 착각한 것은 국경검문소 성격의 건물인가 보다. 하마터면 스페인으로 넘어온 줄도 모르고 살짝 달라진 바깥 풍경을 보며 "여기 프랑스 아닌 거 같아. 꼭 스페인 같지 않아?"라고 할 뻔했다. 에스파냐라는 그 글자를 본 덕에 우린 스페인을 보다 적극적으로 보며 느끼기 시작했다.

이곳이 국가 간 경계이거나 어쩌거나 이 근처 사람들은 자유로이 왕래하고 물건을 사고팔겠지. 어쩌면 매일 경계를 넘나들며 사는 이 사람들이 느끼는 국경에 대한 의미는 내가 지금까지 축적하여 온 모든 판단들을 일순간 무의미하게 만들 것이다.

내가 아줌마가 되어 좋아하기 시작한 작가는 내가 청소년 시절, 속으로만 끙끙 앓으며 좋아하던 가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벌써 은퇴라니, 대단히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국경이 없는 곳에서 자란 아이들이니까, 잠적이 불가능한 나라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니까, 고작 이십대에 은퇴를 선언해야만 하는 것이다.'

몇 년 전 책에서 이 부분을 읽었을 때는 이 말이 독설로 여겨져 속이 상했다. 잠시 책을 덮었던 기억. '내가 좋아하는 각각의 사람들끼리도 서로 호의적이었으면 좋을 텐데'란 순진한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유럽캠핑을 계속하며 여러 번 국경을 넘다보니 점점 긴장, 환희, 두려움, 설렘이 희미해진다. 그때서야 내가 좋아했던 작가의 그 말은 독설이 아닌 안타까운 체념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우리 인식의 지평이었다. 수평선 안쪽. 그 수평선 안쪽에서 우리는 태어났다. 잠잘 때도 우리 꿈의 배경은 그 수평선 안쪽을 넘어가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우리가 비행기나 선박의 도움을 받지 않고 그 수평선 안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리적 고립이 꿈의 배경마저 협소하게 만들었다. '그래 내가 속으로만 끙끙 앓으며 좋아하던 작가는 우리 나라에 태어났기 때문에 20대에 시시하게 은퇴를 한 거야. 내가 좋아하는 작가는 그걸 안타깝게 생각한 거지. 내가 좋아하는 작가도 내가 좋아했던 가수를 싫어하진 않았을 거야. 다행이다.' 나와 친한 친구 둘이 다퉜다가 화해한 듯 기분에 속이 후련하다.

여행 초기에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어온 대가로 그 나라의 관료들 앞에 섰을 때의 긴장과 두려움이 떠올랐다. 그런데 국경을 넘는 게 뭐 이렇게 쉬운지. 나의 감흥을 포함하여 아무 것도 없다. 어이 없다. 쪼그라드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여권을 내밀고 방실방실 웃던 나에게 인사 한마디, 부드러운 표정 한 번 지어주지 않았던 관료들에게 엿을 한 방 먹이고 싶다. 이렇게 싱거운 걸 가지고 그렇게 유세냐! 

#2. 그녀가, 그가 달리 보였다

달리 미술관은 페르게스라는,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에 가까운 도시에 있다. 그곳 태생인 달리가 모든 작품을 그렸고 만들었으며 설치까지 했다. 철저히 사후 자신의 작품 세계가 온전한 형태로 잡음없이, 고스란히 후세에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살아생전 몇 곳에 도움을 받아 모든 것을 기획하고 설치했다고 한다. 이 정도의 기본 정보를 습득하고 미술관을 찾아 나선다.

사실 몇 년 전 짧게 스페인에 다녀갔었다. 그러나 달리를 보러 이곳에 오진 않았다. 나와 같은 일정에도 이곳을 다녀가는 관광객을 여럿 봤지만 나는 오지 않았다. 사실 '아이디어', '관점의 전환'이라는 것도 처음에는 신선한 깨달음, 충격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반복하여 접할수록 일정한 패턴을 읽으면서 다소 식상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나 또한 달리의 작품을 보고 처음엔 짜릿하고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도저히 읽히지 않는 작가의 의도를 읽으려 목을 빼고 한참을 바라봤었다. 그러나 폐 속 깊은 곳에서 끌어올라오는 감탄사 "아!"의 탄성 횟수가 줄어들며 급기야는 인체를 극단적으로 훼손하여 작품을 표현하는 부분 때문에 호기심이 사그라들게 되었다. 예술가적 소양이 없어서 그럴 것이나 여하튼 그것이 달리를 향한 나의 마지막 느낌이었다. 그 느낌 때문에 이곳에 3년이나 더디 온 것이다.

아직도 내비게이션의 작동법을 완전히 익히지 못한 탓에 우편번호를 넣으면 목적지 부근까지 밖에 갈 수 없다. 따라서 목적지에 다 올 즈음엔 눈을 부릅뜨고 '달리'가 들어가는 건물이나 표지판을 찾아야 했다.

"여보, 달리 미술관 어떻게 생겼대? 건물이 어떤 색이야?"
"책에서 보니까 건물에 알이 있어. 달걀 같은 알인데."
"뭐, 알? 뭐 그런 게 있냐?"
"야, 저기 봐. 저거 같아. 봤어? 저기 알이 있잖아."

