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삶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문화유산

[지리산 자락 남원에 풍기는 천년의 향기 ①] 운봉읍

등록|2014.04.16 11:31 수정|2014.04.16 11:31
남원시 운봉의 서림공원에서 옛님을 만나다

▲ 덕치리 초가로 들어가는회원들 ⓒ 이상기


불교문화재 상반기 답사 일정이 잡혔다. 3월 29일과 30일 1박 2일로 전북 남원시 일원의 문화재를 보기로 했다. 모이는 장소는 남원시 운봉읍 서림공원으로 정해졌다. 오전 8시에 만나기로 했으니 집에서 새벽 4시에 길을 나선다. 중간에 문경의, 김경식 선생님과 합류해 중부 내륙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간 다음, 고령 JC에서 88올림픽 고속도로로 들어선다. 88올림픽 고속도로는 말만 고속도로지 국도 수준이다. 추월도 안 되고 경사도가 높아 속도를 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오전 7시 30분쯤 지리산 IC를 나와 인월면으로 들어선다. 인월면은 지리산의 북쪽에 있는 흥부 고을로 판소리 <흥부가>의 배경 마을로 알려져있다. 이것은 <흥부가>의 '제비노정기'와 '박타령' 등을 근거로 내린 결론이다. 인월면에서 우리는 24번 국도를 타고 서쪽 운봉으로 향한다. 운봉읍에 들어가 아침 식사를 하고 서림공원으로 가니 정확히 8시다. 그런데 오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이제 제법 내린다. 답사가 어렵게 생겼다.

▲ 서림정 안에서 비를 피하는 회원들 ⓒ 이상기


이번 답사에 참여하는 인원은 모두 27명이다. 학계와 재야의 학자도 있고, 학예연구사도 있고, 지방의 향토문화재전문가도 있다. 답사를 기획한 사람은 남도불교유산연구소장인 이홍식씨다. 그와 함께 이번에 보기로 계획한 문화재는 지정 비지정 합쳐서 30개쯤 된다. 그중 실상사 문화재를 제외하면 잘 알려지지 않은 문화재가 대부분이다.

서림공원에 내리니 일부 회원이 비를 피해 서림정에 들어가 있다. 옛날 운봉현에는 관아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비보림(裨補林)이 조성되었다. 이것이 동림과 서림이다. 서림 옆으로는 서천이 흐르고, 서천을 건너 남원으로 이어지는 대로가 있었다. 그러므로 서림은 고을의 서쪽을 지키는 숲으로 신성시되었다. 그 때문에 이곳에는 석장승 2기를 세워 악귀를 쫓도록 했다.

▲ 서림의 진서대장군 ⓒ 이상기


이들 두 장승이 방어대장군(防禦大將軍)과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이다. 이들은 중요 민속자료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들은 부부로 알려졌으며 남편인 방어대장군과 아내인 진서대장군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방어대장군이 쓴 관모와 수염을 통해 남자임을 알 수 있다. 높이는 2.4m다. 이에 비해 진서대장군은 얼굴이 둥글고 귀가 달려 있다. 전체적으로 방어대장군에 비해 여성적이다. 높이는 2.1m다.

이들 두 장승에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전설이 부부싸움에 관한 것이다. 이들 부부 장승이 불화로 싸움하게 되었단다. 둘은 서로 상대방의 비위를 건드렸는지, 진서대장군이 방어대장군의 귀를 물어뜯었다고 한다. 그러자 화가 난 방어대장군이 진서대장군의 목을 부러뜨렸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끔찍하다. 아마도 방어대장군의 없는 귀, 진서대장군의 부러진 목을 보고 만들어낸 스토리텔링일 것이다.

▲ 서림공원 비석군 ⓒ 이상기


서림에는 석장승 외에 당산나무, 비석군, 서림정이 있다. 비석 중에는 갑오토비사적비(甲午討匪事蹟碑)가 보이고, 어사 심동신선덕비도 보인다. 갑오토비사적비에는 동학혁명 때 민보군(民保軍)을 조직하여 운봉을 지켜낸 박봉양(朴鳳陽)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 이들 옆에 서림정이 있는데, 2001년에 세워진 현대식 기와 건물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수인사를 하고 다음 목적지인 권포리 장승으로 향한다.

운봉읍 권포리에는 장승 부부가 두 쌍 있더이다

권포리에는 네 개의 석장승이 있다. 둘씩 두 쌍이다. 이들은 마을 입구에 한 쌍이 있고, 들판에 한 쌍이 있다. 이들 장승은 서림의 석장승에 비해 마모가 심해 역사성과 예술성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나마 마을 입구 석장승에서 대장군과 갑자(甲子)라는 명문을 확인할 수 있다. 대장군이라 쓴 남자 장승은 눈과 코, 입 등에서 양감이 부족한 편이다. 높이는 1.83m다. 여자 장승은 남자 장승에 비해 눈 코 입이 분명하다. 높이는 1.59m이다.

▲ 권포리 마을 입구 장승 한 쌍 ⓒ 이상기


여기서 마을 쪽 시내버스 정류장 쪽으로 가면 길가로 두 기의 석장승이 또 있다. 이들은 삼거리 논가에 있다. 장승 중 하나는 논가 돌무더기 서낭당 옆에 있다. 이것이 여장군으로 높이가 1.27m다. 눈과 코를 확인할 수 있으며, 입은 마모가 심한 편이다. 또 다른 하나는 도로 아래 비탈에 있다. 이것은 마모가 더 심해 둥근 얼굴 형상 속에 눈 코 입을 확인하기 어렵다. 높이가 1.10m로, 대(大)라는 명문이 있어 남장승으로 추정한다.   

