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문화, 일본으로 전해진 게 맞네
[박물관과 미술관 기행 19] 국립 나주박물관
국립박물관이 어째 이런 시골에 자리 잡은 거지?
국립 나주박물관은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에 있다. 박물관이 이처럼 시골에 자리 잡은 것은 이 지역에 반남 고분군이 있기 때문이다. 반남 고분군은 자미산(98m)을 중심으로 신촌리, 대안리, 덕산리에 분포되어 있다. 현재까지 40여기의 고분이 알려져 있다. 이들 고분에 대한 발굴조사는 일제강점기 때인 1917-18년 처음 이루어졌다. 이때 신촌리 9호 무덤에서 금동관, 금동 신발, 환두 대도가 나왔다.
그 후 반남 고분군의 중요성이 알려졌고, 1999년 신촌리 9호분에 대한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때 원통형 토기 32점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들 발굴을 통해 반남 고분군의 가치가 인정되었고, 2011년 7월 사적 제513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2007년부터 영산강 유역에 분포되어 있는 고대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연구 보존 전시하자는 여론이 형성되어, 2010년 12월 국립 나주박물관 기공식이 이루어졌다.
국립 나주박물관은 2013년 11월 지상 2층, 지하 2층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완성되었고, 전남 지역에서 출토된 문화재를 보존 전시하고 있다. 1층에 상설전시실과 특별전시실이 있다. 상설전시실은 영산강 유역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제1전시실과 고고학 세계를 체험할 수 있는 제2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특별전시실은 그때그때 시의적절한 전시를 하는데 4월까지는 '남도의 고인돌' 사진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마한의 이야기가 많군
국립 나주박물관의 핵심은 제1전시실이다. 이곳은 다시 시대와 주제에 따라 네 개 공간으로 구분된다. 첫째 역사의 여명, 둘째 마한의 형성, 셋째 영산강 유역의 고분문화, 넷째 강의 길, 바다의 길이다. '역사의 여명' 코너에서는 영산강 주변에서 형성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유물을 확인할 수 있다. 주먹 도끼, 낚시 바늘, 민무늬 토기, 돌칼 등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마한의 형성' 코너에는 기원전 1세기에 형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마한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54개의 작은 나라 연맹체였던 마한은 3세기 후반까지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다. 큰 나라는 집이 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삼국사기>,<삼국유사>, <삼국지>「위서」'동이전' <후한서>, <여유당전서>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유당전서>는 <후한서>를 인용하면서 옛날 열수(洌水) 이남에 한국(韓國) 또는 진국(辰國)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들에서 삼한이 나왔고, 그 나라가 마한, 진한, 변진이다. 그 중 마한이 가장 컸고, 그 뿌리가 같아 진왕으로 하여금 목지국(目支國)을 도읍으로 삼고 삼한 땅을 다스리게 했다. 그렇다면 목지국이 마한 중 가장 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마한은 3세기 후반 경 한강 유역에서 성장한 백제에게 주도권을 뺐기면서, 일부 세력이 남쪽 영산강 유역에서 그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지역에서 발굴되는 유물을 통해 마한의 문화가 6세기 중엽까지 영산강유역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마한 사람들은 5월 씨 뿌릴 때와 10월 추수할 때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춤과 노래를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금은보화보다 옥과 구슬을 더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목걸이와 곡옥 등을 자세히 살펴본다. 이들 장신구는 나주 신촌리, 영암 화평리, 무안 맥포리, 보성 거석리 등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그 중 인상적인 것이 영광 화평리에서 출토된 푸른 계열의 목걸이와 보성 거석리에서 출토된 붉은 갈색 계열의 목걸이다. 화평리 목걸이는 지름 0.2㎜의 푸른색 구슬에 흰색과 붉은색 구슬을 꿰어 넣은 것이 있고, 푸른색 구슬에 하늘색 원통 구슬을 끼워 넣은 것이 있다.
