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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좌파'인 나, 이 책 읽고 반성했습니다

[서평] 쌍용차 다룬 <내 안의 보루>...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궁핍함

등록|2014.04.11 21:15 수정|2014.04.12 13:50

▲ <내 안의 보루> 표지. ⓒ 컬처앤스토리

필자는 평소 노동3권의 중요성과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취약함을 강조해왔다. 하지만 20여 년 전의 노동야학 경험과 그 후의 이런저런 간접 경험 외에는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게 없다.

그러했기에 이 책의 저자에게 서평을 부탁받고 난감했다. '강남좌파'라는 야유를 받고 있는 내가 노동운동의 깊숙한 이야기를 다룬 책을 평하는 게 맞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책의 첫 장을 여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첫 장을 열자마자 빨려 들어갔다. 이 책은 한국 노동운동(가)의 문제의식, 힘, 한계, 고통, 희망을 어떠한 분식(粉飾)과 치장 없이 생생히 드러내준다. 

한국에는 '짧은 시간에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루었다' '국민소득 3만 불 달성은 시간문제다' 등의 자화자찬이 떠돈다. 5년 간격으로 대통령과 4년 간격으로 국회의원을 자유로이 뽑을 수 있다. 국가보안법이 있지만 처벌의 회수와 강도는 약해졌으며, 웬만한 좌파 표현은 허용된다.

거리에서 최고급 명품을 쉽게 접할 수 있고 화려한 건축물은 위세를 뽐내며 번쩍 거린다. '마이 카' 시대는 안착되었고, 중산층 시민은 1년에 해외 여행 한두 번씩 다녀올 여력을 갖고 있다. 1950년대 말 고 김일성 주석이 북한 인민에게 약속했던 "이밥에 고깃국"은 남한에서 실현된 것이다!

노동없는 민주주의 비극

그러나 이 모든 것 뒤에는 엄청난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가 있다. 노동 무시와 경시를 넘어 노동 탄압과 억압이 있다. 1987년 6월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주화운동은 1987년 헌법을 탄생시켰고, 이후 우리는 '1987년 헌법체제' 아래 살고 있다. 그러나 이 체제는 1987년 7~9월 전국적으로 발생한 노동자대투쟁을 반영하지 못하였다. 1987년 헌법체제는 출발부터 '노동 없는 민주주의'였다.

책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여성 노동운동가 '경희'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미닫이문을 열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외로이 죽은 시기도 이 즈음이었을 것이다.

한국 사회는 1997년 IMF 위기를 맞이하면서 더욱 더 '노동 없는 민주주의'로 나아갔다. 정치권력은 5년마다 바뀌지만, 경제 권력의 '새로운 독재'는 변함이 없다. 대의민주주의의 틀을 빌려 귀족의 과두정이, 시장경제의 이름을 내걸고 족벌지배 자본주의가 자리 잡았다. 정리해고의 칼바람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양산 속에 노동은 '비용', 노동자는 '일회용 소모품'으로 전락했다. 노벨평화상을 탄 대통령, 노동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이 이끌던 두 번의 '민주정부'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 했다.

노조 조직률은 10% 정도에 불과하다. 노동자계급을 대변하는 힘있는 대중적 진보정당은 아직 만들어지지 못했다. 노동자계급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갈라져 서로를 불신하고 있다. 대기업 노조는 상대적으로 양호한 상태인 소속 조합원의 임금과 복지를 증진시키는데 주된 관심을 보인다. 노동운동 내부의 부패도 심심찮게 발생한다.

지난 대선 이후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가 시대적 화두가 되었지만, 그 정신이 이루어진 대표적 나라인 독일이나 스웨덴에서 시행되는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말하는 이는 거의 없다. 반면 파업에 대한 폭력적 진압은 사라지지 않았고, 이에 더하여 노동자 개인에게 "인간적으로 다가가서 각개격파"하여 "한 놈 한 놈 굴비 꿰듯이 우리 편으로" 만드는 노무관리가 작동하고 있다(84면).

소설 <내 안의 보루>는 바로 이러한 현실과 온 몸으로 맞서 싸운 사람들의 장중한 이야기다. 두 주인공 중 김혁은 7년에 이르는 여섯 번의 감옥 생활에서도 "생선 젓갈이 들어간 김치"(47면)를 요구하고,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을 좋아하며, 투쟁의 와중에도 라벤더를 키우고 그 향기를 느끼며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다(190면).

다른 주인공 한상균은 밥맛이 없어도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밥을 꼭 다 비우고(117~118면), 긴박한 파업투쟁의 현장에서도 "느긋한 표정"을 잃지 않고 여유 있는 웃음을 짓는 사람이다(229~230면).

