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일록은 왜 1파운드의 살을 도려내려 했는가
[김성호의 독서만세③] <베니스의 상인>
▲ 베니스의 상인펭귄클래식코리아에서 나온 <베니스의 상인> 표지 ⓒ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년 국내 거주 외국인 수가 100만 명을 넘어선 이래 올해에는 150만 명에 육박하는 등 매우 빠른 속도로 한국에서 살아가는 외국인 혹은 외국인이었던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국내노동인구의 고령화와 3D업종 기피, 농촌지역의 남초현상 등은 필연적으로 이주노동자의 유입과 국제결혼의 증가로 이어졌고 어느덧 우리사회는 다문화사회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다양한 인종, 민족적 집단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다.
하지만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이주민이 늘어나면서 생겨난 문제들도 적지 않다. '한민족은 단일민족'이라는 믿음 아래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켜온 교육의 영향으로 다른 생김새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우리와 같은 대한민국사람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편견이 대표적이다.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후진국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일부의 못된 풍조와 이로 인한 사회적 갈등 등은 선진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은 이처럼 다문화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입한 우리 사회에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 희곡은 당대 영국사회에 만연해 있던 유태인에 대한 반감이 반영되어 잔인하고 돈만 밝히는 유태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라는 인물을 탄생시킨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포오셔라는 현명한 여인의 판결을 통해 정의로운 기독교도인 앤토니오가 위기에서 벗어나고 그를 죽이려 했던 샤일록은 파멸하게 된다는 권선징악적인 내용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 희곡을 찬찬히 뜯어보면 선한 인물로 그려지는 앤토니오와 밧사니오, 포오샤 등이 유태인과 유색인종, 비기독교도에 대해 매우 차별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샤일록에게 돈을 빌리러 간 앤토니오의 모습이나 유태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기독교도 인물들의 대사, 그리고 모로코의 귀족을 대하는 포오샤의 태도 등에서 매우 잘 나타난다.
이자를 받지 않고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어려움에 처한 친구를 위해 헌신하고 아버지의 유언을 충실히 따르며 남편에게 순종하는 등 매우 훌륭한 인격을 가진 것처럼 그려지는 인물들이 위와 같은 상황에서 보이는 이중적인 행태는 실로 충격적이다. 그리고 이런 장면들을 보고 있자면 자연스레 어떤 의문이 솟아오른다. '어쩌면 셰익스피어는 유태인에 대한 반감이 만연하고 그들을 배척했던 당대의 문화풍토를 비판하려는 의도에서 이 희극을 쓴 것은 아닐까?'
이런 추측은 모로코의 영주가 포오셔를 얻기 위해 금, 은, 납으로 된 함 중 하나를 선택하는 제2막에서의 묘사를 보면 더욱 잘 드러난다. 여기서 모로코의 영주는 포오셔에게 청혼하러 온 다른 귀족들과는 달리 인성적인 하자가 전혀 없으며 당당하게 사랑을 고백하고 적극적으로 선택하며 비록 틀렸을지라도 그 선택의 결과에 기꺼이 책임을 지는 멋진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를 대하는 포오셔의 태도는 앞에서는 점잔을 빼지만 뒤에서는 "쉽게 떼어버렸네. 커튼을 치고 들어가자. 그 분 같은 얼굴색을 한 사람은 다들 그렇게 골라줬으면"하고 말할 만큼 위선적이며 비겁하다. 이는 희곡 전반을 가로지르는 포오셔의 충실하면서도 진취적인 성격과는 배치되는 모습으로 작품 전체에 있어 그녀는 오직 피부색이 다른 모로코의 영주와 민족과 종교를 달리하는 샤일록에게만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포오셔와 앤토니오 등이 자신과 다른 인종 및 문화집단에 속한 사람들에게 보이는 이중적이고 적대적인 태도를 묘사하여 당대 영국사회에 만연해있던 유태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척과 반감을 비판하려한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돈을 갚지 못했다는 이유로 1파운드의 살을 도려내려는 샤일록의 잔인함과 앤토니오에 대한 연민, 포오셔의 현명함, 밧사니오의 우정, 그리고 그들의 사랑만을 보고 유태인 고리대금업자라는 이유로 앤토니오에게 멸시당해 온 샤일록의 분노를 보지 못한다면 이 작품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 극으로부터 종교가 다르고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온갖 차별을 받고 자신의 전부였던 재산마저 모두 빼앗겼으며 종교마저 강제로 개종당한 샤일록의 비애를 우리는 읽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사회에 더는 샤일록과 같은 불행한 인물이 나오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만약 앤토니오가 유태인들의 삶의 방식을 어느정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면, 샤일록이 앤토니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면, 그리하여 서로의 살을 베고 종교를 개종시키는 소모적인 싸움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만약 그럴 수 있었다면 이야기는 전혀 다른 모양으로 전개되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나는 이 작품의 진정한 주제가 관용이라고 생각한다. 자기와 다른 타인의 모습을 허용하고 자기의 사상이나 신조를 타인에게 강제하지 않는 관용이야말로 이 이야기 속의 갈등은 물론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다름으로 인한 문제들을 보다 근본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열쇠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문화사회에 접어든 우리사회가 더없이 현명했던 포오샤의 판결보다도 아름다운 방식으로 서로 간에 쌓인 갈등을 해소하고 화합과 공영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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