보성 거석리 목걸이는 목 쪽에 갈색 가는 구슬을, 가슴 쪽에 붉은 빛이 도는 굵은 구슬을 끼워 넣었다. 거석리 목걸이는 현대의 호박 목걸이를 연상케 한다. 그런데 목걸이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구슬을 만드는 거푸집이다. 구슬을 연결할 구멍을 만들기 위해 안쪽에 구멍을 뚫고 그곳에 심지를 박았다. 이 거푸집에 유리 용액을 부어 구슬을 만든 다음 심지를 빼내면 구멍이 생기는 방식이다. 이 거푸집은 광주 선암동과 담양 태목리에서 발굴되었다고 한다.
이들 외에 마한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보여주는 유물로는 청동기, 토기, 농기구, 악기, 무기 등이 있다. 청동기로는 청동 거울과 말 모양 허리띠 고리가 있다. 그 중 말 모양 허리띠 고리는 마한을 대표하는 유물로 여겨지고 있다. 토기에는 단지, 항아리, 시루, 그릇 등이 있다. 토기 중에 신앙과 관련된 것이 있는데, 새 모양 토기가 인상적이다. 새는 인간세계와 천상 세계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영산강 유역의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
영산강 유역에는 3세기에서 6세기까지 마한의 유산이 남아 있었다. 이곳에는 마한 사람들이 남긴 수백 기의 무덤이 남아 있다. 이 무덤의 문화유산 중 독널무덤 즉 옹관묘(甕棺墓)가 가장 의미 있다. 거대한 항아리 2개를 붙여 만든 관을 독널이라 하며, 이들 독널 안에 시신과 여러 가지 부장품을 넣었다. 대표적인 것이 나주 신촌리 9호분으로, 독널 안에서 금동관, 금동신발, 봉황장식이 달린 큰 칼, 창, 화살 등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마한 문화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신촌리 9호분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가 발표된 것은 1980년 아리미츠 교이치(有光敎一)에 의해서였다. 1917-18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 조사위원이던 야스이 세이치(谷井濟一) 일행은 신촌리 9호분에서 11기의 독널을 확인했고, 조사단원이던 오가와 게이기치(小川敬吉)가 조사일지를 썼다. 그런데 이 기록이 60년 후 아리마츠에 의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금동관이 나온 대형 독널 사진에 따르면, 시신의 머리 쪽에 금동관이 놓여 있었다. 목과 팔에는 구슬 목걸이와 팔찌 등 장신구가 있었다. 왼쪽 팔 곁에는 봉황무늬 환두대도가 있었다. 발쪽에는 금동 신발과 구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 유물 중 대표 유물이 금동관이다. 이 금동관은 모자인 모관(帽冠)과 띠인 대관(帶冠)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대관은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 3개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들 장식이 복잡한 풀꽃 모양을 하고 있어, 산(山)자 모양의 신라 금관과 구별된다. 금관의 장식이 보여주는 문양과 장식 등으로 보아 신라 금관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모관은 반원형의 동판 2장을 맞붙여 만들었다. 동판에 당초문, 잎과 꽃을 양각으로 처리해 단순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금동관의 높이는 25.5㎝이다. 1997년 국보 제295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국립 나주박물관의 아이콘이 되었다.
이 금동관의 모관은 익산 입점리(사적 제347호)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함께 백제와 마한 계열 문화가 일본에 전해졌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왜냐하면 일본의 후나야마(船山) 고분에서도 이러한 금동관과 금동 신발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에서는 좀 더 단순한 형태의 환두 대도가 발견되었고, 거의 유사한 형태의 토기와 옹관도 발굴되었다.
금동관 중 모관은 고흥 길두리 고분에서도 발굴되었고, 금동 신발과 환두 대도는 나주 복암리 고분에서도 발굴되었다. 이들은 신촌리 유물에 비해 격이 조금 떨어지지만, 이들의 착용자 역시 그 지역을 다스리는 지배계급이었을 것이다. 나주 복암리 금동 신발 아래에는 쌍어문(雙魚文)이 붙어 있다. 이 쌍어문을 통해 가야와의 교류도 한번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환두 대도의 경우 신촌리 것에 봉황문이 있다면, 복암리 것에는 세 잎(三葉) 무늬가 있다.
