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4000명 처형된 이곳, 전기고문은 '기본'
[해외리포트] 캄보디아 뚜얼 슬렝 박물관서 '킬링필드' 알리는 춤 메이씨
▲ 캄보디아판 홀로코스트-뚜얼 슬렝 수용소 생존자의 하루. 춤 메이(85)씨는 자신의 킬링필드 시절 삶을 기록한 자서전을 팔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는 억울하게 죽은 아내와 아들의 모습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 박정연
85세 노인 춤 메이는 아침이 밝으면 어김없이 직장으로 향한다. 7시 30분 무렵 그가 도착한 곳은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 위치한 뚜얼 슬렝 대학살 박물관. 그는 이곳에서 관광객들에게 킬링필드 관련 서적과 사진엽서를 판다. 수십여 종에 달하는 킬링필드 관련 책들 중에는 그가 쓴 자서전도 있다.
그는 박물관이 된 이 뚜얼 슬렝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20여명 남짓한 생존자 중 한명이다. 그가 쓴 자서전 영어 번역본은 10달러에 팔린다. 운이 좋은 날엔 하루에 10여권 이상 팔린다. 돼지고기를 야채와 볶은 반찬과 쌀밥 또는 쌀국수로 간단하게 점심을 때우는 그의 유일한 낙은 식사 후 그물침대에 누워 잠깐 즐기는 낮잠이다. 이 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지만, 눈을 감으면 잊고 싶은 오래 전 기억이 스멀스멀 되살아난다. 마치 방금 전 겪은 일인 것처럼 생생한 장면을 꿈에서 접하고 나면, 어느새 그의 옷은 땀으로 흠뻑 젖는다.
그가 그리도 잊고 싶은 악몽의 순간은 40여 년 전 그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검은색 면옷에 '끄로마'라고 불리는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폐타이어를 잘라 만든 슬리퍼를 신은 40대의 자신이 보인다. 그의 등 뒤에선 카빈소총을 든 앳된 청년들이 그의 걸음을 재촉한다. 그는 10여명의 동료수감자들과 논두렁길을 따라 어디론가 끌려가는 중이다. 저녁 무렵이 돼서야 그들은 이름 모를 작은 사원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또 다른 그룹의 죄수 일행들과 만났다. 그런데 거기서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그동안 애타게 찾던 아내를 만난 것이다. 아내의 품 안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자신의 아들이 있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얼싸안았다. 그러나 마음을 놓고 울 수도 기뻐할 수도 없었다. 간수들의 서늘한 눈길이 그들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길한 예감이 스치는 순간, 탕! 탕! 탕! 탕!
만난 지 이틀째 되던 날, 세 사람은 사원 뒤편 식당 한켠에서 함께 잠을 잤다. 군인 한명이 문 앞에서 감시했지만, 그의 생애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새벽녘 누군가 곤히 잠든 그를 깨웠다. AK-47소총을 든 간수 3명이 그와 가족을 밖으로 불러냈다. 아들도 아내의 품에 안겨 곤히 잠든 채 끌려 나왔다. 그들은 아내를 앞장세우고 남편 춤 메이에겐 뒤를 따르라 했다. 달이 무척 밝은 밤이었다. 다른 수감자들도 불안한 표정으로 이미 문밖에 나와 있었다. 간수들의 지시에 그들은 1km 남짓 논둑길을 따라 걸었다. 벼가 익는 들판에 당도하자, 간수들이 나란히 섰다.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철컥거리는 쇳소리가 들려왔다.
'탕! 탕! 탕! 탕!'
총소리 수십여 발이 연거푸 들렸다. 끌려온 사람들이 간수들의 총에 맞고 쓰려졌다. 그의 아내 역시 얼마 도망치지 못한 채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비명소리와 함께 아내가 쓰러지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내는 가슴에 총을 맞은 채 피를 흘리며, 남편인 춤 메이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빨리 도망가요! 여보!"
