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 대종사 열반 49주기 '불교정화운동' 재조명
[서평] 불교인권위원장인 진관 스님 '동산의 불교계 정화운동 연구'
▲ 표지표지이다. ⓒ 운주사
조계종 화쟁위원이자 한국불교종단협의회 불교인권위원장인 진관 스님이 펴낸 <동산의 불교계 정화운동 연구>(운주사, 2014년 4월)는 대한불교조계종사 법맥을 전승한 동산 대종사(東山, 1890~1965)에 대한 삶과 철학이 깃든 책이다. 중앙승가대학 박사 논문을 단행본으로 발간해 동산 대종사의 업적을 조명하고 그 가르침을 연구한 책이기도 하다.
일제에 의해 단절됐던 한국불교의 역사적 정통성을 회복한 불교정화운동은 현대 불교사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적 사건이자 정치·사회적 사건이기에 동산 스님의 재조명은 필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산 대종사를 스승으로 모신 무진장 대종사의 후학인 저자 진관 스님이 책을 출판한 것은 오는 음력 3월 23일(양력 4월 22일) 동산 대종사의 열반 49주기를 맞아 대한불교조계종의 정통성을 지켰던 동산의 공덕과 은덕을 기리기 위해서다.
이 책은 불교정화운동의 역사를 고찰하면서 대한불교조계종이 한국불교의 역사성과 정통성을 회복하고 계승한 유일한 종단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또한 불교정화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이에 참여한 선승들이 감수했던 희생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특히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전승한 대한불교조계종이 최대 종단이라는 사실에 자부하고 안주 할 뿐 위상에 걸 맞는 노력을 게을리 하고 있지 않은지를 반성할 필요에 대해서도 밝히고 있다.
불교정화운동의 발단은 36년간 일본식민지에서 일본불교계의 제도에 순응한 역사에서 비롯된다. 당시 조선불교계가 대처승이라는 일본불교 승단의 제도를 수용하면서, 1945년 8월 15일 해방이후에도 한국불교는 심각한 정체성을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1954년 5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이 '대처승은 사찰을 떠나라'라는 정화유시 발표이후 대처승과 선학원의 선불교를 중심에 둔 순수 비구승(선승) 사이의 갈등이 불거지면서 불교계 정화라는 종교적·정치적 사건으로 전개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무려 8차례나 유서를 발표하게 됨으로써, 불교 종단 내적인 문제로 시작된 정화운동이 이승만 대통령의 개입으로 정치화된다는 점이다.
이 대통령의 정화유시는 불교정화운동을 촉발했다. 또한 정화운동의 향방을 가늠하는 계기가 됐고, 특히 불교정화운동이 본래 의도와 주체성을 모두 상실하고 세속적인 정치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정치운동으로 변절됐다는 점이다. 불교정화운동 당시 정화운동의 상징적인 대표가 동산 스님이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동산의 삶과 철학을 담고 있는 것이다.
동산이야말로 일제강점기 때 한국불교의 선승이자 민족족주의자였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개인적 친분이 있던 동산 스님은 이승만 대통령의 개입이후, 종단 정화운동에 실질적으로 개입하기보다는 선불교 선승으로 되돌아가 비정치적인 수행승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전념하기도 했다.
일본불교 점거 시기인 1890년 2월 25일 충북 단양에서 태어난 동산의 속명은 하동규였다. 어릴 때 한학을 공부했고, 15세 때 개화 물결로 인해 익명보통학교에서 선각자 주시경 담임선생 아래에서 한글을 배웠다. 당시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국가에서 제정한 단발령에 의해 머리를 깎고 신학문(한글)에 입문했다. 19세 때 익명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주시경 선생의 권유로 경성 중동중학교에 입학했다. 21세인 1910년 우리민족이 씻을 수 없는 치욕인 한일합방조약이 공포된다. 그는 의학을 전공해 1912년(23세) 경성 총독부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24세 때 민족지도자 백용성 선사를 만나 금정산 범어사로 출가했다.
1919년 30세(승랍 6세) 때 고종이 승하했고, 민족운동이 들불처럼 번지자 동산도 3.1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3.1 조선독립운동으로 스승 용성과 만해(한용운)가 옥고를 치르자 동산은 스승 용성의 옥바라지를 했다. 그 결과 용성의 불교실천사상을 따르게 된다. 동산은 일제식민지시기에 민족주의 불교사상을 수립하고 실천한 용성의 스승인 경허와 그의 스승인 용성의 선불교 사상을 전승해 철저히 수행정진에 임했다.