이들을 유물을 부장하고 있던 독널은 시기에 따라 다르게 제작되었다. 독널은 3세기 경 등장해 4-5세기에 가장 발전 성행하며, 6세기 경 쇠퇴한 것으로 여겨진다. 독널은 두 개를 만들어 이들을 끼워 맞추는 형식이다. 주둥이가 작은 독을 큰 독에 끼워 넣는 방식이다. 나주 신촌리 독널은 5세기 성행기 독널로 본다. 발전기에 비해 어깨 부분의 굴곡이 약해졌고, 아가리가 직선화되어 U자 모형에 가까워졌다. 독널은 더욱 높아지고 커졌다.
그 외 의미 있는 유물로는 해남 성산리 만의총에서 출토된 동물 모양 토기와 장신구 목걸이가 있다. 토기는 기린 머리 모양을 한 상서로운 동물을 형상화하고 있다. 장신구로는 금동 귀걸이, 옥 곡옥, 관 꾸미개 등이 있다. 이들은 색깔이 화려하진 않지만 상당한 예술성을 보여준다. 목걸이 역시 다양한 모습이다. 그러나 목걸이가 점차 단순하게 변해 감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마한의 쇠퇴와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청해진과 진도의 것도 있다
이곳 국립 나주박물관에는 청해진과 진도에서 출토된 유물도 있다. 이들은 '강의 길 바다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되고 있다. 이들 유물은 물길 따라 발달한 남도의 역사를 아는데 아주 중요하다. 통일신라시대 청해진(淸海鎭)은 중국과 일본을 왕래하는 배가 드나드는 길목인 완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장보고는 828년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해 제해권을 장악하고 동아시아 삼국의 무역을 주도했다.
이곳 청해진에서 나온 대표적인 유물이 청동병과 청동추, 허리띠 꾸미개다. 그리고 고려시대 나주는 영산강 뱃길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뱃길을 따라 성, 관아, 해신당, 창고와 같은 유적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그리고 바다에 가라앉은 배에서 발견된 유물도 상당히 많다. 이곳 나주박물관에는 또한 고려시대 대몽항쟁의 상징인 삼별초가 마지막까지 싸웠던 용장산성 유물도 전시되어 있다. 용장산성은 고려 몽골 연합군의 공격으로 1271년 함락되었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로는 막새기와, 동전, 청동 거울, 청자 항아리, 청자 향로, 등잔 받침 등이 있다. 연화문 수막새는 연꽃의 가운데 부분인 자방(子房)의 양각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자방을 한 줄의 연자(蓮子)로 동그랗게 두르고 8개의 단엽(單葉)을 적당한 양각으로 표현했다. 단순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청자 항아리, 청자 향로는 전성기의 청자는 아니다. 그리고 사자형 등잔받침은 청동으로 만들었다. 사자가 네 발을 곧추 세워 등잔받침을 받치는 형태다.
앞으로의 연구과제
우리는 이들 유물을 관람하고 반남 고분군으로 간다. 우리는 먼저 박물관 뒤편에 있는 신촌 2호분을 멀리서 살펴본다. 그리고 길을 건너 덕산리 고분군으로 이동한다. 그곳에는 덕산리 1호분에서 6호분까지 있다. 그 중 우리는 덕산리 2호분에서 5호분까지를 자세히 살펴본다. 그 중 내 눈에 띄는 것은 덕산 2호분이다. 네모난 형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며 나는 큐슈의 후나야마에 있는 전방후원분을 떠올렸다.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전라도 지방의 고분과 유사성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고분의 형태나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에서 비슷한 점이 너무나 많다. 전라도와 큐슈, 바다를 통한 문명과 문화교류가 있었을 것이고, 그 결과를 우리는 이곳 전라도의 고분과 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고학자와 문명교류 학자들이 앞으로 이들의 영향과 교류를 논리적으로 밝혀주길 기대한다.
▲ 반남 고분군 ⓒ 이상기
국립 나주박물관은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에 있다. 박물관이 이처럼 시골에 자리 잡은 것은 이 지역에 반남 고분군이 있기 때문이다. 반남 고분군은 자미산(98m)을 중심으로 신촌리, 대안리, 덕산리에 분포되어 있다. 현재까지 40여기의 고분이 알려져 있다. 이들 고분에 대한 발굴조사는 일제강점기 때인 1917-18년 처음 이루어졌다. 이때 신촌리 9호 무덤에서 금동관, 금동 신발, 환두 대도가 나왔다.