정말 건물 외관에 알이 붙어 있었다. 미술관 근처 유료 주차구역에 차를 세웠다. 그런데 미술관에 가기 전 밥 때가 왔다. 밥 먹는 시간이 애매할 것 같아 오는 길에 샌드위치를 사고 삶은 달걀과 과일, 빵을 준비해서 왔다. 광장의 플라타너스 나무가 높고 그늘이 시원했다. 뻥 뚫린 광장 의자에 앉아 우린 도시락을 꺼내 요기를 했다. 균형 잡힌 식생활을 강조하는 우리는 입가심으로 떠먹는 요구르트도 먹었다. 삼삼오오 학생 무리가 지나간다. 체험학습을 왔나보다. 그 애들도 우리처럼 샌드위치를 먹었다. 이제 여기서 몇 백 미터만 걸어가면 달리 미술관이다. 

천천히 걸어 올라가니 두 개의 전시실이 있다. 어떤 표를 끊어야 하나 고민하며 잡아든 팸플릿을 보고서야 달리는 회화뿐 아니라 금속 세공 등의 조각 작품도 많이 남겼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전시실이 금세공품과 미술관 2개였다. 3~4층 규모에 미음자로 360도 돌아가며 구역별로 여러 개의 전시실이 있는데 달리의 모든 것이 다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허나 달리의 유명한 작품을 많이 보진 못했다. 5살, 7살 아이의 체력과 인내심, 집중력은 360도 중 150도 정도 보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360도 빙 돌아가며 관람하는 구조다.이만큼 하늘을 보여준다. ⓒ 이성애


초현실주의 화가로 불려지기 전 그가 그려왔던 아이디어 스케치, 데생 연습 작품을 보며 비로소 그가 이 세상에 나와 같이 발을 딛고 살았던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거부감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친근함이 느껴졌다. 소년에서 청년, 중년, 노년으로 점점 나이 들어가며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완성해가는 한 예술가의 생애를 엿봄으로써 나의 편견이 조금이나마 느슨해지는 것 같다.

미술관을 나서며 줄곧 '현실에 발 담그고 사는 작가가 현실을 초월하여 뭔가를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했을 때 그는 선천적, 후천적으로 얼마나 색다른 삶과 생각을 추구하고자 애썼을까? 과연 정상적인 삶을 살았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난 막연히 그 색다른 삶과 생각을 추구하는 것이 엄청난 고통이 수반되는, 인위적인 노력과 설정이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좋아했던 작가가 창작의 고통 때문에 그 젊은 나이에 은퇴를 결심했던 것처럼.

그러나 우리 눈에 보이는 그의 비정상적인 삶과 생각은 인위적인 노력이 아닌 자연스러운 그만의 색깔과 능력이란 것을 알았다. 달리는 상식선에서, 모두가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이 더욱 어려운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달리가 가진 초현실적인 뭔가를 생각하고 만들어 내는 능력이 없다. 하지만 달리 또한 나, 우리가 가진 현실적인, 평범한 뭔가를 생각하고 만들 능력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하하!

현은 작품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꿈이 화가라고 했지? ⓒ 이성애


이런 달리 곁에 50년을 함께 한 갈라라는 여자. 달리의 작품에 때로는 온전한 모습으로, 때로는 해체 재구성된 모습으로 웃고 있는 그녀. 어떻게 현실을 초월하여 살고자 한 그를 현실에 발을 디디며 살도록 했을까? 10년 연상의 갈라. 매력 넘치는 여자로 정평이 나있는 그녀가 문득 궁금해진다.

관광지라 그런지 아이들에게 먹일 아이스크림 가격도 만만하지 않다. 약속대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주려고 가게 앞에 나와 있는 입간판의 가격을 살펴보니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가격대는 20종류 중 2가지 정도다. '우리가 고른 저렴한 아이스크림이 없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를 잠시 고민한다. 다행히 우리가 원한 아이스크림이 아이들 손에 쥐어졌다. 아이들은 함박 웃음을 짓는다. 그러나 햇살이 따갑다. 행복한 표정도 잠시 현이는 강한 햇볕에 인상을 확 쓰고 아이스크림을 빤다.

옛다! 아이스크림이다. 미술관을 나와서 곧장 아이스크림을 들었다. ⓒ 이성애


돌아오니 도로의 주차라인에 맞춰 우리의 붕붕이가 듬직하게 서 있다. 사실 스페인에서 관광객의 차량 유리를 깨고 물건을 훔쳐가는 도난사고가 있다 하여 내심 걱정했었다. 그러나 아무일도 없었다. 다행이다. 코인을 넣고 정산하는 시스템은 처음이라 걱정도 되지만 그럼에도 돌아오는 발걸음이 떳떳하다.

"정산하고 갈 테니 먼저 차에 가있어."

사실 나는 온 가족이 함께 기계에 달라붙어 정산을 하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남편은 혼자 뚜벅뚜벅 간다. 기계 쪽으로 향하는 리씨네 가장의 뒤태가 어쩜 그리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운지. 캠핑을 시작한 지 며칠 안 돼 남편의 자신감은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다. 자신감을 가지고 작은 것이라도 시도하는 이 남자. 참 섹시하다.

이제 나도 좋아하고 많은 이가 좋아하는 섹시한 바로셀로나로 간다.
덧붙이는 글 2012년 맞벌이 엄마, 아빠, 5살, 7살 두 딸은 직장과 유치원을 쉬었습니다. 그리고 쉼(태국), 사랑(터키), 도전(유럽캠핑)을 주제로 5개월간 여행하였습니다. 본 여행에세이는 그 중 도전을 주제로 한 유럽캠핑에 관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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