다시 그녀의 외마디가 들려왔다. 아내 품에 안긴 아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또 한발의 총소리가 들려왔다. 아들의 울음소리마저 멈췄다. 그들이 다음 표적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그는 무작정 어둠속으로 내달렸다. 흰개미집 둔덕 뒤편에 몸을 숨겼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간수들이 총알이 떨어져 재장전을 준비하는 사이, 벼가 자라는 논두렁 속으로 있는 힘을 다해 기어들어갔다.
그들은 춤 메이가 여전히 흰개미 둔덕에 숨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인정사정없이 총질을 해댔다. 그러나 그는 더 먼 곳으로 도망쳐 숨을 상태였다. 간수들이 사라진 뒤 그는 밤새 달렸다. 죽은 아내와 아들을 생각하면서 다음날 아침 동이 틀 때까지 울면서 달렸다. 결국 그렇게 그는 혼자 살아남았다. 그리고 전쟁은 곧 끝났다.
이것이 그가 기억하는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태어난 지 두 달된 아들과의 마지막 순간이다. 그는 한 번도 이 장면을 잊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80세 노인이 아픈 기억을 팔며 살아가는 곳
▲ 사람의 양팔을 묶은 후 거꾸로 매달아 고문하던 시설. 바닥에는 물고문용으로 쓰이던 물항아리들이 놓여 있다. 당시 수용자들에 대한 고문이 얼마나 혹독했는지 짐작케 하는 현장이다. ⓒ 박정연
이 사건이 발생하기 약 1년 전, 그는 이유도 듣지 못한 채 군인들에 의해 프놈펜에 있는 수용소로 보내졌다. 과거 평범한 고등학교로 쓰였던 건물이다. 크메르루주는 이곳을 '안전가옥'을 뜻하는 암호명 S-21로 불렀다. 이 감옥은 이곳 지명을 따 '뚜얼 슬렝'이라는 또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독나무가 있는 언덕'이란 뜻이다. 지금 이곳의 공식명칭은 뚜얼 슬렝 대학살 박물관(Toul Sleng Genocide Museum). 현재 춤 메이 노인이 킬링필드의 아픈 기억을 팔며, 살아가는 직장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1978년 10월 28일 일반 죄수로 수감되어 12일 동안 이곳에서 고문 받았다. 그는 자신이 당시 무슨 죄를 지었는지 지금도 모른다. 그 역시 수천여 명에 이르는 일반 수감자 중 한명일 뿐이었다. 수감자 간 대화도 일체 금지돼 다른 수감자들의 신분이나 과거 경력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정치범으로 몰리거나, 전 정권 당시 일했던 공무원, 경찰, 군인이었다는 사실만 막연히 추측할 뿐이다. 그가 상당수 수감자가 반역죄로 몰린 크메르루주 출신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감옥에서 도망친 뒤 한참 시간이 흘렀을 때다.
당시 수용소에는 수십여 명의 간수 군인들과 수감자들을 조사하는 심문관 수명, 그리고 사진촬영 기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수용소의 최고 책임자는 두잇(본명 : Kaing Guek Eav)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그의 얼굴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와 말을 섞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춤 메이는 지난 2009년 6월 크메르루주 특별법정(ECCC)에 증인으로 참석해 뚜얼 슬렝에서 일어난 참상에 대해 진술 바 있다. 교도소장이었던 이 인물은 상부의 지시 따른 것이라며 협의를 강력 부인했지만, 지난 2010년 무기징역을 받고, 현재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이 수용소에서 최소 1만4000명이 고문과 처형으로 목숨을 잃었다. 춤 메이는 고문을 받다 오른쪽 엄지발톱을 뽑히기도 했다. 전기고문은 기본이고, 거꾸로 매달린 채 일명 통닭구이(?)라 불리는 고문도 당했다. 미군용 탄피통이 대변기로 쓰였는데, 분변 처리 과정에 조금이라도 흘리면 그 벌로 바닥을 혀로 핥아야 했다. 배가 고파 쥐나 도마뱀, 벌레도 잡아 날것으로 먹었다. 목이 말라 물을 더 달라고 하면 회초리로 200대를 맞아야 했다. 운다는 이유로 어린 아이들을 3층 발코니에서 그대로 던져 죽이는 간수들의 모습도 봤다.