덕치리 회덕 마을의 초가

권포리에서 우리는 주천면 덕치리로 향한다. 이번에서 볼 문화유산은 덕치리 초가다. 회덕 경로당 앞에 차를 세우고 길을 따라 내려가니 초가가 보인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지붕이 볏짚이 아니다. 억새풀로 지붕을 이은 샛집이다. 억새는 볏짚보다 강해 한 번 이으면 10여 년을 버틴다고 한다. 과거 회덕 마을에 샛집은 아주 흔한 것이었는데, 이제는 이것만 남아 있다고 한다.

▲ 멀리서 바라 본 회덕 마을 초가: 중간 왼쪽 ⓒ 이상기


덕치리 초가는 지리산록에 있는 가옥을 이해하는데 중요해서 전북 민속자료 제35호가 되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안채, 사랑채, 문간채가 트인 ㄷ자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안채는 4칸짜리 구조로, 가운데 두 칸 앞쪽으로 마루가 있다.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없는 게 유감이지만, 부엌의 그을음으로 보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벽 쪽에 보니 민박용으로 대여를 한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사랑채는 가운데 부엌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온돌방 오른쪽에는 소 외양간이 있다. 문간채는 최근에 새로 보수를 한 것 같다. 왼쪽에 부엌이 있고, 오른쪽으로 방이 두 개 있다. 마당에 꽃밭이 조성되어, 이들 세 건물을 구별해 주고 있다. 안채 뒤로 돌아가니 장독대가 있고, 뒤로 대숲이 조성되었다. 집 옆으로는 산 쪽에서 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그리고 건물 밖으로는 돌담을 둘러 길과 집을 구분했다.

▲ 덕치리 초가 안채 ⓒ 이상기


이 집은 1895년 박창규씨가 풍수가의 말을 듣고 논을 메워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1950년 6·25사변 때 불에 탔고, 1951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민가 형식을 잘 계승하고 있지만, 지붕의 경사가 급한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이 지역이 산촌이어서 눈이 많고, 쌓인 눈이 쉽게 흘러내릴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덕치리 초가는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두세 번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했다. 

미륵정사에는 석조약사여래입상이 있다

덕치리 초가를 보고 우리는 근처에 있는 미륵정사로 간다. 그곳에 석조약사여래입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 불상은 비지정문화재로 아직 문화재로서의 가치 평가가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회원들 각자가 문화재에 대해 서로 주장을 펴고 그것을 종합하는 방식으로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불상은 미륵정사에서 조금 떨어진 산자락에 세워져 있다.

▲ 미륵정사 석조약사여래입상 ⓒ 이상기


우선 다리 아래 부분이 훼손되어 보수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머리와 광배의 일부분이 깨진 것을 접착제로 이어 붙였다. 얼굴부분의 눈, 코, 입은 마모가 심한 편이다. 그렇지만 비례와 균형이 맞아 상호가 원만구족해 보인다. 귀는 길고 크며 목에 삼도가 보인다. 머리의 나발은 분명하게 표현되었으나, 육계는 약하게 보인다.

신광과 두광은 일체형으로 되어 있으며, 연화문, 염주문, 불꽃문이 보인다. 왼손에는 약함을 들고 있고, 오른손은 들어 올려 가슴에 대고 있다. 그 때문에 석조약사여래 입상이라 부른다. 옷주름은 U자형을 이루고 있는데, 다리 아랫부분을 새로 해 붙여 원래의 모습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전체적으로 다리 부분을 짧게 복원해 불상의 크기가 작아 보인다. 일반적으로 인체는 허리 아래 부분이 윗부분보다 더 긴 편인데, 이 불상은 그렇지 않다.

▲ 석조약사여래입상 전체 모습 ⓒ 이상기


석조불상 아래 두 발을 표현했고, 그 아래 연화대를 설치했다. 연화대 아래로는 검은색 돌로 기단부를 만들고 8면에 조각해 넣었다. 복원에 정성을 들인 흔적이 보이나 비례가 맞지 않는 점이 조금 아쉽다. 조성시기가 고려시대인 것만은 분명한데 좀 더 구체적으로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12세기를 기점으로 그 전과 후로 갈린다. 다른 불상과의 친연성을 근거로 하는 주장이라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지리산 정령치에 있는 개령암지 마애불이다. 정령치 고개의 높이가 1172m나 되고, 그곳에서 다시 산길을 따라 1㎞쯤 올라가야 한다. 산으로 오르면서 날씨가 더 나빠지고, 길도 굉장히 구불거린다. 정령치에 오르니 바람이 세차게 불어댄다. 정령치에서는 달궁 계곡 건너 지리산 능선을 조망할 수 있다. 오른쪽 노고단에서 삼도봉과 반야봉을 거쳐 명선봉으로 능선이 장쾌하게 이어진다. 더 멀리 왼쪽으로 연하봉과 천왕봉은 검은 구름 속에 가려 잘 보이질 않는다.
덧붙이는 글 3월 29일과 30일 1박2일 동안 남원시 문화유산을 답사했다. 이번 답사의 목적은 남원의 잘 알려지 않은 문화재를 답사하고 소개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문화유산을 옛님이라 부른다. 남원시에 있는 옛님을 7-8회 정도 소개하려고 한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