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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다리 폭파, 한국전쟁 쟁점 왜곡했다"

[인터뷰] <국민은 적이 아니다> 저자,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팀장

등록|2014.04.27 15:17 수정|2014.04.27 15:17

▲ <국민은 적이 아니다>책표지. ⓒ 헤르츠나인

<국민은 적이 아니다>의 저자 신기철 선생은 지난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그 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나와 함께 일하던 동료였다.

그는 인권침해사건과 민간인집단학살 사건을 조사하던 조사관이었고, 나는 그가 쓴 국문보고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주한 외국특파원들, 공관원들 또는 외국학자들에게 알리는 일을 했다.

그래서 그가 쓴 여러 보고서를 정독하고 영어로 번역하면서 나는 한국현대사의 어두운 장면들을 공부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지난 2010년 이명박 정권 하에서 문을 닫고 신 선생과 나는 두세 명의 자녀를 둔 40~50대 가장으로서 하루아침에 '구직자' 신세가 되었다.

신 선생은 1980년대 대학을 나오고 지난 2004년 정부기관에서 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인천, 구로, 영등포지역 노동운동에 참여했던 현실참여형 지성인이다.

어느덧 그를 안 지가 10년이 되었다. 신 선생의 인물평을 하라면 "초심을 잃지 않은 분", "돈 모르는 바보", "시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느끼는 행동가"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제 그가 진실위화해위원회를 나오고 한국현대사의 민간인집단학살에 관한 책 <국민은 적이 아니다>를 발간했다. 책의 한 장 한 장에서 신 선생의 눈물과 뜨거운 땀을 느낄 수 있었다. 아래는 지난 며칠간 이메일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실종'은 한국전쟁 전후 희생된 사건의 본질  

▲ 저자 신기철. ⓒ 신기철


- 책에 "1991년 2월 노동운동 현장에서 실종된 친구 철민과 강수자 어머님께" 바친다고 되어 있는데, 그분들은 어떤 분들인가?
"철민이는 나와 83학번 같은 과 동기였다. 1986년 분신했던 이재호의 친구이기도 했다. 나는 1989년부터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활동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때 철민이는 구로역 근처 부산파이프라는 공장에 취직했다.

1991년 전후 시기는 군사독재의 잔재들이 최후 발악을 하는 시기였다. 사노맹 사건이나 중부지역당 사건이 벌어졌다. 내가 살던 자취방에도 누군가 침입했던 흔적을 남기고 갔다. 고의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 시기에 철민이는 집을 떠나겠다는 편지를 한 장 남기고 사라졌다. 자필이긴 했지만, 편지에는 떠나야 할 이유가 적혀 있지 않았다.

강수자 어머니는 설 명절에 헤어지던 아들 철민이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한다. 떠나던 철민이가 다리를 절었고, 고문의 흔적이라고 믿고 계셨다. 어머니는 철민이의 마지막 편지 내용 역시 강박에 의한 것으로 믿고 계셨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철민이의 실종사건에 대해 진실규명불능으로 판단했다.

나는 2003년부터 어머니를 찾았지만, 진실화해위원회가 시작되고 2006년이 되어서야 뵐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한순간도 실종된 철민이를 잊은 적이 없다고 하셨다. 따뜻한 밥도 먹은 적이 없었고, 찬 방에서 서서 잠을 주무신다고 했다. 나를 보면 철민이를 떠올린다고 하셨다. 그만큼 괴롭다고 하시니 찾아뵙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던 모양이다.

'실종'은 한국전쟁 전후 희생된 사건의 본질이기도 하다. 진실이 숨겨지는 동안 개인적인 문제로 인식되고 국가 범죄는 그 뒤에 은폐된다. 나는 철민이의 실종과 한국전쟁 희생이 서로 다른 사건이 아니라고 본다."

