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에서 출세한 고려 공녀들... 황제의 속뜻은?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기황후>, 일곱 번째 이야기(최종)
▲ 드라마 <기황후>. ⓒ MBC
역사왜곡 논란 속에 방영된 MBC <기황후>가 지난달 29일 51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공민왕 때 고려를 침공한 기황후를 너무 미화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이 드라마는 마지막 방영분에서 기황후가 고려 침공을 명령하는 장면을 짤막하게 내보냈다. 짤막하게나마 기황후의 부정적 모습도 보여준 것이다.
이 드라마를 둘러싸고 역사왜곡 논란이 많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드라마는 역사를 왜곡했다기보다는 창조한 드라마였다. 14세기 초반에 존재한 몇몇 인물들의 이름을 빌려 썼을 뿐, 실제로는 역사와 거의 무관한 드라마였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사극이 아니라 그냥 '극'이었다고 평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문제점에도 이 드라마는 조국에 의해 버림받은 공녀들의 문제를 비교적 생생하게 부각시켰다. 드라마 초반부에 묘사된 공녀들의 비참한 실상은 예나 지금이나 약소국 여성들이 겪는 애환을 상당 정도로 환기시키는 데 성공했다.
여성이라는 이유와 약소국 고려의 백성이라는 이유로 이중적 고난을 받은 당시 여성들의 고통이 이 드라마에서는 어느 정도 드러났다. 참고로, 여기서 '약소국'이란 것은 몽골과 비교할 때 그렇다는 뜻이지 여타 국가들과 비교할 때도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1275년부터 1355년까지의 80년간 몽골에 끌려간 고려 공녀는 공식적으로 176명이다. 하지만 이것은 <고려사>에 근거한 공식적인 통계에 불과하다. 공식 역사기록에 남지 않은 경우나 몽골 세력가들이 개인적으로 끌고 간 경우까지 합하면 수백 명이나 2천 명은 될 것이라는 1950년대 연구 성과도 있다.
보통 10대에서 20대 초반까지인 공녀들은 원칙상 상품으로 취급되어 몽골에 끌려갔다. 상품으로 끌려갔다는 것은, 이들을 보내는 조건으로 고려 정부가 대가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이 상품으로 거래되던 20세기 이전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고려에서 공녀가 포함된 조공품을 일괄적으로 제공하면, 몽골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회사품(回賜品, 답례품)을 일괄적으로 지급했다. '일괄적으로 거래했다'는 것은, 공녀 1명씩에 대해 별도로 값을 매기지 않고 공녀가 포함된 조공품 전체에 값을 매긴 뒤 답례품의 종목과 수량을 결정했다는 뜻이다.
고려 공녀들 중에는 몽골 정부와의 연줄을 만들 목적으로 집안에서 일부러 보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강압에 의해 끌려간 사람들이었다. 몽골 정부의 요구를 받은 고려 정부가 자국민들을 상대로 강압적인 공녀 징발을 감행했던 것이다.
80년간 고려 공녀 176명 끌려가... 비공식 기록은 2천 명 추산하기도
▲ 기황후(하지원 분). ⓒ MBC
몽골이 공녀를 끌고 간 근본 동기는 궁궐의 여성 일꾼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사극이나 동화에서는 궁녀가 꽤 괜찮은 자리였던 것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평민 여성들은 노예나 다름없는 궁녀 자리를 기피했다.
궁녀가 되면 평생 중노동을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결혼이나 이성교제도 할 수 없었다. 남자를 가까이 하면 대부분의 경우에 사형을 당했다. 물론 개중에는 왕비가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런 일은 몇 백 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했다.
이처럼 대부분의 평민 여성들이 궁녀 자리를 기피했기 때문에, 몽골 같은 강대국에서도 궁녀를 뽑는 게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래서 몽골은 국력을 이용해 외국의 공녀를 사서 궁궐에 배치했던 것이다.
하지만, 공녀가 모두 궁녀가 된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귀족의 부인이나 첩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축약된 고려시대 역사서인 <고려사절요>의 충선왕 편에 따르면, 대사헌 조서의 딸은 정식으로 공녀가 되어 몽골에 간 뒤 몽골 권력자의 부인이 되었다. 이런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몽골 궁녀가 된 고려 여성들은 고려 궁녀가 된 고려 여성들보다 훨씬 더 힘든 조건에서 살아야 했다. 궁에서 중노동을 하고 결혼·이성교제가 금지되는 것에 더해, 언어 및 문화적 고충까지 덤으로 짊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또 고려 궁궐에 근무하면 어쩌다 가족이라도 만나볼 수 있지만, 몽골에 들어서는 순간 이미 가족과 사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공녀들은 몽골에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런데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몽골의 황후 자리에까지 오른 여성들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황후와 기황후다. 한글맞춤법상 '김 황후'라고 표기해야 하지만, 기 황후가 일반적으로 '기황후'로 표기되는 것과 균형을 맞추고자 이 글에서는 김 황후을 김황후로 표기하고자 한다.