그 후 반남 고분군의 중요성이 알려졌고, 1999년 신촌리 9호분에 대한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때 원통형 토기 32점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들 발굴을 통해 반남 고분군의 가치가 인정되었고, 2011년 7월 사적 제513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2007년부터 영산강 유역에 분포되어 있는 고대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연구 보존 전시하자는 여론이 형성되어, 2010년 12월 국립 나주박물관 기공식이 이루어졌다.
▲ 상성전시실의 독널 ⓒ 이상기
국립 나주박물관은 2013년 11월 지상 2층, 지하 2층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완성되었고, 전남 지역에서 출토된 문화재를 보존 전시하고 있다. 1층에 상설전시실과 특별전시실이 있다. 상설전시실은 영산강 유역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제1전시실과 고고학 세계를 체험할 수 있는 제2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특별전시실은 그때그때 시의적절한 전시를 하는데 4월까지는 '남도의 고인돌' 사진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마한의 이야기가 많군
▲ 초기 철기시대 청동거울 ⓒ 이상기
국립 나주박물관의 핵심은 제1전시실이다. 이곳은 다시 시대와 주제에 따라 네 개 공간으로 구분된다. 첫째 역사의 여명, 둘째 마한의 형성, 셋째 영산강 유역의 고분문화, 넷째 강의 길, 바다의 길이다. '역사의 여명' 코너에서는 영산강 주변에서 형성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유물을 확인할 수 있다. 주먹 도끼, 낚시 바늘, 민무늬 토기, 돌칼 등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마한의 형성' 코너에는 기원전 1세기에 형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마한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54개의 작은 나라 연맹체였던 마한은 3세기 후반까지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다. 큰 나라는 집이 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삼국사기>,<삼국유사>, <삼국지>「위서」'동이전' <후한서>, <여유당전서>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마한시대 곡옥 ⓒ 이상기
<여유당전서>는 <후한서>를 인용하면서 옛날 열수(洌水) 이남에 한국(韓國) 또는 진국(辰國)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들에서 삼한이 나왔고, 그 나라가 마한, 진한, 변진이다. 그 중 마한이 가장 컸고, 그 뿌리가 같아 진왕으로 하여금 목지국(目支國)을 도읍으로 삼고 삼한 땅을 다스리게 했다. 그렇다면 목지국이 마한 중 가장 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마한은 3세기 후반 경 한강 유역에서 성장한 백제에게 주도권을 뺐기면서, 일부 세력이 남쪽 영산강 유역에서 그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지역에서 발굴되는 유물을 통해 마한의 문화가 6세기 중엽까지 영산강유역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마한 사람들은 5월 씨 뿌릴 때와 10월 추수할 때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춤과 노래를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금은보화보다 옥과 구슬을 더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 보성 거석리 목걸이 ⓒ 이상기
그래서 나는 목걸이와 곡옥 등을 자세히 살펴본다. 이들 장신구는 나주 신촌리, 영암 화평리, 무안 맥포리, 보성 거석리 등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그 중 인상적인 것이 영광 화평리에서 출토된 푸른 계열의 목걸이와 보성 거석리에서 출토된 붉은 갈색 계열의 목걸이다. 화평리 목걸이는 지름 0.2㎜의 푸른색 구슬에 흰색과 붉은색 구슬을 꿰어 넣은 것이 있고, 푸른색 구슬에 하늘색 원통 구슬을 끼워 넣은 것이 있다.
보성 거석리 목걸이는 목 쪽에 갈색 가는 구슬을, 가슴 쪽에 붉은 빛이 도는 굵은 구슬을 끼워 넣었다. 거석리 목걸이는 현대의 호박 목걸이를 연상케 한다. 그런데 목걸이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구슬을 만드는 거푸집이다. 구슬을 연결할 구멍을 만들기 위해 안쪽에 구멍을 뚫고 그곳에 심지를 박았다. 이 거푸집에 유리 용액을 부어 구슬을 만든 다음 심지를 빼내면 구멍이 생기는 방식이다. 이 거푸집은 광주 선암동과 담양 태목리에서 발굴되었다고 한다.
