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이번 역은 득량, 추억의 득량역입니다

경전선의 간이역인 보성 득량역과 추억의 거리 풍경

등록|2014.05.25 22:24 수정|2014.05.25 22:24

▲ 경전선의 간이역인 득량역 풍경. 여행객들이 옛 역사를 체험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 이돈삼


'만난 사람들은 반가움을 나누고, 떠난 사람들은 외로움을 나누네.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이….' 학창시절 흥얼거렸던 역을 주제로 한 노래의 한 대목이다. 이렇듯 기차는 서민들의 애환을 담았다. 역에는 아련한 추억이 서려있다.

그 역으로 기차가 미끄러져 들어온다. 지난 18일이다. 철길 옆에는 연녹색의 이파리를 가득 매단 벚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기차가 멈출 때쯤 '고향의 봄'이 선율을 타고 흐른다. 득량역장이 직접 연주하는 풍금소리다.

풍금소리를 뒤로 하고 대합실로 들어간다. 기차표를 파는 발권 체험장이 있다. 손가락 하나만한 옛 기차표가 눈길을 끈다. 기관사나 승무원 옷을 입어볼 수도 있다. 오래 전 역에서 쓰던 도구도 전시돼 있다. 추억 속의 역 대합실 풍경이다.

▲ S트레인이 들어선 득량역. S트레인은 남도해안을 도는 남도관광열차다. ⓒ 이돈삼


▲ 득량역 풍경. '알맞게 낳아 훌륭하게 키우자'는 플래카드가 눈길을 끈다. ⓒ 이돈삼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경전선(慶全線)의 득량역이다. 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에 있다. 득량역은 경전선이 개통된 1930년 문을 열었다. 역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활기를 띠었다. 오일장도 성황을 이뤘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오일장이 사라지고, 최근 4차선 우회도로까지 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역도 북적대던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고작 무궁화호 열차가 하루 몇 번 지날 뿐이다.

"역사가 사라질 위기였어요. 코레일이 팔을 걷고 보성군에서 거들었죠. 득량역 재생 사업을 추진했어요. 아름다운 풍경을 고스란히 살려 공원으로 꾸몄죠. 추억의 거리도 그때 생겼고요. 지금은 보시다시피, 찾는 손님들이 부쩍 늘었어요."

고재도 득량역 역무원의 얘기다.

그 결과 역이 어른에게 추억을 선물하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아이들에게도 재미난 체험 역으로 탈바꿈했다. 여행객들의 발길도 줄을 잇고 있다. 주말과 휴일은 물론 평일에도 찾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 득량역 앞 추억의 거리. 공중전화에서부터 벽보판까지 모든 게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 이돈삼


▲ 득량역 앞 역전이발관 실내 풍경. 50년 넘게 이발소로 영업해 오고 있는 곳이다. 지금도 이발 손님을 받는다. ⓒ 이돈삼


역사를 나가면 70∼80년대와 만난다. 시골 번화가의 모습이 펼쳐진다. 추억의 거리다. 타임머신이라도 탄 것 같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역전롤러장. 당시 젊은이들의 놀이공간이자 데이트 장소였다. 오락실도 있다. 갤러그, 엑스리온으로 시간가는 줄 몰랐던 학창시절이 떠오른다.

큰길에는 역전이발관이 자리하고 있다. 50년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발관이다. 1970년대 중반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내려온 공병학(66)씨가 인수해 지금까지 문을 열고 있다. 벽에 걸린 1978년 4월 25일자 '이용업 개설 신고필증'이 눈길을 끈다.

의자와 세면대, 세숫대야, 바가지도 옛것 그대로다. 지금도 이 도구를 이용해 이발을 한다. 손님도 가끔 찾아온다. 요금은 1만1000원이다.

▲ 행운다방에서 만난 LP판 전축. 옛 노래가 추억의 시대로 여행을 이끈다. ⓒ 이돈삼


▲ 공병학·최수라 씨 부부. 추억의 거리에서 역전이발관과 행운다방을 운영하고 있다. ⓒ 이돈삼


오래 전 유행가요가 흘러나오는 행운다방도 있다. 김연자의 노래 '수은등'이 발길을 이끈다. 다방 안에 LP판도 즐비하다. 조용필, 심수봉, 정수라, 이종용, 하남석의 디스크가 보인다. 그 옆에서 전축이 LP판을 쉼없이 돌리고 있다.