▲ 한상균 전국금속노동조합 쌍용차지부 지도위원과 <나앤의 보루>를 쓴 고진 작가가 7일 오후 민주노총 경남본부를 찾아 책에 서명을 하고 있다. ⓒ 윤성효


이들은 많은 운동권 출신 사람들이 현실 사회주의 붕괴와 IMF 위기를 겪으면서 신자유주의라는 정글 자본주의에 굴복하거나 그 '괴물'을 추종하는데 급급했던 시절, 그 괴물과 정면대결을 벌였다. 그 싸움 속에서 공안당국에게 '좌경체제전복' 또는 '극렬과격' 등의 낙인이 찍히고, 각종 법률 위반으로 여러 번 투옥된다.

이 소설 속에는 21세기 한국노동운동사의 중요한 투쟁이 녹아들어 있다. 주인공들은 기업의 경영 과오가 노동자들에게만 전가되는 현실에 맞서 싸운다. 배부른 대기업 '노동귀족'의 기득권 지키기라는 우파적 비난도 견딘다. "위대하신 김일성 장군님" 운운하며 '신앙고백'을 하는 활동가와도 마주친다.

희망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술, 여자, 돈으로 치밀하고 끈끈하게 휘감아 들어오는 사측의 유혹을 뿌리친다. 투쟁을 앞둔 노동자 내부의 불안과 동요를 다독인다. 파업현장에서 소외감으로 힘들어하는 비정규직 동료를 끌어안는다. 그 와중에 주인공은 노동의 국제적 연대도 실천한다. 불법체류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노동3권이 심각하게 제한받는 건 물론 인간으로서의 최소 존엄마저도 무시당하다가 추방되는 "한국에서 가장 천한 사람들"(172면)인 이주노동자들과 월세 방에서 같이 살면서 연대하고 지원한다.

저자는 이 속에서 드러나는 주인공들의 불굴의 의지, 무한한 헌신의 순간순간을 꼼꼼하고 생동감 있게 묘사한다.

이 책을 덮은 후 질문을 던져본다. 민주화운동 경력을 자랑하는 야당 지도자,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는 유명정치인, 진보적 이론과 정책을 구성하는 지식인 등은 이러한 노동의 분투가 벌어질 때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최근 <시사인> 독자인 주부 배춘환씨가 '불법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손해배상과 가압류를 당한 노동자를 지원하는데 써달라며 아이 학원비 4만7000원을 <시사인>에 보낼 때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 무엇보다도 내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리고 생각해본다. 모진 시간을 버텨낸 주인공 두 사람의 힘은 어디서 왔을까? 쉽지 않은 노동운동의 현실을 그들은 어떻게 헤쳐 나갈까? 그들에게 운동의 시작은 '분노'였지만(220면), 패배와 절망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 새로 시작하는 힘은 "연대의 소중함"이었다(296면). 그들은 계속 전진할 것이다. 새로운 패배를 맞이하더라도 무릎 꿇지는 않을 것 같다.

이제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에 분노하는 사람은 이 주인공들을 향하여 연대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며 주인공들을 만나는 것이 연대의 출발일 수 있다. <내 안의 보루> 출판 인세 전액은 '4만7000원의 기적-노란봉투 캠페인'에 기부된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주인공들이 한 말을 해야 한다.

"희망은 너 자체다. 그러니 너를 놓치마."(김혁, 160면)
"견뎌!"(한상균, 289면)

김혁과 한상균이 서로에게 '보루'였던 것처럼,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보루'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노동운동에 헌신하기 위해 '정희'에게 이별을 통보한 김혁에게 '철수'가 던진 말을 다시 김혁에게 보내고 싶다.

"지금 네 옆에 있는 여자가 진짜다."(100면)

혁명가에게도 사랑이라는 보루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내 안의 보루> 출판기념 북콘서트 - 전남 순천 편

또 하나의 쌍용차 이야기
- 서로에게 보루가 된 두 남자, 한상균·김혁의 이야기

사회 : 이창근
이야기 손님 : 고진 / 김혁 / 한상균 / 김진숙 / 신선식
축하노래와 詩 : 박준 / 송경동
일시 : 2014년 4월 25일(금) 오후 7시
장소 : 순천시 연향동 도서관

- 인세 전액은 손해배상과 가압류로 고통을 당하는 노동자들과 그 가족을 위한 <노란봉투>에 보내집니다.

문의 : 박선택(010-3620-2906) / 박정훈(010-2040-3463)

덧붙이는 글 글을 쓴 조국은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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