▲ 새 모양 토기 ⓒ 이상기
이들 외에 마한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보여주는 유물로는 청동기, 토기, 농기구, 악기, 무기 등이 있다. 청동기로는 청동 거울과 말 모양 허리띠 고리가 있다. 그 중 말 모양 허리띠 고리는 마한을 대표하는 유물로 여겨지고 있다. 토기에는 단지, 항아리, 시루, 그릇 등이 있다. 토기 중에 신앙과 관련된 것이 있는데, 새 모양 토기가 인상적이다. 새는 인간세계와 천상 세계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영산강 유역의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
영산강 유역에는 3세기에서 6세기까지 마한의 유산이 남아 있었다. 이곳에는 마한 사람들이 남긴 수백 기의 무덤이 남아 있다. 이 무덤의 문화유산 중 독널무덤 즉 옹관묘(甕棺墓)가 가장 의미 있다. 거대한 항아리 2개를 붙여 만든 관을 독널이라 하며, 이들 독널 안에 시신과 여러 가지 부장품을 넣었다. 대표적인 것이 나주 신촌리 9호분으로, 독널 안에서 금동관, 금동신발, 봉황장식이 달린 큰 칼, 창, 화살 등이 발견되었다.
▲ 신촌리 9호분 출토 금동관 ⓒ 이상기
이들은 마한 문화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신촌리 9호분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가 발표된 것은 1980년 아리미츠 교이치(有光敎一)에 의해서였다. 1917-18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 조사위원이던 야스이 세이치(谷井濟一) 일행은 신촌리 9호분에서 11기의 독널을 확인했고, 조사단원이던 오가와 게이기치(小川敬吉)가 조사일지를 썼다. 그런데 이 기록이 60년 후 아리마츠에 의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금동관이 나온 대형 독널 사진에 따르면, 시신의 머리 쪽에 금동관이 놓여 있었다. 목과 팔에는 구슬 목걸이와 팔찌 등 장신구가 있었다. 왼쪽 팔 곁에는 봉황무늬 환두대도가 있었다. 발쪽에는 금동 신발과 구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 유물 중 대표 유물이 금동관이다. 이 금동관은 모자인 모관(帽冠)과 띠인 대관(帶冠)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 분명히 구별되는 대관과 모관 ⓒ 이상기
대관은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 3개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들 장식이 복잡한 풀꽃 모양을 하고 있어, 산(山)자 모양의 신라 금관과 구별된다. 금관의 장식이 보여주는 문양과 장식 등으로 보아 신라 금관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모관은 반원형의 동판 2장을 맞붙여 만들었다. 동판에 당초문, 잎과 꽃을 양각으로 처리해 단순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금동관의 높이는 25.5㎝이다. 1997년 국보 제295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국립 나주박물관의 아이콘이 되었다.
이 금동관의 모관은 익산 입점리(사적 제347호)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함께 백제와 마한 계열 문화가 일본에 전해졌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왜냐하면 일본의 후나야마(船山) 고분에서도 이러한 금동관과 금동 신발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에서는 좀 더 단순한 형태의 환두 대도가 발견되었고, 거의 유사한 형태의 토기와 옹관도 발굴되었다.
▲ 고흥 길두리 금동관 ⓒ 이상기
금동관 중 모관은 고흥 길두리 고분에서도 발굴되었고, 금동 신발과 환두 대도는 나주 복암리 고분에서도 발굴되었다. 이들은 신촌리 유물에 비해 격이 조금 떨어지지만, 이들의 착용자 역시 그 지역을 다스리는 지배계급이었을 것이다. 나주 복암리 금동 신발 아래에는 쌍어문(雙魚文)이 붙어 있다. 이 쌍어문을 통해 가야와의 교류도 한번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환두 대도의 경우 신촌리 것에 봉황문이 있다면, 복암리 것에는 세 잎(三葉) 무늬가 있다.
