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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에 시집온 밀양 할매가 송전탑과 맞서는 이유

[밀양을 살다③] 서로간의 울력으로 살아가는 주민들의 이야기 <밀양을 살다>

등록|2014.05.10 11:20 수정|2014.05.12 17:52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을 하는 주민들의 삶을 담은 책 <밀양을 살다>가 출간되었다. 농사 짓고 밥을 나눠 먹고 가족의 안녕을 염려하는 이들의 평범한 이야기, 그러나 국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파란만장한 이야기. 이들의 이야기는 침몰해 온 한국사회의 모습을 증언한다. 그리고, 그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만들어야 할 '사회'는 무엇일지 스스로 보여준다. 책이 전하는, 밀양을 함께 살 사람들을 기다리는 목소리에 대한 응답을 들어보자. 그리고 응답하자. 이 연재는 밀양구술프로젝트와 오마이뉴스 십만인클럽이 공동으로 기획했다 [편집자말]
태어나서 지금까지 서울 도심에서만 살았던 나는, 사실 '우리 마을'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다. 그나마 '우리 동네'라는 느낌을 받았던 시절은 서울 종로구의 '원서동'에 살았던 때다. 지금은 '북촌'이라고 불리는 일대의 동네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던 지역으로 기억하고 있다.

창경궁 옆길을 따라 올라가면 중앙중고등학교로 넘어가는 작은 언덕배기에 우리집이 있었다. 지금은 그곳의 모습이 많이 변했지만, 내가 어린이였던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두루마기를 걸치고 흰 수염을 늘어뜨린 채 입에는 곰방대를 문 할아버지들이 골목을 다니셨다.

이곳에서 '우리 동네'라는 느낌을 받았던 건 동네에서 '삶'을 꾸려가는 주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은 멀리 다른 동네로 출퇴근을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많은 주민들이 동네에서 함께 일을 하고, 관계를 맺으며 살았다. 여자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옷에 붙이는 상표 겸 가격표 종이에 실을 매달거나 봉투 붙이기, 인형 눈 꿰매기 등의 부업을 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김장을 하거나 장을 담그고 이불 홑청을 꿰매는 등의 일을 다같이 모여서 하기도 했다.

멀리 회사나 공장에 나가지 않는 남자들도 동네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했다. 지붕 끝에 달린 함석 챙을 고치거나 기왓장을 바꾸는 일, 새로 생기는 한옥 공사에 일손을 보태거나,  전기, 하수도, 화장실 고치는 일은 서로 오가며 돈을 받고 했던 일이다.

이렇게 한 동네에서 일하고 서로 관계를 맺다 보니 '동네'란 당연히 주민들의 삶과 한 덩어리나 마찬가지였을 터이다. 하지만 동네에서 일하며 살던 분들이 차차 돌아가시고, 빌라들이 들어서면서 골목길이 하나 둘 사라질 무렵, 예전의 관계들은 더 이상 유지되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 가족 역시 그 즈음 멀리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했다.

이들에게 '밀양에 산다는 것'이란

▲ <밀양을 살다> 책표지. ⓒ 오월의봄


<밀양을 살다>를 읽으며 문득 내가 살았던 옛 동네를 기억하게 된 까닭은, 이 책이 담고 있는 주민 열다섯 명의 이야기 때문이다. 이들이 지키고 있는 마을의 산과 들이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됐기 때문이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다른 지역에서 일하고 관계 맺으며 보내는 사람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땅인 아스팔트와는 특별히 주고 받을 것이 없고 햇빛과 물과 바람도 그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불과한 도시 사람들에게 집이나 땅, 동네란 주로 화폐로 환산되는 가치일 뿐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 자신이 터전 삼고 먹거리 얻고, 그 땅의 생명체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것들을 통해 자신과 가족, 마을 사람들의 삶을 연결해 온 이들에게 땅과 마을은 다른 차원의 의미를 지닌다. 이들에게 밀양의 산길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사람에게 시집가던 길이고 죽을 것 같은 가난을 이겨내며 농사를 짓고 나무를 해다가 장터로 나르던 길이다.

건강을 찾아, 조용한 삶을 찾아 밀양을 찾은 이들에게도 이 동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 돼 버렸다. 매일 이곳을 지나는 햇빛, 바람, 공기, 눈과 비도 어느 한 순간 허투루 지나가는 법이 없다. 밀양에서 만난 주민들 서로의 삶이 굽이굽이 엮여 있다.