- 책에서 한국전쟁 시기에 아무런 혐의가 없는 어린이, 노인, 여성이 집단학살된 사실을 밝혔다. 그런데 이 시기 학살의 가해자는 누구였나? 가해자들은 왜 그들을 학살했던 것일까?
"전쟁이 발발하면 대략 17세부터 45세 사이의 남성이 동원된다. 이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은 남북을 오르내렸던 한국전쟁에서 매우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국군 후퇴 시기 저질러진 국민보도연맹사건은 인민군에게 동원될 인력을 미리 제거하는 의도가 아니었는지 의심되며, 이런 현상은 1951년 1·4 후퇴시기 국민방위군 사건에서도 잘 나타난다. 국군 수복 후 나타나는 부역혐의 사건은 정반대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인민군 측에게 동원된 청·장년층에게 이승만 정권이 보복을 가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어린이, 여성, 노약자가 집단학살 되는 사건은 국군 11사단이나 경찰에 의한 토벌사건과 1·4후퇴 시기 예비학살의 경우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군경토벌사건은 특정 작전지역을 비우는 것이 목적으로 주민들을 공격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 결과, 산으로 피신할 체력이 없었던 노약자들이 마을에 남았다가 집단학살당했던 것이다. 1·4후퇴 시기의 피해 역시 매우 끔찍했다. 1950년 7월에 있었던 국민보도연맹 학살은 청·장년을 대상으로 했지만, 이 시기엔 부역 혐의를 받았던 가족 전원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이다.

남양주 진건면 229명 학살사건, 강화 본도와 교동도 석모도 사건, 김포 강씨 일가 학살사건, 포천 진설모루 사건 등은 모두 일가족에게 저질러진 참극이었다. 토벌작전의 경우 이에 동원된 11사단 국군, 각 경찰서 토벌부대가 가해자였다. 1·4후퇴 시기에는 '비상시향토방위령', '국민방위군 설치법' 등에 의해 정비된 준군사조직이 경찰 또는 국방부의 지휘를 받아 학살에 주로 가담했다."

- 이승만에게 한국전쟁 시나리오가 있었을 것으로 보나?
"애치슨 선언에서도 잘 볼 수 있듯이 미국이 어떤 형태의 전쟁 시나리오를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라고 본다. 이승만 역시 이러한 시나리오를 몰랐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가정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시나리오가 있었다고 해서 정말 전쟁을 일으키려 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이러한 관점은 김일성, 이승만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고 본다. 전쟁준비는 했지만, 정작 전쟁을 벌이는 것은 신중했으리라는 것이다.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결국 남북 모두 '침략유도 후 반격'의 시나리오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방어'라는 명분을 획득한 후 침공하겠다는 것인데, 국군의 경우 '후퇴 후 반격' 전술이 이를 입증한다. 그러니 국군이 해주, 금천, 철원을 점령했다는 주장이 그다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공격하는 인민군에게도 허점이 있었을 것이다. 해주의 경우 국군이 후퇴하는 경로가 38선을 넘어야 했다는 주장도 있다.

나는 전쟁이 사고처럼 난 것이 아닌지 검토하고 있다. 남과 북은 서로 비슷한 전략을 준비하고 대치하고 있었다. 원치 않지만 피할 수 없는 전쟁임을 감지하고 있었고 오랜 뜸들임 후 어디서부터인가 충돌이 일어났다고 본다. 그것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결국, 국군은 와해하고 6월 25일 전쟁이 시작된 후 27일 자정에 인민군이 서울까지 진입했다. 이것이 인민군이 강했던 것인지 또는 국군의 후퇴전략 결과인지, 이도 저도 아닌 국군의 무능 때문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모두 다 해당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 <국민은 적이 아니다> 책 중에 있는 한국전쟁 중 한강다리 부근 참고사진. ⓒ 임인식


- 미국은 한국전쟁에 대한 시나리오가 있었다고 보는가? 있었다면 어떤 것이었나?
"미국의 전쟁 시나리오는 한국전쟁의 초기 전개 과정과 정확히 일치했다. 미군은 철수에서 생길 위험은 전쟁 발발 후 이동할 미군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다. 한 달이면 일본 주둔 미군이 한반도로 이동할 수 있다고 봐서 전선을 확보하고 한 달만 버티면 수복할 수 있으며, 설령 한반도 전역을 점령 당한다고 해도 일본에서 반격하면 능히 수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1950년 6월 19일 작성되었다는 맥비 커티스의 시나리오는 '낙동강 전선 방어 후 반격'을 가정하고 있다. 시나리오에 그칠 수도 있었겠지만, 이즈음 되면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전쟁을 다시 검토해야 할 것이다."

