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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살 당한 할아버지... 아버지는 배고픈 9살이 됐다

현기영 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읽고 제주를 가다

등록|2014.05.16 18:16 수정|2014.05.16 18:16
세월호의 아픔 속에서 '미개한' 시민의 처지로서 현기영의 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읽다가 이런 구절을 읽는다.

'그래서 일손이 모자라는 어머니를 도울 때마다 나에게도 똑같은 운명의 굴레가 씌워진 게 아닐까, 불안한 생각이 들곤 했다. 일출과 일몰, 계절의 순환에 순종하며, 하늘에 해 박힌 날이면 밭이랑을 타고 흙벌레처럼 기어다니고, 비 오는 날이면 헌 옷 깁거나 맷돌질 하는 것이 어머니의 삶이었다. 그것은 자연 발생적인 삶이었고, 학교 교육은 그것을 미개한 삶이라고 가르쳤다. ' – 현기영 (지상에 숟가락 하나) 중에서

2008년에 현기영 작가의 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가 국방부 불온도서로 선정되었을 때, 호기심에 사서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초반에 4·3에 대한 묘사가 잔혹하여 제주도민 출신인 나를 우울하게 만들어 책을 덮어 버렸다.

그러다가 몇 년이 흘러 내가 하는 독서모임에서 제주문학기행을 하기 위한 작품을 고르다 보니 4·3을 빼고는 제주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시 펼친 책이 이 책이다.

내 할아버지는 4·3 당시 총살 당했다

▲ 제주 4.3 평화공원에 있는 모자상 ⓒ 조은미


책의 초반부 작가가 예닐곱 살 먹을 때까지 4·3에 대한 묘사를 제외하고는,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제주도의 자연 속에서 잘 자란 현기영의 성장소설이요 회고담이었다. 책장을 덮으며 정갈하고 담담한 감동을 느꼈다. 작가 유년의 빈궁하나 아름다운 시절이 나의 유년과 겹치며 은은한 미소를 짓게 한다.

내 할아버지도 4·3 당시 총살을 당해 생을 마감했으니 나 역시 4·3 유가족의 자손인 셈이다. 1940년생인 우리 아버지는 1941년생인 현기영 작가와 거의 동년배이며 4·3이 터졌을 때는 9살 정도였겠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내 아버지는 할머니가 하루하루 남의 집 허드렛일을 도와주고 얻어오는 밥으로 연명을 하거나 굶기를 밥 먹듯이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른이 되어서도, 일곱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고서도 일단 밥이 나오면 당신 먼저 허겁지겁 배를 채우는 것이 평생의 습관이셨다.

할아버지가 죽음을 당했을 때의 이야기를 이번에야 어머니를 통해 제대로 들었다. 내 고향은 제주도 중산간 마을인 낙천리인데, 4·3 당시 해안선에서 5km 떨어진 제주도 모든 지역에 소개작전이 펼쳐지고 그 안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모두 폭도로 간주했다니, 내 고향마을 사람들도 폭도나 폭도를 도운 사람이 되는 셈이다. 우리 어머니도 역시 낙천리 출신이고, 외할아버지를 통하여 당시 사건을 들었다고 한다.

어느 날 경찰이 마을 주민들을 전부 학교 운동장에 모이게 집합을 시켰다. 그리고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연설을 시작했다.

"너희들 중 산에서 내려온 폭도들에게 밥을 지어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 이해한다. 그들이 총칼을 들이대며 쌀을 내놓으라고 하는데 어떻게 거부할 수가 있나. 그러니 폭도들에게 양식을 대줬다고 해도 이해가 된다. 그러니 양식을 대준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 나오는 사람만 살려주고 나머지는 살려줄 수 없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일부 사람들이 앞으로 나갔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자리를 지켰다. 실제 폭도에게 양식을 준 적도 없는 사람들도 있는 터라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앞으로 나오는 사람이 적자, 그 우두머리가 다시 말을 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점심을 먹으러 갈 거다. 우리가 밥을 먹고 오는 동안 잘 생각해라. 자백하고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만 살려줄 것이다. 잘 생각해라."

그렇게 말을 하고 자리를 떴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앞으로 나가야 살려준댄 햄수게. 우리 다같이 나갑시다. 그럽시다. 고치 (같이) 나가게마씸."

그렇게 웅성거리며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나갔다. 점심을 먹고 돌아온 경찰들이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러면 그렇지."

어디선가 트럭이 몇 대 나타나고 앞으로 나갔던 사람들은 모두 일렬로 트럭에 태워졌다. 그들은 모두 한 곳으로 실려가서 한 번에 총살을 당했다. 29세의 시골 청년이던 내 할어버지도 그 중 한 분이었다.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 제삿날에는 동네에 제사가 많다. 모두 한날 한시에 같이 경찰의 총을 맞은 사람들이다.

"아버지, 4·3은 어떵 된 거우꽈?"

