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들 "대통령이 낯설다...눈물도 못 믿겠다"
[아이들은 나의 스승 ⑫] 대통령 담화에 대한 고등학생들의 반응
▲ 박근혜 대통령이 19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세월호 참사 관련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 청와대
대통령이 파격적인 '국가 개조'의 청사진을 내보였지만, 국민들의 반응은 그다지 호의적인 것 같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관련 대국민 담화 발표 이틀 뒤인 지난 21일, 학교에서 두 학급을 대상으로 이런 수업을 진행했다. 세월호 참사 관련 계기수업이라기보다는 그냥 올해 담당한 사회 교과 수업의 일환이다. 이름하여 '나라면?' 수업. 입장을 한 번 바꿔보자는 취지다.
24분짜리 박근혜 대통령 담화 영상을 함께 보고, 자신이 유가족이라면 어떻게 느꼈을지, 또 대통령이었다면 어떻게 말했을 것인가를 발표해 보고 서로 의견을 나눠보자는 거였다.
"대통령, 다른 별에서 온 사람처럼 낯설었다"
생방송은 아니었지만, 졸거나 딴청 피우는 아이가 하나 없을 만큼 영상에 집중했다. 여느 수업 시간에는 보기 어려운 초롱초롱한 눈빛이었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자연스럽게 대통령의 사과에 대한 아이들의 다양한 '품평'이 쏟아졌다.
수백 명 또래 아이들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에 대한 슬픔과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마당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일 리 없지만, 그렇다고 막무가내의 반감과 증오만을 드러내진 않았다.
어떤 부분에서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말미에 대통령이 사망자의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고 눈물을 보일 때는 함께 눈물이 그렁그렁해지기도 했다.
다만, 아이들도 '만시지탄'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따가운 비판을 순간 모면하려는 '포퓰리즘'이자 '악어의 눈물'일 뿐"이라며 대통령의 사과를 '폄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쏟아낸 아이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본다.
"대통령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어요. 마치 다른 별에서 온 사람처럼 말이죠. 나이로 보면 희생된 아이들이 대통령의 손자뻘 될 텐데, 외할머니 같은 자상함도, 하다못해 이웃 같은 정겨움조차도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제 주변에선 도저히 만나볼 수 없는 그런 사람 같았어요. 만약 선생님들이 저런 표정이면 수업 시간이 정말 무서울 것 같아요."
"솔직히 '짜고 친 고스톱' 같았어요. 24분짜리 대본을 마치 배우처럼 외워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거든요. 수많은 기자들의 질문을 받지 않은 것도 그래서 아닐까요. 그래선지 말미에 흘리신 눈물도 잘 연습된 '연기'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해체니, 국가 개조니, 엄벌이니 하며 단호함을 줄곧 내보이시다가 갑자기 굵은 눈물을 쏟아내시니 솔직히 당황스럽더라고요."
"저는 대통령의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듯한 인상을 받았어요. 카메라를 응시하는 눈빛과 입모양이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느낌이었거든요. 자기가 직접 담화문을 쓴 게 아니라, 누군가 대신 작성한 것을 넘겨받아 연습을 하려다 보니 생긴 어색함이라고나 할까요? 듣자니까 대통령의 옛날 별명이 '수첩 공주'였다면서요?"
"영상을 보고 새롭게 깨달은 게 있어요.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은 '전지전능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거죠. 아직 재판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도망친 선원들을 살인 행위로 못 박아 버리고, 정부 기관을 하루아침에 없앨 수도, 새로 만들 수도 있는 '권능'을 과시했으니, 대통령이라기보다 차라리 '여왕'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수습되지 않은 실종자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데,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도 없다는 게 이상해요. 실종자 유가족들이 들으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요. 국민들 모두가 아직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달고 있는데, 대통령은 이미 그들을 포기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모르긴 해도, 담화문 어딘가에 적혀 있었는데, 무작정 외우다 깜빡 하신 거라고 봐요."
"시작하자마자 모든 게 대통령의 책임이라고 고개를 숙였으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책임지겠다는 건지는 한마디도 없었잖아요. 청와대 개혁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해경을 해체하겠다고 선언하는 건 앞뒤가 바뀌었다고 봐요. 대통령이 책임지겠다면 하다못해 한두 달 치 봉급이라도 반납하겠다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과묵한 저희 아빠도 우스갯소리를 하시더라고요."
"친한 사촌 형이 지금 서울 노량진에서 해경 공채 시험을 준비해왔는데, 헛공부한 꼴이 됐다며 '멘붕'이 왔다더군요. 그래도 해경에 문의만 할 뿐, 대놓고 불만을 표출할 수도 없어 미치겠다고 하더라고요. 자칫 국가가 상중인 마당에 이해득실만 따진다고 국민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을까 싶은 거죠. 속앓이가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더라고요."
"세월호를 잊는 건, '의리'를 저버리는 짓"
또래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이번 참사는 '양순한' 고등학생 아이들을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했다. 뭘 해도 무기력하기만 하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거다. 노란 리본과 시위 팻말에 가장 많이 적힌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글귀는, 이제 모든 아이들이 공유하는 다짐이 됐다. 맹목적인 대학입시 공부에 회의를 갖기 시작한 건, 차라리 덤이다.
지난 주말, 한 아이가 "친구들과 분향소에 다녀오고 싶다며 차 좀 태워 달라"고 부모님께 부탁했단다. 그런데, "그럴 시간 있으면 공부나 해라"는 엄마의 말에 격분해 이렇게 따져 물었단다.
"엄마가 말하는 공부란 대체 뭐야? 내가 죽었는데, 다른 엄마가 그렇게 말했다면 어떻겠어?"
그 흔한 사춘기도 겪지 않았다는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한테 대들었다고 했다.
▲ 노란리본으로 덮여가는 교정전국 곳곳의 분향소를 찾는 추모객이 줄어들었다지만, 우리 학교의 추모 열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 서부원
▲ 이웃 중학교에 설치된 추모게시판고3 아이들로부터 시작된 추모 열기가 이웃 중학교까지 퍼졌다. 중학교 현관에 설치된 추모 게시판 모습. ⓒ 서부원
한 신부님의 제안으로 고3 아이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던 교문 옆 '가로수 분향소'의 노란 리본 띠가 제법 길어졌다. 1, 2학년 후배들도 발 벗고 나섰기 때문이다. 교복의 가슴마다 노란 리본이 명찰처럼 달렸고, 나아가 바로 옆 중학교 아이들도 동참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건물 입구 현관 벽면에 게시판을 설치하여 추모의 마음을 담은 노란 리본을 붙이고 있다.
아이들이 정녕 우려하는 건, 이번 참사가 시나브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사람들에게서 잊히는 것이다. 한 아이는 또래 친구들의 억울한 죽음을 그렇게 잊는다는 건, 어른들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친구들끼리 의리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그토록 기다려왔던 브라질 월드컵 길거리 응원은커녕 TV 축구 중계도 보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듣자니까 벌써부터 전국 곳곳에 설치된 분향소를 찾는 추모객들의 발길이 잦아들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학교 교정 곳곳은 아이들이 매달고 붙인 노란 리본으로 덮여가고 있다. 아이들은 선거 때도, 월드컵 때도 철거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어른들은 몰라도, 자신들은 절대 잊지 않을 거라며, 색이 바래 해질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볼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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