이곳에 수용된 사람들은 죄가 무엇이든 '앙카'라 불리는 최고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처형당할 운명이었다. 춤 메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매일 새벽, 고문과 질병을 견디지 못해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들것에 실려 나갔다. 죽음은 지옥보다 더 한 감옥을 합법적으로 빠져나가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당시 심문관들은 수감자들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고문을 통해 없던 죄까지 실토하게 만들었고, 거짓진술이라 할지라도 이를 토대로 보고서로 만드는 일이 그들에겐 더 중요했다. 춤 메이 역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진술서에 '미국 CIA 첩자로 일했다'고 쓴 뒤 손도장까지 찍은 상태였다.
진술서 작성을 마친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오직 처형뿐이었다. 진술서를 쓴 사람들이 대부분 다음날 이른 새벽 수용소밖에 대기 중인 트럭에 실려 끌려갔다. 그의 차례가 곧 임박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절체절명의 순간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는 1975년 크메르루주에 의해 프놈펜이 함락되기 전 시내 자동차 공업사에서 기술자로 일했다. 그를 직접 고문했던 심문관이 그 사실을 상부에 보고한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수용소 내 간단한 기계들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당시 감옥 내 고문실 작은방에는 백열등 아래 심문용 책상과 의자 그리고 타자기 한대가 놓여 있었다. 대부분의 진술은 심문관이 타자로 작성한 문서와 수감자의 흑백사진 한 장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타자기가 낡아 고장이 잦았다. 크메르루주가 시장경제를 죄악시해 화폐마저 없앤 상태라 새 타자기를 구입하기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때 그는 고장이 난 타자기를 뚝딱 고쳤다. 그러자 공장 밖 봉제용 재봉틀을 고치는 일이 그에게 맡겨졌다.
2003년, 수용소 간수와 만나 화해한 춤 메이
▲ 당시 물고문 도구를 전시해놓은 방의 모습. 상단의 고문장면은 뚜얼 슬렝 수용소 생존자 중 한명이었던 화가 완낫이 직접 그린 그림이다. 바탐방 극장간판을 그리는 직업을 가졌던 그는 크메르루주 관료들의 초상화을 그린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2011년 9월 5일 작고) ⓒ 박정연
그러는 사이 크메르루주의 몰락 시기가 점점 다가왔다. 수용소 밖에서 베트남군이 쏜 포탄소리가 들려왔다. 1979년 1월 7일, 베트남군이 드디어 프놈펜에 입성했다. 크메르루주군은 다시 정글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전쟁이 끝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
그 후로 시간이 꽤 흘렀다. 1980년대 후반 무렵, 그는 뚜얼 슬렝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다른 동료 6명과 함께 통일 이전 한 동독방송국이 만든 크메르루주 관련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게 된다. 생존자 명단에는 춤 메이와 함께 3년 전 세상을 떠난 화가 완낫, 그리고 또 다론 화가 출신의 보우 멩도 포함돼 있다. 이 다큐멘터리를 시작으로 그에 관한 기사와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올해 영화 <미싱픽쳐>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리티 판 감독이 2003년 제작한 크메르루주 관련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 다큐에는 그가 수용소 간수들과 만나 화해하는 장면도 담겨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괴롭혔던 간수들에게 단 한 번도 왜 그랬냐고 묻지 않았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그런다고 죽은 아내와 죽은 자신의 아들이 살아올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의 악몽을 잊기 위해 아주 오랫동안 이 수용소를 찾지 않다가 2009년부터 크메르루주 희생자 협회 회장으로 일하며 다시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를 알아보는 관광객들과 대화를 하다가 죽은 아내와 아들이 생각나 함께 울기도 했다. 나이 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이곳에서 자신의 자서전 파는 일로 하루를 보내게 된 것은 3년 전쯤부터다.