이들을 유물을 부장하고 있던 독널은 시기에 따라 다르게 제작되었다. 독널은 3세기 경 등장해 4-5세기에 가장 발전 성행하며, 6세기 경 쇠퇴한 것으로 여겨진다. 독널은 두 개를 만들어 이들을 끼워 맞추는 형식이다. 주둥이가 작은 독을 큰 독에 끼워 넣는 방식이다. 나주 신촌리 독널은 5세기 성행기 독널로 본다. 발전기에 비해 어깨 부분의 굴곡이 약해졌고, 아가리가 직선화되어 U자 모형에 가까워졌다. 독널은 더욱 높아지고 커졌다.
▲ 동물 모양 토기 ⓒ 이상기
그 외 의미 있는 유물로는 해남 성산리 만의총에서 출토된 동물 모양 토기와 장신구 목걸이가 있다. 토기는 기린 머리 모양을 한 상서로운 동물을 형상화하고 있다. 장신구로는 금동 귀걸이, 옥 곡옥, 관 꾸미개 등이 있다. 이들은 색깔이 화려하진 않지만 상당한 예술성을 보여준다. 목걸이 역시 다양한 모습이다. 그러나 목걸이가 점차 단순하게 변해 감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마한의 쇠퇴와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청해진과 진도의 것도 있다
▲ 청해진 유물 청동병 ⓒ 이상기
이곳 국립 나주박물관에는 청해진과 진도에서 출토된 유물도 있다. 이들은 '강의 길 바다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되고 있다. 이들 유물은 물길 따라 발달한 남도의 역사를 아는데 아주 중요하다. 통일신라시대 청해진(淸海鎭)은 중국과 일본을 왕래하는 배가 드나드는 길목인 완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장보고는 828년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해 제해권을 장악하고 동아시아 삼국의 무역을 주도했다.
이곳 청해진에서 나온 대표적인 유물이 청동병과 청동추, 허리띠 꾸미개다. 그리고 고려시대 나주는 영산강 뱃길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뱃길을 따라 성, 관아, 해신당, 창고와 같은 유적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그리고 바다에 가라앉은 배에서 발견된 유물도 상당히 많다. 이곳 나주박물관에는 또한 고려시대 대몽항쟁의 상징인 삼별초가 마지막까지 싸웠던 용장산성 유물도 전시되어 있다. 용장산성은 고려 몽골 연합군의 공격으로 1271년 함락되었다.
▲ 연꽃문 수막새 ⓒ 이상기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로는 막새기와, 동전, 청동 거울, 청자 항아리, 청자 향로, 등잔 받침 등이 있다. 연화문 수막새는 연꽃의 가운데 부분인 자방(子房)의 양각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자방을 한 줄의 연자(蓮子)로 동그랗게 두르고 8개의 단엽(單葉)을 적당한 양각으로 표현했다. 단순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청자 항아리, 청자 향로는 전성기의 청자는 아니다. 그리고 사자형 등잔받침은 청동으로 만들었다. 사자가 네 발을 곧추 세워 등잔받침을 받치는 형태다.
앞으로의 연구과제
▲ 덕산 2호분 ⓒ 이상기
▲ 후나야마 고분 ⓒ 이상기
우리는 이들 유물을 관람하고 반남 고분군으로 간다. 우리는 먼저 박물관 뒤편에 있는 신촌 2호분을 멀리서 살펴본다. 그리고 길을 건너 덕산리 고분군으로 이동한다. 그곳에는 덕산리 1호분에서 6호분까지 있다. 그 중 우리는 덕산리 2호분에서 5호분까지를 자세히 살펴본다. 그 중 내 눈에 띄는 것은 덕산 2호분이다. 네모난 형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 신촌리 금동 신발 ⓒ 이상기
▲ 후나야마 고분 금동 신발 ⓒ 이상기
이것을 보며 나는 큐슈의 후나야마에 있는 전방후원분을 떠올렸다.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전라도 지방의 고분과 유사성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고분의 형태나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에서 비슷한 점이 너무나 많다. 전라도와 큐슈, 바다를 통한 문명과 문화교류가 있었을 것이고, 그 결과를 우리는 이곳 전라도의 고분과 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고학자와 문명교류 학자들이 앞으로 이들의 영향과 교류를 논리적으로 밝혀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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