이 두 여인은 몽골의 세계 패권이 내리막길을 걷던 14세기 전반에 몽골인들의 텃세에도 불구하고 황후 자리에까지 오르는 입지전적 인물들이다. 기황후의 경우는 몽골 역사서인 <원사>에 기황후 열전이 있지만, 김황후은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기록이 없다. 김황후에 관한 기록은 주로 고려 측 역사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마시리라는 몽골 이름을 가진 김황후는 기황후보다 최소 25년 전에 몽골 궁궐에 들어갔다. 그는 기황후만큼의 화려한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기황후보다 더한 이력을 남겼다고 할 만하다.
▲ 토곤 테무르(드라마 속의 타환, 지창욱 분). ⓒ MBC
기황후는 토곤 테무르 황제 시대에 궁녀에서 제2황후·제1황후에 올랐다. 이에 비해 김황후는 몽골이 원나라라는 중국식 국호를 병용한 1271년을 기준으로 세 번째 황제인 카이산(재위 1308~1311년), 네 번째 황제인 아유르바르와다(재위 1312~1313년, 1314~1320년), 여섯 번째 황제인 예순 테무르(재위 1324~1328년)의 후궁 혹은 황후 역할을 했다.
세 명의 황제를 거쳤다는 점도 경이롭지만, 황제가 자주 바뀌던 정치적 혼란기에 궁녀에서 후궁·황후로 승진했다는 것도 경이롭다. 제3대·제4대 황제를 거친 뒤, 제5대를 건너뛰어 제6대 황제의 시대에도 살아남았으니, 생존력으로 치면 기황후 못지않았다.
궁녀 자격으로 몽골 궁궐에 들어간 김황후는 처음에는 카이산 황제의 후궁이 되고, 다음 황제인 아유르바르와드 때는 더 높은 후궁이 되고, 예순 테무르 황제 때는 황후의 반열에 올랐다. 이때 그는 제1황후가 아니라 여러 황후 중 하나였다. 어쩌면 김황후가 닦아놓은 이런 발판이 있었기에 훗날 기황후가 제1황후가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황후'처럼 출세한 공녀들... 그 뒤에는 이런 정치적 목적이
김황후와 기황후를 비롯한 고려 여인들이 몽골 궁궐에서 두각을 보인 데는 정치적 이유도 있었다. 고대의 군주들이 궁녀와 환관을 충원한 근본 동기 중 하나는 귀족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수적으로 열세인 군주가 다수의 귀족에 맞서는 길은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궁녀와 환관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귀족과 연이 닿는 사람들을 궁녀·환관으로 충원하면, 이들이 귀족과 결탁할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통치자들은 가급적 하층민 출신의 궁녀·환관을 선호했다. 권력과 거리가 멀어야만 사심 없이 군주를 보좌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공노비 중에서 궁녀를 선발한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것이다.
몽골이 고려 궁녀를 선호한 것도 동일한 이유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몽골처럼 수많은 민족을 지배하는 대제국에서 몽골족은 제국 전체의 지배층이다. 그래서 몽골족 궁녀·환관은 몽골족 내부에서는 하층민일지라도 제국 전체적으로는 지배층에 속한다. 그래서 이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몽골 황제보다는 귀족들의 편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문제점을 보완하는 방법은, 제국 내의 소수민족이나 이웃나라에서도 궁녀·환관을 데려오는 것이었다. 소수민족이나 이웃나라 출신은 몽골 지배층과의 연줄이 없기 때문에,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몽골 황제에게 절대 충성을 바칠 확률이 높았다. 몽골 황궁에서 고려인 궁녀·환관을 선호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동일한 현상은 몽골뿐만 아니라 아바스(혹은 압바스, 750~1258년)나 오스만(혹은 오스만투르크, 1299~1922년) 같은 대제국에서도 나타났다. 지금의 이라크를 중심으로 이슬람세계를 지배한 아바스나 지금의 터키·발칸반도를 중심으로 이슬람세계를 지배한 오스만은 몽골처럼 여러 민족을 거느린 대제국이었다.
<아라비안나이트>로도 불리는 <천일야화>에는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이슬람세계의 최고 지도자)가 사는 궁궐에서 아프리카인 궁녀나 환관들이 근무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참고로, <천일야화> 같은 소설은 등장인물이나 사건 자체는 허구이지만, 아바스 왕조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역사학에서 사료로 이용되고 있다. 또 오스만의 술탄(황제)이 사는 궁궐에도 아프리카인 혹은 유럽인 환관들이 많았다.
칼리프나 술탄이 이민족을 궁녀·환관으로 삼은 것은 자기 나라에서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을 수족으로 이용해야만 권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경우, 아프리카인 궁녀들도 자국에서 공녀로 징발되거나 사적으로 매매된 뒤 아바스나 오스만의 궁녀가 됐으니, 고려 공녀들과 같은 처지였다고 할 수 있다.
김황후나 기황후 같은 고려 공녀들이 몽골에서 출세한 것도 위와 같은 정치적 속성 때문이었다. 몽골 황제들이 몽골 귀족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외국인 궁녀·환관을 선호하는 분위기 속에서 고려인 공녀의 일부가 후궁·황후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것이다. 대부분의 고려 공녀들은 몽골에서 힘겨운 나날을 보냈지만, 일부 고려 공녀들은 이 같은 정치적 속성 때문에 입지전적 출세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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