이런 그가 최근 다시 주목을 받은 이유는 뚜얼 슬렝 박물관 내 크메르루주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 기념조형물(스투파)에 새기는 프로젝트에 거부감을 드러내면서다. 최근 그는 <프놈펜 포스트>와 한 인터뷰에서 수감되어 죽어간 인물들이 모두 억울하게 희생된 민간인이라고 할 수 없다며 프로젝트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캄보디아 역사 전문가들은 이곳에 수감됐다가 희생된 사람 중 70%가 크메르루주 출신이라고 주장한다. 당시 폴 포트가 게릴라군인 크메르루주를 이끌고 수도 프놈펜을 함락, 정권을 장악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지방 파벌들 간에는 알력이 남아 있었고 중앙정부의 지시나 명령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지방도 많았다. 따라서 이러한 파벌 간, 계파 간 갈등 속에 반역자로 몰려 이곳에 수감된 사람들도 상당수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춤 메이는 수용소에 갇혀 죽은 이들 모두의 이름을 새겨 넣을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민간인 희생자들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며 살아남은 가족들에게 또 상처를 주는 일이라는 것이다.
"크메르루주는 내 가족, 내 인생을 모두 빼앗아갔다"
▲ 외국인 여성관광객이 수용소에서 죽어간 아이들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부모와 함께 수용소에 들어온 아이들은 부모와 격리된 상태로 죄수최급을 받았으며, 대부분의 아이들이 크메르루즈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 박정연
그러나 또 다른 생존자 보우 멩(Bou Meng)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화가 출신인 그 역시 춤 메이의 테이블 건너편에서 자서전을 팔고 있다. 그의 아내도 고문 끝에 목숨을 잃었지만, 그는 크메르루주 정권 당시 희생된 사람들인 만큼 모두의 이름을 새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두 사람에겐 다른 점이 있다. 보우 멩은 1970년 크메르루주 게릴라군으로 활동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 이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오직 뚜얼 슬렝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생존자라는 사실뿐이다. 춤 메이의 주장대로 라면, 크메르루주 출신인 보우 멩의 이름도 당연히 그 명단에서 누락될 수밖에 없다.
스투파에 이름을 새기는 이 프로젝트는 2015년 초에 추진될 예정이다. 하지만 캄보디아특별법정(ECCC) 희생자 지원담당 부서와 문화예술부는 논란이 이어지자 향후 계획에 대해 어떤 의견도 내놓지 않고 있는 상태다. 참고로 현재 40여명에 이르는 이슬람교 출신 희생자들은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이름을 새기는데 반대 입장이다
스투파 제작에 8만 7천 달러 기금을 낸 독일 정부 구호단체 산하 시민평화봉사 코디네이터 마르코스 스미스(Marcos Smith)씨는 "스투파에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겨 넣을지 책으로 기록할지 논의된 바 없다"고 <프놈펜 포스트>와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는 또 "사실 크메르루주라고 해서 모두가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 사이에는 애매한 경계가 존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춘 메이의 생각은 확고하다.
"세상의 어느 나라도 (무고한) 사람을 죽인 사람들의 이름을 스투파에 넣은 경우는 없다."
크메르루주 정권 희생자를 추모하는 '분노의 날' 행사가 열린 다음날인 지난 21일 오후(현지시각) 뚜얼 슬렝에서 춤 메이를 만났다. 그의 의견은 변함 없었지만, 그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크메르루주는 내 가족과 내 인생을 모두 빼앗아갔다. 나는 매일 밤 울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들(크메르루주)을 모두 용서했다. 이제는 그들에 대한 분노도 없다. 그저 측은할 뿐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름을 비문에 새기는 것은 전적으로 반대한다. 그런 자들과 함께 희생자들의 이름이 올라가는 일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그것은 사랑하는 내 아내와 아들, 그리고 희생된 모든 이들을 욕되게 만드는 일이다."
▲ 춤 메이가 수감됐던 방번호 모습 ⓒ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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