이후 방한암 선사로부터 교학을 배운 후 간화선 수행에 정진하시다가, 38세에 범어사 금어선원 동쪽 대나무 숲에서 댓잎소리에 활연히 마음이 열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동산이 65세였던 1954년 선학원에는 불교정화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전국의 선승들이 집결했고, 당시 한국불교를 대표해 하동산 종정의 이름으로 정화선언문을 선포했다. 당시 동산이 적극 정화운동에 참여하면서 아주 격화되기도 했다. 어쨌든 1955년 8월 12일 한국불교계 정화운동은 종막을 고했다.
1955년 8월 28일 뚝섬 봉은사, 안암동 개운사 접수를 시작으로 통도사, 해인사, 범어사 등 3대 사찰과 전국 주요 사찰 및 각도의 종무원을 모두 접수함으로써, 그 재산관리권을 장악했다. 다만 범어사는 1913년 3월 15일 동산이 출가한 곳이기도 해 대화를 통해 합법적으로 비구승측인 동산이 주지가 됐다. 1955년 범어사 주지로 임명된 동산은 종정을 사임했다. 범어사 조실로 복구하면서 금어선원의 수좌들을 지도 했다. 이후 1956년 두 번째 조계종 종정직을 사임하고 범어사를 떠나 고려시대 요세가 법화결사를 주창했던 만덕산 백련사에 거주처를 옮겨 불교 정화운동의 종결을 위해 용맹정진했다.
동산은 1958년 8월 10일 대한불교조계종 13회 중앙종회에서 세 번째 종정(69세)으로 추대된다. 조계종단은 동산의 정치적 힘이 필요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동산을 가장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을해년인 1959년 70세인 동산은 범어사의 조실로 주석하면서 종정의 소임을 당했다.
불교정화운동에 있어 이승만 대통령의 정화유시가 불교계 분열을 시키는 결정적인 변수이었다. 하지만 대처승 측 종단 간부들이 조금 양보했고, 당시 비구승 측에서 이승만 정부의 성격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견지했더라면 종단의 문제로 불교가 분열되지 않았을 것이고, 건강한 민족불교로 자리매김했을 것이라고 저자 진관 스님은 밝히고 있다.
▲ 진관 스님진관 스님이 지난 8일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김철관
동산의 정화운동은 화합보다 갈등의 방향으로 전개됐다는 점과 이승만 정권과 유착관계로 말미암아 정화운동의 순수성이 정치화되면서 왜곡됐다는 점 그리고 비구승과 대처승의 양측은 환부역조로 대응해 용납의 미덕이 없었다는 점은 불교정화운동의 한계라고 지적할 수밖에 없다.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산은 해방이후 불교계의 새로운 종단을 구성하고자 했던 정화운동이 발생하자 이를 주도해 오늘날 한국불교의 기반을 구축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특히 그는 한국불교 통합종단 이전의 조계종 종정에 추대돼 고려시대 선종의 정통인 조계종 법맥을 계승했고,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의 역사적 연원을 확립했다고도 할 수 있다.
불교인권운동가인 저자 진관 스님은 광주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불교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2012년 중앙승가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실천불교학으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고구려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근대 등의 불교 연구로 많은 저서를 남겼다. 또한 여러 권의 시집과 수필집이 있다.
▲ 기자간담회진관 스님이 지난 8일 낮 서울 인사동 한 음식점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출판 동기를 설명하고 있다. 조계종 총무부장 종훈스님과 포교연구실장 법상 스님이 참석했다. ⓒ 김철관
한편, 진관 스님은 지난 8일 낮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 음식점에서 '출판기념,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이날 진관 스님은 "한국 근현대 불교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연구 과제가 되는 것이 불교정화운동"이라며 "불교승가대학에서도 불교정화운동사를 정식 교과목으로 채택해, 이를 전공하는 후학들이 더 많이 배출돼야 한다"고 말했다.
인사말을 한 종훈(조계종 총무부장) 스님은 "인재 중에 가장 많은 문도가 동산 스님 문도라고 한다"며 "동산 큰스님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절 차지하는데 이용만 했지, 진정 동산 스님의 사상과 삶을 이해하는 연구는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진관 스님이 동산스님 연구를 통해 이를 해냈다"며 "그동안 진관스님은 집회에서 목탁 치는 스님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많은데, 이제 학자 스님으로 인정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어 법상(조계종 포교연구실장) 스님은 "진관 스님이 만학을 하면서 3년 동안 인고를 하며 나온 책"라며 "박영효 스님과 동산 스님의 활동이 불교정화운동의 핵심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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