이들은 이렇게 일생 동안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의 모든 것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온 것이다. 그래서 도시에서 흔히 사고파는 집이나 땅과는 달리, 이 모든 것들은 돈이나 다른 무엇으로 쉽게 환산할 수가 없는 것들이다. 수천만 원, 아니 몇 억의 돈을 준다한들, 무엇을 대신해 주겠다 한들 이 삶을, 구구한 이들의 역사를 대체할 수 있을까. 이들이 평생 동안 밀양의 땅과 나무, 온갖 풀들과 크고 작은 생명체들, 햇빛과 물과 바람과 맺어 온 소중한 관계들을 대신해줄 수 있을까.

가부장사회를 버틴 땅과 사람의 울력

▲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주민들은 '신고리-북경남 765kV 송전선로' 127번 철탑 현장에 움막 농성장과 '무덤 구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사진은 손희경, 곽정섭 할머니가 움막 안에서 산나물을 손질하는 모습. ⓒ 윤성효


이 책에서 밀양의 주민들은 '울력' 이야기를 많이 한다. '울력'이란 농촌에서 마을 주민들이 특별한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무보수로 다른 사람의 농사일이나 경조사 등을 도와주는 것을 말한다. 특히 밀양에서 일제와 전쟁이라는 혹독한 시대를 건너온 '할매'들에게 이 '울력'은 숱한 고생과 가난 속에서도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해주었던 가장 중요한 힘이었다.

왜놈들이 '처녀 빼간다는 소릴 듣고', '신랑 맞췄다'는 어른들 말에 따라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남자에게 열일곱 나이에 시집을 온 후, 여든 여덟이 되도록 밀양에서 온갖 고생을 겪으며 살았던 도곡마을의 조계순 할매는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이 아무리 부자라도예 남의 도움 없이는 못 삽니더. …싱크대가 우예 된다, 보일러가 우예 된다, 그걸 돈 주고 할라 캐도 여기 기술자가 있노, 뭣이 있노? 다 이 주위에서 봐줘가지고 그리 잘 삽니더. 사람이 다 울력으로 삽니더, 울력으로예."

그런가 하면, 열일곱에 대종부 집에 시집을 와서 시부모님 3년 상을 다 지내야 했던 위양마을의 희경 할매에게는 고된 시집살이가 '울력'으로 표현된다. 매끼 아버님, 어머님, 시아주버님, 형제들 등 식구마다 각상을 차려야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오는 손님들 탓에 밤낮으로 술상, 밥상을 차리며 살아야 했던 희경 할매는 "여자들 사는 거는 매양 같애요. 보통 울력으로는 어데 댈기도 아닌 기라" 하신다.

그리 고된 삶에서 여자들끼리의 울력은 어디에도 비할 데가 없는 생명줄 같은 관계가 된다. 험한 시절에 보도연맹 사건으로 생사도 알 길 없이 남편을 잃은 도곡마을의 김말해 할매에게 시백모님은, "죽어서 저승 가면 우리 서방님 만난다 캐도 같이 안 살 끼고 우리 시백모님이랑 살 끼다"라고 할 정도로 소중한 울력으로 맺어진 관계다.

사람과 사람 관계만이 아니다. 자연과 사람도 울력으로 맺어진다. '엄청 잘 해주던' 남편을 사고로 잃고 병에 걸렸다가 밀양에 와서 건강을 찾은 평밭마을의 이사라 할매는 나무도 하고, 고추도 심고, 병아리와 염소를 키우면서 이들과 울력을 나눴다. 염소 이야기, 칡넝쿨 냄새 이야기를 하며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듯 이야기하는 이사라 할매는 자신에게 건강과 먹거리를 주고, 아쉬울 것 없는 행복을 준 산을 위해, 그렇게 울력으로 관계 맺은 모든 생명들에게 자신의 울력을 다 하기 위해 송전탑에 맞서 싸운다.

"생명도 연장이 됐고 건강도 주고, 돈도 뭐 아쉬워 하지 않게 다 도와주고 온갖 맛있는 거 다 주고. 30년 동안 그 아름다운 것을 배우고 살았고, 진짜진짜. 어떻게 그걸 말로 다 하겠어. 한 번도 갚지도 못하고… 이 산을 위해서 어떻게 보람된 일을 해야 하는데, 이 맘밖에 없어."