교환을 불러 연결시켰던 자석식 전화기도 놓여 있다. 다방의 탁자에는 옛 성냥갑과 여성을 표지모델로 한 주간지가 놓여 있다. 벽에도 여배우의 표정이 야릇한 포스터가 붙어 있다. 공병학씨의 부인 최수라(63)씨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손님을 맞고 있다.

▲ 득량국민학교 교실 풍경. 책걸상과 칠판, 풍금과 주판 등 모든 교구가 옛 학창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 이돈삼


▲ 역전만화방 풍경. 어릴 적 부모 몰래 드나들던 그 만화방 그대로 꾸며져 있다. ⓒ 이돈삼


학교종이 내걸린 학교교실도 만난다. 칠판이 걸려 있고 그 옆에 시간표가 붙어 있다. 음악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풍금도 놓여 있다. 그 앞으로 작은 책걸상이 줄지어 있다. 산수시간에 쓰던 대형 주판도 벽에 걸려 있다.

추억의 거리에는 당시 '만물상'으로 통했던 득량상회도 있다. 구수한 냄새가 풍길 것 같은 떡방앗간도 자리하고 있다. 떡방아를 찧기 위해 물에 불린 쌀을 머리에 이고 온 아주머니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사진관에는 오래 전 추억이 걸려 있다.

어린아이들이 문턱이 닳도록 오가며 재잘거렸을 꾸러기문구도 있다. 당시 유행했던 장난감과 만화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다. 독고탁 등 만화 주인공이 그려진 딱지도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준다. 아이들이 부모 몰래 찾았을 역전만화방도 발길 오래 머물게 한다.

이뿐 아니다. 거리에는 양동이와 주전자로 만든 깡통 로봇이 서 있다. 골목길 담벼락에는 '미워도 다시 한 번', '빨간 마후라' 등 옛 영화 포스터가 걸려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흑백사진이 들어간 특별담화문도 붙어있다. 존드기, 솜사탕 등 추억의 주전부리도 추억여행을 이끈다.

▲ 득량역 앞 추억의 거리 풍경. 박정희의 사진이 들어간 특별담화문이 당시 시대상을 만난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 이돈삼


▲ 득량역 앞 추억의 거리에서 만난 주전부리. 존드기, 솜사탕 등을 파는 무인가게다. ⓒ 이돈삼


이 거리는 공주빈(36)씨가 앞장서 조성했다. 주빈씨는 '역전이발관'을 운영하는 공병학씨와 '행운다방'을 운영하는 최수라씨의 아들이다.

"80년대 이후 활기를 잃어간 마을을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 꾸준히 고민했습니다. 마을사람도 즐기고 외지인도 찾아오게 만들면 좋겠다 싶었죠. 그동안 모아 온 오래된 생활용품들을 활용했죠."

주빈씨의 얘기다.

그는 부모가 운영하는 이발관과 다방을 중심으로 추억의 거리를 꾸몄다. 주변의 빈 가게를 빌려 문방구와 장난감가게로 바꿨다. 지난해엔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화디자인 프로젝트 공모사업'으로 선정, 지원했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그때 그 시절을 되돌아볼 수 있는 거리가 만들어졌다. 역 주변 꽃밭에 심어놓은 봉숭아, 채송화가 활짝 피면 봉숭아 꽃물들이기 체험도 할 수 있다. 추억의 거리에 옛 추억체험까지 곁들일 수 있게 되는 셈이다.

낭만 가득한 추억여행이지만 관람료도 따로 없다. 추억의 거리를 돌아보고 짬이 나면 행운다방에서 차 한 잔 마시며 쉬어가는 것으로 족하다. 득량역의 간이의자에 앉아 옛 시절을 추억해 보는 것도 괜찮다.

▲ 경전선의 간이역인 득량역 풍경. 한산한 시골역의 멋을 간직하고 있다. ⓒ 이돈삼


▲ 득량역 벚나무 길. 철길을 따라 고목이 된 벚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 이돈삼


덧붙이는 글 득량역은 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 역전길28(오봉리 909-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