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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서 잘 나가던 이 남자, 왜 제천에 갈까

해외입양인 백시철씨... 친어머니 찾기 위해 귀국 후 이사

등록|2014.05.29 10:57 수정|2014.05.29 13:57
지난 26일 <국민일보>에는 '교회가 나서 버려진 아이들 거두는 동안 입양특례법 재개정안 16개월째 국회서 낮잠'잔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러나 입양특례법 때문에 아이들이 버려진다는 <국민일보>의 주장은 동의하기 어렵다. 아이가 버려지는 주요원인은 입양특례법 때문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미혼모에 대한 차별, 편견, 열악한 사회복지 때문이다.  

현재 정부에서는 아동시설에 아동 한 명 당 매월 100만 원 이상을 지원한다. 그러나 미혼모들에게는, 미혼모의 수입이 최저생계비의 130% 이하에 해당하는 경우에만 매월 7만 원을 지원하고 있다. 핵심은 우리나라가 돈이 없는 것이 아니다. 정부가 돈을 잘못 배분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에서 아동시설에 아동 한 명 당 지원해 주는 100만 원 이상의 돈을 아동시설이 아닌 미혼모에게 지원해 주면 아이를 직접 키우는 친모가 크게 늘어날 것이다. 친모와 함께 자란 아이가 아동시설에서 자란 아이보다 훨씬 정서적으로도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정부 관리들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나는 중앙입양원의 신언항 원장님을 비롯해 많은 훌륭한 입양부모님들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고 이 입양부모님들이 누구보다 헌신적인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한 번도 입양부모님들의 입양아동을 향한 애정과 사랑을 감히 폄하하거나 의심해 본적이 없다.

나는 단지 사업화된 입양산업, 특별히 다국적 기업화된 해외입양기관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래서 입양을 이윤과 맞물려 있는 사설입양기관이 아니라 이윤과는 전혀 무관한 공공영역인 국가기관에서 운영하고 관리 해줄 것을 정부에 제안하는 것이다.

1976년 2월 제천 신월동에서 울고 있던 아이

▲ 1976년 백시철씨 입양보내지기전 ⓒ 백시철


서론이 길었다. 다음은 지금 서울에 살고 있는 미국입양인 백시철씨와 지난 며칠간 이메일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입양기록에 따르면 백시철씨는 태어난 날이 3개다. 1972년 1월 5일, 1972년 2월 16일 혹은 1973년 1월 5일. 이 셋 중 어느 날이 백씨가 이 세상에 태어난 날인지는 지금도 불확실하다.

▲ 1975년 백시철씨 입양보내지기전 ⓒ 백시철


▲ 1976년 백시철씨 입양보내지기전 ⓒ 백시철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충북 제천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1976년 2월경 제천 신월동 부근 길에서 울고 있던 그를 제천읍사무소 직원이 발견하였다. 그 후 백씨는 위탁가정을 거쳐 지난 1976년 3월 5일 제천영아원에 입소한 것으로 되어있다.

입소 당시 그의 몸은 큰 편이었고, 제천영아원에서 그의 이름을 '백시철(白詩哲)'로 지어 주었다. 백씨는 자신의 성 '백'은 당시 영아원에서 만들어 준 것이며 원래 이름은 '시철' 혹은 '희철'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당시 그가 길을 잃어서 실종된 것인지 아니면 친부모가 양육을 포기하고 자신을 유기한 것인지 여부는 아직도 불확실하다. 하여간 제천영아원에서 그는 노래를 잘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그는 피아노와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잘한다. 제천영아원에서 지내던 백씨는 5살 때인 지난 1977년 7월 15일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미국의 중산층 백인가정으로 해외입양 보내졌다.

36년 만에 무작정 방문한 한국

▲ 1977년 백시철씨 미국 입양 후 ⓒ 백시철


그 후 백씨는 미국 대학교에서 컴퓨터 IT분야를 전공하고 졸업 후에 좋은 직장도 가졌다. 그래서 그는 물질적으로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성공한 '한국을 잊은' 한국계 미국입양인이되었다.

그러나 지난 몇십 년간 미국생활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백씨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알 수 없는 깊은 공허감이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2013년 가을, 그는 문득 어느새 40세가 넘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36년 동안 잊고 살았던 한국이라는 나라가 갑자기 그리워졌다.

그래서 휴가를 내고 그는 입양 보내진 지 36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 2013년 가을 한국을 방문한다. 처음 방문한 한국에서 백씨는 많은 해외입양인들을 만났다. 그들 중에는 친부모와 재회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때 그의 머리를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간 생각은 "더 늦기 전에 친부모님을 꼭 찾아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휴가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백씨는 잘 다니고 수입이 좋았던 IT 관련 직장에 미련 없이 사표를 썼다. 그리고 집과 살림도 정리하자마자 곧 한국행 편도 비행기를 끊었다. 

▲ 지난해 36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백시철씨 ⓒ 백시철

이렇게 지난해 말 한국에 돌아온 백씨는 지금 서울에서 살며 친부모를 찾고 있다. 그는 자신이 미국의 좋은 입양부모를 만나서 대학도 나오고 좋은 직장도 다니면서 돈도 많이 벌게 된 것을 행운으로 여긴다고 했다. 그러나 백씨는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은 친모와 같이 살 수 있는 것 아닌가요?"라며 기자에게 물었다.

그는 친모의 얼굴이나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친부모님은 어떤 분들이고 어떻게 생기셨을까'를 항상 매순간 생각한다.

그래서 지난 몇 달 동안 백씨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친부모님을 찾아 틈만 나면 제천을 방문했다. 제천에 갈 때 마다 그는 자신의 '친부모님을 찾습니다"라는 사연을 담은 유인물과 포스터를 제천역과 제천 시장 앞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행인들에게 뿌렸다.

그러나 백씨는 이제 그것도 부족하다. 그래서 오는 28일 백씨는 아예 제천으로 이사 간다. 앞으로 제천을 방문하는 분들은 주말마다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과 친부모님을 찾는 사연을 담은 유인물과 포스터를 제천의 저자거리에서 행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는 백씨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백씨가 한국 친엄마에게 전해 달라면서 기자에게 남긴 말이다.

"엄마, 제가 한국에 돌아왔어요. 제가 엄마의 얼굴을 잊어 버렸지만 아직도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어요. 엄마가 만약에 저를 아직 기억하시면 연락해 주세요. 한 번 같이 식사 하면 어떠세요? 엄마, 우리가 만날 때까지 건강하세요."
덧붙이는 글 백시철씨를 알아보시는 분들은 '뿌리의집'(02-3210-2451)으로 연락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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