내가 1991년도에 대학에 들어갔을 때 딸을 서울에 있는 사립대학에 보낸 아버지는 어렵게 등록금을 마련해 간신히 보내셨다. 그러다 보니 종종 아버지와 통화하는 일이 있었다. 무슨 계기였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데 한 번은 통화하다가 "아버지, 4·3은 어떵 된 거우꽈?(어떻게 된 겁니까)"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 때 아버지는 버럭 역정을 내셨다. "허튼 말 마랑 공부나 허라." 그 이후로 한 번도 물어보지 못했다가 세월이 흐르고 흘러 4·3 진상 규명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민들에게 국가를 대신해 사과를 하고, 한명숙 국무총리가 4·3 기념일에 추모 연설도 했다.

그때 아버지는 내게 먼저 전화를 거시고, 총리가 와서 연설하는 현장에 와 있다며, 흥분하신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작년엔가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오토바이를 타시다가 얼굴을 심하게 다쳤을 때는 4·3 유가족이라 병원 할인을 받는다고 히죽 웃으시며 말씀하시던 기억이 난다.

내가 독서모임 회원들을 데리고 4·3 문학 기행을 가자고 제안하고서, 또 15명이나 되는 회원들이 가겠다고 선뜻 나섰을 때 내 염려는 내가 제주도에서 나고 자랐지만 역사도 배경도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나도 한번 공부해 보면 되겠다는 마음으로, 내가 잘 모른다고 우리 회원들이 나를 탓하지는 않으리라는 마음으로 여행을 감행했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고 회원 중 두 사람은 애도 기간이라며 제주 여행을 취소했기에 더욱 주저됐다. 그 꽃같이 아름답던 아이들이 제주도에 대한 기대를 품고 배를 탔고 떼죽음을 당했는데 내가 이 시기 제주도를 갈 수 있을까… 그럼에도 제주도의 아픈 역사에 대한 이해를, 내가 하고 또 내 아이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에 길을 나섰다. 지난 9일부터 12일까지의 여정이었다.

▲ 제주 4.3 평화 공원에서의 역사 설명 ⓒ 조은미


4·3 평화공원 안내를 맡아주시던 선생님도 세월호 얘기를 꺼내셨다. 4·3이 현재진행형이란 말씀도 하신다. 4·3의 비극은 친일파를 청산하지 않은 역사적 과오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하셨다.

일제 강점기 제주도 인구가 25만 정도일 때 주둔 일본군은 6만. 1945년 그들이 패망하고 달아날 때까지 제주도에도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사람들을 괴롭혔다. 일본군이 철수하자 친일파 잔당들은 처벌 받을까봐 처음엔 몸을 사렸다.하진만 이어진 미군정 치하에서 친일파들은 우선 등용됐다. 일본 헌병 앞잡이 노릇하던 이들은 다시 경찰이 되었다. 1947년 3·1절 기념 행사에서 구경 나온 아이가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치었고 성난 군중들은 돌멩이를 던졌다. 이를 보던 다른 경찰들이 폭동으로 간주해 총을 쏘고 여섯 명의 아이와 여자들이 죽었다. 이것이 1948년 4·3으로 가는 도화선이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9살 어린 아이로 떠오른다

4·3 이야기를 들으니 5·18 광주항쟁 생각도 난다. 선량한 시민들이 국군의 총을 맞아 무수히 죽었는데, 그 명령을 내린 살인마 전두환은 지금도 떵떵거리고 잘 살고 있지 않은가. 이게 제대로 된 나라인가. 역사에서 과오를 저지른 이들이 처벌받지 않았기에, 권력 상층부에 그들은 기생하고 있고, 사회는 권력과 돈을 가진 자 중심으로 돌아가다 보니, 오늘날 세월호의 참사가 생긴 것이 아닌가….

제주 올레 7코스 강정마을을 지나 걷는 올레 7코스 ⓒ 조은미


우리들은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제주 올레길 7코스 일부를 걸었다. 출발은 강정마을에서 했다. 현기영 작가는 4·3과 강정은 같은 맥락이며 4·3은 인간이 학살당했다면 강정은 자연이 학살당한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4·3이 아픔이 채 가시지도 않은 제주도에 '민군복합관광미항'이란 현란한 이름 하에 해군기지가 건설되고 있다.  

이번 제주도 여행 때는 아버지에게 전화도 드리지 못했다. 내려갈 예정이라고 '가게 되면 한번 보게 마씸'하고 전화했었으나 정작 제주도에 가서는 바쁜 핑계로 전화도 못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좋은 추억이 거의 없다. 오히려 아버지는 내 유년기에 그늘을 드리운 분이셨다. 사소한 잘못에도 불같이 역정을 내고 때리기를 잘해서 아버지 앞에만 서면 무서워서 말을 더듬을 정도로 어린 시절 내내 힘들었다.

나는 내 목구멍 안에 가득 고인 언어들을 어떻게 꺼내야 하나, 자음과 모음 사이, 단어와 단어 사이에게 힘겨운 호흡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니 아버지에 대해 그다지 정이 있을 리가 없다. 지금도 내가 용돈을 보내드렸다고 전화할 때만 목소리가 높아지고 밝아지는 아버지. 야속한 마음이 한 켠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4·3 이야기를 듣고 나니, 아버지가 9살의 어린 아이로 떠오른다. 늘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찾던 아이 말이다.

이번 4·3 문학기행은 나에게는 아버지를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야만의 역사 속에서 그 역시 피해자였다. 이제 노년의 쓸쓸함과 외로움만 남은 아버지에게 조금 더 따뜻한 위로를 주는 딸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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