한강 다리 폭파, 한국전쟁에 심각한 영향 미치지 않아

- 한국전쟁 초기 한강다리 폭파는 전쟁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판단하나? 그리고 한국전쟁 후에 "한강다리 폭파 책임도, 폭파 실패의 책임도 규명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왜 이런 책임규명이 안 되었다고 보나?
"한국전쟁을 분석하는 군사전문가들은 후퇴하는 전방 4개사단과 후방 4개사단을 합해 한강 이남에서 방어선을 구축했어야 했다고 주장한다. 병력을 유지하는 신속한 후퇴와 후방병력의 공동전선 구축은 인민군 남침 확대를 막았을 것이라는 이 주장은 비록 사후적인 것이겠지만 매우 타당해 보인다.

당시 행동으로 봐서 인민군들 역시 초기에 이렇게 예상했던 것 같다. 결국, 서울방어에 매달린 군 수뇌부는 후방부대를 순차적으로 한강 이북으로 투입해 차례로 패배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다음 전투를 위한 후퇴 역시 한강다리 폭파로 막혔다. 이 말대로라면 한강다리 폭파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여기에는 현실과 모순되는 측면이 있다. 대표적인 사실로 한강다리 폭파 당시 이미 인민군이 김포지역을 점령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한강다리 폭파와 무관하게 국군이 포위당할 위험에 놓여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은 한강철교 중 2개가 폭파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강인도교의 폭파에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만큼 이 사실은 그 반대를 증명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즉, 인민군이 공격의사가 있었다면 2개의 한강철교를 적극 활용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내가 내리는 잠정적인 결론은 한강다리 폭파가 전쟁에 미친 영향은 알려진 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한국전쟁의 진실을 왜곡하는 중대한 쟁점의 하나로 한강다리 폭파를 지적했다. 이 쟁점 하나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알려져 있는 전쟁의 모습이 사실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중대한 왜곡이 포함되어 있으니 진실을 말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진실이 규명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 명의 폭파담당장교에게 초기 패전의 책임을 조금이나마 씌우려던 이승만 정부나 재심제도를 통해 억울함을 풀어주는 척하려던 박정희 쿠데타 세력이 전쟁의 허구가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천상륙작전, 역사 왜곡이 많다... 국가에 버림받은 '국민'

- "인천상륙작전은 가장 성공한 작전 중 하나였다?"라고 하는 데 동의하나? 인천상륙작전의 긍·부정적인 면을 어떻게 평가하나?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 역시 왜곡되었거나 자기만족적인 평가가 많다. 가장 대표적인 내용은 국군의 역할이 과장되어 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한 국군 부대는 해병대뿐이었다. 미 해병대에 배속된 3개 연대였다. 이들은 주로 제주 등 후방 청년들이었고, 신병들이라 선상에서 사격훈련을 마칠 정도였다.

용맹한 무용담에 비해 정작 이들에게 부여된 임무는 비무장 민간인인 부역자 처단이었음이 확인되었다. <한국전쟁사>는 예비부대로서 이를 통해 전투 훈련을 했다고 서술한다. 민간인을 상대로 말이다.

국군 17연대에 비하면 이는 그나마 봐 줄 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부대는 서울수복작전에 예비부대로 투입되기 위해 1950년 9월 24일 인천 월미도로 상륙한다. 9월 15일에서 열흘이 지난 뒤였다. 함께 탔던 사람으로 김창룡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이 가장 유명하다. 그럼에도 국군 17연대장은 9월 15일 인천에 상륙하던 날을 회고한다. 마치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던 것처럼 말이다. 대부분의 인천상륙작전 관련 자료는 국군 17연대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한 것처럼 서술한다. 한국전쟁 관련 서적을 보면 인천상륙작전과 국군 17연대의 관계를 주의 깊게 살펴볼 것을 권한다. 대표적인 역사 왜곡 사례로서 말이다."

- 책에서 미군의 민간에 대한 공격은 한국전쟁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했는데 미국은 왜 같은 동맹국의 국민을 공격했다고 보나? 인권의식이 부족해서?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나?
"피난민 등 민간인의 피해는 한국전쟁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전쟁 전 5·30선거에서 국민의 지지를 잃은 이승만 정부는 영구집권의 계기를 노려 국민을 반대세력으로 여겼을 것이다. 미군에게는 남과 북의 민간인이 구별되지 않았을 것이다. 피난민에 대한 통제를 전략적인 문제로 보았다고 생각한다.