할매들에게는 이런 울력들이야말로 지독한 가부장 사회의 틈새였던 셈이다. 그래서 밀양의 할매들에게 송전탑에 맞선 싸움이란, 고난을 버텨 온 할매들의 삶을 지키는 싸움이고, 억울했던 지난날의 부당한 권력과 폭력들, 참고 살아왔던 그 억압의 삶을 스스로의 힘으로 끊어내고자 하는 투쟁이다. 하기에 더욱 쉽게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싸움은 내 한 몸, 내 땅 마지기 지키겠다는 싸움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을 죽이고 관계를 무너뜨리는 핵발전과 송전탑

결국 송전탑을 세우기 위해 땅을 파내고 콘크리트를 붓고 산을 파헤치는 그 모든 폭력들은, 평생 그 땅과 함께 살아 온 할매들과 밀양의 주민들에게 가슴 한켠을 뚫는 일처럼 느껴질 테다.

사실 핵발전의 모든 과정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저 멀리 다른 나라의 광산에서 우라늄을 채굴해 오는 과정에서부터 독성 진흙으로 땅과 물을 오염시키고, 여기에 사는 생명체들과 직결되어 살아가는 주민들의 생명을 위협한다.

우라늄 광산의 노동자는 원인 모를 폐암으로 죽어가고 주민들도 암으로 죽어간다. 그럼에도 초국적 광산 기업들은 자신들이 그곳을 개발해 주고 일자리도 주고 있지 않느냐고 큰 소리를 친다. 원자로에서 나오는 뜨거운 온배수는 해양 생태계를 망가뜨리고,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일반인보다 연간 누적 피폭량이 100배가 넘는 위험을 감당하며 일을 한다.

현 세대를 살고 있는 그 누구도 안전을 절대 장담할 수 없는 핵 폐기물을 떠안아야 하는 것도 소외 지역, 제3세계의 주민들이다. 이미 널리 알려졌다시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일본에서는 노숙인들이 사고 수습 인력으로 투입되기도 했다. 송전탑이 세워지는 곳곳에서도 동물들과 사람들이 병들고, 식물들은 제대로 살아내지를 못한다.

숱한 생명들이 죽어나가고, 삶이 파괴되고, 자연과 함께 의존하며 살아가던 관계들이 무너진다. 어려울 때 서로 돕고, 억압의 틈새에서 만나던 공동체의 관계들이 산산이 파괴된다. 그럼에도 그 엄청난 위험과 파괴의 고통을 감당하는 대가로 핵발전의 권력자들과 자본이 내미는 것은 '개발', '발전'과 같은 명분들, 알량한 일자리와 보상금 같은 것들일 뿐이다.

자연을 정복하고 여성을 정복하는 것이 발전이고 문명이라고 설파해 온 자본주의 가부장체제의 논리는 덜 개발된 지역, 자연과 관계맺는 삶, 다른 종류의 가치가 존재하는 공동체를 파괴하고 점유하는 것도 당연시한다. 그래서 밀양의 싸움은 단지 밀양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다. 함부로 파괴되고 전유되어도 된다고 여겨지는 삶, '다른 가치'를 지키기 위한 싸움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위험과 파괴가 과연 밀양 주민들의 몫으로 끝나게 될까? 생명보다 이윤이 먼저인 이 끔찍한 시스템 때문에 세월호의 아픔을 겪었고, 결국 그것은 밀양의 아픔과 연결되는 것 아닌가. 그러니 결국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함께 싸워야 할 몫이 아닌가. 동화전마을 박은숙님의 이야기가 마음에 오래도록 남는다.

"옛날에도 내가 정치는 쇼인 건 알았거든예. 근데 이걸 하면서 완전히 쇼인 걸 제대로 알았어예. 그니깐 정부에서도 너거는 뒤지봐라, 뭐 이런 거 같아예. …우리가 송전탑을 세운 걸 뽑아낸다거나, 아니면 지금 중단을 시킨다거나 뭐 이런 힘은 없는 거 같애요. 근데 이걸 함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한테 송전탑이 얼마나 잘못됐고 뭐 이런 거를 알릴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거 같애요. 그래서 우리 밀양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이런 일이 있다면 더 잘 싸우지 않을까… 우리가 끝은 아닌 것 같으니까."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나영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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