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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라도 '아주 늦은 때'는 없다!

[중국어에 문화 링크 걸기 73]

등록|2014.05.19 14:51 수정|2014.05.19 14:52

늦을 만(?)은 해(日)가 투구를 쓴 모습이니, 맹렬하던 한낮의 태양이 그 빛을 누그러뜨리는 ‘석양녘’, 하루 중 늦은 때를 의미하는 셈이다. ⓒ 漢典


거친 황야에 사는 양(羊)은 새벽 일찍 풀을 찾아 나선다고 한다. 이슬에 젖은 풀을 먹어야 부족한 수분을 보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가 떠올라 풀에 맺힌 이슬이 증발하면 아무래도 수분 보충이 부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도 이슬이 증발하기 전에, '아주 늦기 전'에 서둘러야 하는 일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꽃이 보고 싶은 순간에 꽃씨를 뿌리는 것이 꼭 아주 늦은 것만은 아니다. 꽃씨를 뿌리지 않아 영영 꽃을 볼 기회를 만들지 못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15세기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한창이던 시절, "내일 세상이 멸망함을 알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말이 유행했나 보다. 마르틴 루터의 어록에도, 200년이 지난 스피노자의 어록에도 이 말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한 세상의 멸망이나 어떤 조건에 관계없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니 만큼 어느 때고 아주 늦은 때는 없는 셈이다.

당나라 시인 왕발(王勃)이 <등왕각서(滕王閣序)>에서 "젊은 날은 이미 지났어도, 만년이라고 해서 아주 늦은 것은 아니다(東隅已逝, 桑楡非晩)"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늦을 만(晚, wǎn)은 의미부 해 일(日)과 소리부 면할 면(免)이 합쳐진 형태이다. 해가 동우(東隅)에서 떠올라 상유(桑楡)로 지기까지의 공간이동을 시간개념으로 인식한 흔적이 엿보인다. '면(免)'은 금문에서 투구를 쓴 사람의 모습인데, 투구가 전장에서 위험을 면하게 해준다는 데에서 의미가 기인한 것이다. '만(晩)'은 해(日)가 투구를 쓴 모습이니, 맹렬하던 한낮의 태양이 그 빛을 누그러뜨리는 '석양녘', 하루 중 늦은 때를 의미하는 셈이다.

중국어에서 사용되진 않지만 우리말에는 때가 늦어서 어떤 기회를 놓쳐버린 안타까움을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또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도 있다.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처럼 뒤늦게라도 자신의 빛깔과 재능을 멋지게 펼쳐놓는다면 그 또한 충분히 아름다울 것이다. 

큰 그릇은 늦게 이뤄진다는 대기만성(大器晩成)이란 말은 오랜 시련과 아픔을 딛고 이뤄낸 성공이 더 값지고, 그 의미가 더 크다는 함의를 담고 있을 것이다. 봄에 일찍 피는 매화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늦가을에 피어나는 들국화 또한 향기롭고 아름답다. 늦었다고 포기하거나 너무 서두를 필요 없이, 이제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길에 묵묵히 나서면 된다. 그것이 언제라도 아주 늦은 것은 아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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