6월 27일 밤 대통령 이승만의 거짓방송은 피난 짐을 풀게 하였다. 그 틈에 한강다리는 폭파되었고, 미 CIA는 한강다리 폭파 결과 피난민의 이동 통제에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이후에도 피난민은 군 작전의 걸림돌로 여겼음이 드러난다. 후퇴하는 군인들은 대구로 이동할 예정이었으므로 피난민들을 호남지역으로 유도하려 했다.

미군과 이승만 정부가 민간인을 어떻게 여겼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형무소재소자 학살사건과 국민보도연맹사건이다. 후퇴하던 국군과 경찰은 국가가 관리하던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들을 후퇴 순서에 따라 체계적으로 학살했다.

1·4후퇴 경우는 전혀 달랐다. 학살방식보다는 국민방위군을 조직하여 후퇴시켰다. 하지만 이 역시 인력의 유지보다는 적이 이들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들이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정부 인사들이 중간에 가로챈 것이 이를 입증한다. '국민방위군'사건의 본질은 아군의 가용병력 유지보다 적군의 이용방지였다.

국가는 국민을 지켜야 한다. 국가의 존재근거는 국민에게 있기 때문이다. 민주정권은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다. 외부세력은 국민이 지지하는 정권을 통해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독재정권에겐 반대하는 국민은 필요 없었고, 이를 지지하던 외부 세력은 국민의 존재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자기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국민'의 처지는 바로 이런 것이었던 것이었다."

- 이 책을 쓰게 된 계기와 책을 쓰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나는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활동했다. 개인적으로 보람 있었고 매우 중요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일반시민은 물론 전문 학자들조차 위원회 보고서를 참고하지 않았다. 진실화해위원회 경우는 종합보고서조차 왜곡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역사적인 해석에는 접근도 해 보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위원회의 활동이 종료되면서 개별사건을 종합하려는 시도는 물론 개별사건조차도 잊혀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나는 이러한 위원회의 조사내용이 일반 시민들도 쉽게 만날 수 있도록 다시 서술되어야 하며, 개별적인 민간인학살사건을 통합하여 역사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선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요약하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이를 마치고 <한국전쟁사>를 검토했다.

나는 전투일지와 민간인학살사건일지를 비교 검토하면서 놀랐다. 전쟁 발발 6개월 사이에 휴전선 3일간의 피해나 낙동강 전선 전투를 제외한다면 한국전쟁 피해의 대부분이 민간인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민간인학살 피해는 전투의 '부수적 피해'가 아니라 '근원적 피해'였다.

"총알이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후퇴해야 했다"던 그들에게 후방의 자기 국민에게 쏠 총알은 남아 있었다. 도대체 누구를 적으로 여겼던 것일까? 이 책은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노력의 결정이다. '한국전쟁사'를 '민간인학살'로 재해석하자는 시도의 결과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책을 쓰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선입견'이었다. 그동안 알고 있던 '한국전쟁'은 잊고 처음부터 다시 보고자 노력했다. 민간인학살 사건은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한국전쟁은 국방부 <한국전쟁사 1~11>를 근간으로 삼았다. 하지만 선입견을 버리려던 노력은 곧 한계에 도달했다. <한국전쟁사>를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지 판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자면 '남침유도설' 같은 것이다.

<한국전쟁사>를 검토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어느새 '유도된 전쟁'이었다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국군은 무능했기 때문에 초기 패전했을 수 있다. 그런데 역사책은 무능이 아니라 마치 '의도했던' 결과'인 것처럼 서술한다. 자존심을 지키려는 서술방식이 결국 남침유도설과 이어지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저자 신기철
* 저자 신기철은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도 고양시에서 자랐으며 서울대학교 심리학과를 다녔다. 인천과 구로, 영등포 지역 노동운동에 참여했으며 고양 지역 시민운동에 종사하면서 금정굴 사건 등 과거사진상규명 활동에 가담했다.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6~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조사팀장으로 활동했다. 현재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부설 인권평화연구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제노사이드 발생의 사회 심리적 배경에 주목하고 있으며,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과 홀로코스트 등 제노사이드의 공통점을 비교·연구하고 있다.

<괴산군지>, <공도읍발전사> 등에 집필자로 참여했으며, 저서로는 <진실,국가범죄를 말하다>가 있다.

덧붙이는 글 국민은 적이 아니다 -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 그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서 (신기철 (지은이) / 헤르츠나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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