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는 말했다.
"먼 데 있는 것에 대한 욕심 때문에 가까이 있는 것을 무시하지 마라. 지금 가까이에 있는 것도 한 때, 당신이 갈망하며 소망했던 것이었음을 기억하라."
그렇다. 대개의 경우 가까이 있는 것엔 소홀해지기 쉽고 멀리있는 것은 그 실질보다 매력적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쾌락주의를 주창한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자, 에피쿠로스에게 권태란 가장 큰 적이었다. 자연적인 욕망에 충실한 평온한 삶 가운데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쾌락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쾌락주의의 골자였다. 진정한 쾌락을 얻기 위해 모든 번잡함을 피해 은둔하는 에피쿠로스의 삶은 고통을 피하기엔 좋은 밥법이었지만 권태가 자라는데도 비옥한 토양을 제공하였다.
권태란 무엇인가? 객체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는데 이를 바라보는 주체의 마음이 시들었을 때 사람들은 흔히 권태롭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권태의 핵심은 객체가 아닌 주체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 밖으로부터 스며드는 것이 아니기에 맞아 싸우기 어렵고 마음의 문제라서 쉽게 다루기 어렵다.
권태는 흔히 나태와 향락의 산물이며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퇴락한 감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는 권태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잘못된 생각이다. 권태가 고통과 극단에 서 있는 개념이긴 하지만 동시에 서로 통하는 개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일차적인 감각이다. 우리는 무언가 충족되어야 할 것이 충족되지 못했을 때, 가해지지 않아야 할 것이 가해졌을 때 고통을 느낀다. 고통은 불쾌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라 인간은 쾌락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보다도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더욱 노력해왔다. 인류의 역사는 고통과 맞서 투쟁해 온 역사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고통과 맞서 상황을 개선시키는 것이 당연한 욕구의 발로인 것처럼 권태와 싸워 상황을 바꾸는 것도 의외의 일은 아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권태는 고통의 다른 얼굴이다. 사실 권태는 고통과 마찬가지로 인류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인류 역사에서 손꼽히는 예술작품과 과학기술 중 상당수는 권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너무 권태로운 나머지 수평선 끝으로 나아갔고 말보다 빨리 달렸으며 새보다 높이 날고자 했다. 본 적 없는 땅을 발견했고 쓴 적 없는 글을 썼으며 해본 적 없는 상상을 했다. 인류는 이제 우주로 나아가고 눈으로 보이지 않는 나노입자를 만들어내며 스스로 생명까지 창조한다. 모두가 권태로웠기 때문이다. 신이 너무 권태로웠던 나머지 세상을 창조했다는 우스갯소리는 권태가 가진 힘에 대한 놀라운 통찰이다.
권태가 존재하는 한 인간은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끝도 없이 싸워 마침내 모든 고통을 제거한다 할지라도 그제서야 찾아오는 권태를 도려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권태는 고통의 안전장치이며 다른 차원의 고통이라 불려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이 피할 수 없는 그물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이란 끝없이 달리고 또 달리는 일 뿐이다.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권태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니체는 말했다.
'인생의 목적은 끊임없는 전진이며 고난 속에 생의 진정한 기쁨이 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에피쿠로스와 같이 그로부터 도망치는 것 보다는 니체가 그랬듯 안락한 별장에서 나와 우뚝 솟은 산 정상으로 향하는 편이 더욱 현명한 삶의 자세가 아닐까?
"먼 데 있는 것에 대한 욕심 때문에 가까이 있는 것을 무시하지 마라. 지금 가까이에 있는 것도 한 때, 당신이 갈망하며 소망했던 것이었음을 기억하라."
그렇다. 대개의 경우 가까이 있는 것엔 소홀해지기 쉽고 멀리있는 것은 그 실질보다 매력적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쾌락주의를 주창한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자, 에피쿠로스에게 권태란 가장 큰 적이었다. 자연적인 욕망에 충실한 평온한 삶 가운데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쾌락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쾌락주의의 골자였다. 진정한 쾌락을 얻기 위해 모든 번잡함을 피해 은둔하는 에피쿠로스의 삶은 고통을 피하기엔 좋은 밥법이었지만 권태가 자라는데도 비옥한 토양을 제공하였다.
권태란 무엇인가? 객체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는데 이를 바라보는 주체의 마음이 시들었을 때 사람들은 흔히 권태롭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권태의 핵심은 객체가 아닌 주체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 밖으로부터 스며드는 것이 아니기에 맞아 싸우기 어렵고 마음의 문제라서 쉽게 다루기 어렵다.
권태는 흔히 나태와 향락의 산물이며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퇴락한 감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는 권태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잘못된 생각이다. 권태가 고통과 극단에 서 있는 개념이긴 하지만 동시에 서로 통하는 개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일차적인 감각이다. 우리는 무언가 충족되어야 할 것이 충족되지 못했을 때, 가해지지 않아야 할 것이 가해졌을 때 고통을 느낀다. 고통은 불쾌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라 인간은 쾌락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보다도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더욱 노력해왔다. 인류의 역사는 고통과 맞서 투쟁해 온 역사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고통과 맞서 상황을 개선시키는 것이 당연한 욕구의 발로인 것처럼 권태와 싸워 상황을 바꾸는 것도 의외의 일은 아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권태는 고통의 다른 얼굴이다. 사실 권태는 고통과 마찬가지로 인류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인류 역사에서 손꼽히는 예술작품과 과학기술 중 상당수는 권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너무 권태로운 나머지 수평선 끝으로 나아갔고 말보다 빨리 달렸으며 새보다 높이 날고자 했다. 본 적 없는 땅을 발견했고 쓴 적 없는 글을 썼으며 해본 적 없는 상상을 했다. 인류는 이제 우주로 나아가고 눈으로 보이지 않는 나노입자를 만들어내며 스스로 생명까지 창조한다. 모두가 권태로웠기 때문이다. 신이 너무 권태로웠던 나머지 세상을 창조했다는 우스갯소리는 권태가 가진 힘에 대한 놀라운 통찰이다.
권태가 존재하는 한 인간은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끝도 없이 싸워 마침내 모든 고통을 제거한다 할지라도 그제서야 찾아오는 권태를 도려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권태는 고통의 안전장치이며 다른 차원의 고통이라 불려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이 피할 수 없는 그물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이란 끝없이 달리고 또 달리는 일 뿐이다.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권태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니체는 말했다.
'인생의 목적은 끊임없는 전진이며 고난 속에 생의 진정한 기쁨이 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에피쿠로스와 같이 그로부터 도망치는 것 보다는 니체가 그랬듯 안락한 별장에서 나와 우뚝 솟은 산 정상으로 향하는 편이 더욱 현명한 삶의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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