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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떠오르게 한 분들입니다

생업전선에서 만난 중국 교포들의 삶

등록|2014.05.29 16:58 수정|2014.05.30 15:43

▲ 안개낀 건설현장 ⓒ 변창기


지난 3월초, 느닷없이 직장을 잃고 다른 일자리를 찾던중 동네방네 길거리마다 배포대가 있는 무료신문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건설현장 일자리가 난 걸 보고 연락하니 와서 면접을 보라고 했습니다. 그날 저녁 당장 찾아가 면접을 본 후 다음날 아침부터 출근해 일을 시작했습니다.

대기업 건설회사에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짓고 있었습니다. 아침 6시 50분이면 어김없이 지하 공간에 모여 체조를 하였습니다. 그때 모여든 작업자들이 대략 500여 명은 되어 보였습니다. 대다수 작업자는 중국 교포나 한족이거나 베트남이나 필리핀에서 온 사람도 많았습니다. 관리자만 원청직원이고 작업자는 대부분 하청업체 소속이었습니다. 우리 업체는 원청사에 직속 하청에 또 하청, 하청 단계를 거쳐 4차 하청업체로 등록된 업체였습니다. 그러니 2차 하청업체보다 일당이 더 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업체는 대부분 중국 교포 작업자가 주를 이뤘습니다. 운전 할 사람이 없어 저에게 운전을 맡겼습니다. 집에서 버스로 30분이면 가는 거리에 건설현장이 있지만 업자는 교포 작업자 숙소에서 같이 지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침과 저녁 식사를 해야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숙소는 건설현장과 다소 떨어진 곳에 있었고 아침 6시경 식사를 해야만 50분에 있는 단체체조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체조에 참석하지 않으면 원청사에서 그날 작업중단을 내릴정도로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었습니다.

▲ 상판작업, 베트남인이 모여 간식을 먹고 있습니다. ⓒ 변창기


저도 처음엔 집에서 출퇴근 했으나 그 현장에서 중대사고가 나는 바람에 점점더 엄격하게 하청업체 사람들을 관리해 나갔습니다. 그 후부터 저는 중국 교포와 합숙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나이 많으신 분이 60이 넘었으며 40대 초반도 있었습니다.

"우리야 뭐 이리 가라면 가고 저리 가라면 가야 할 입장이지. 우리는 큰거 안바래. 그냥 월급 제때주고 숙식제공되면 되는거야. 더 바라는 것도 없지 뭐야. 우리가 뭐시기 돈벌러 왔지 봉사하러 온게 아니잖나?"

그 업체서 오래 일하신 분 중에는 5년 넘게 일한 분도 있었습니다. 5년 된 분이 팀장으로 현장을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그 팀장과 같은 마을에 살거나 친인척 관계에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난 중국에서 여기 시청같은 곳에서 공무원 노릇 했어. 중국엔 정년퇴직하면 죽을때까지 퇴직금을 매월 나누어서 연금 형태로 주어 먹고 사는데는 지장없지."

나이든 중국 분이든 아직 젊은 중국 분이든 그곳에서 모두 살만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와서 고생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중국에 있으면 맨날 마작이나 놀고, 술이나 퍼먹지 할 일이 없어. 우리야 먹고 사는데 지장없다지만 다 자식들 걱정이 앞서지. 그래서 온거야. 자식들 결혼시키면 집이라도 필요하고 살림 도구라도 장만해야 하잖나? 중국에도 집 값은 헐치 않지. 남은 여생 집구석에 앉아 놀면 뭐하나? 이렇게 몸이 건강하고 움직일 수 있을때 벌어야지. 안그래?"

나이든 중국 교포는 오로지 자식들 걱정 뿐이었습니다. 자식들 챙기는 부모 마음은 조선족이라면 다 같은가 봅니다. 그분들은 숙식이 제공되고 일만 하니 돈 쓸 일이 없다고 합니다. 기껏해야 전화비와 담배, 가끔 군것질 거리 비용만 들더군요. 3개월 정도 지켜본 그들은 알딸살뜰 돈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몇 개월 돈을 모으면 달러화 가치가 좀 높아질때 집으로 송금을 했습니다.

40대 초반 젊은분은 아직 미혼이었습니다. 잘생긴 외모에 풍채도 있는데 왜 결혼하지 않았는지 궁금했습니다.

"저는 고향에 늙으신 아버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형과 누나도 좀 없이 살지요. 제가 벌어서 우리 가족들 좀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결혼하면 안 됩니다."

중국 교포들은 작업을 할때 서로 돕기를 잘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더 빨리 더 많이 작업을 했습니다. 한 날은 서울서 2차 하청업체 관리자가 울산 현장을 둘러보러 왔는데 일하는 모습과 경과보고를 듣고는 많이 놀랐다고 합니다. 보통 3개층 작업하면 많이 한 건데 하루에 4개층씩 작업을 해나가니까요.

그분들은 절제할 줄 알고 서로 협동할 줄 알았습니다. 그분들은 기꺼이 힘든일도 마다하지 않고 했습니다. 그들과 3개월 정도 지내면서 근면, 성실한게 무언지 배웠고, 돕고 사는게 무언지 알게 되었습니다. 모두 착한 분들이었으며, 성실한 분들이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을 겪으면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책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남은 여생 자식들을 위해 또는 가족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는 그분들 보면서 제 자신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엇그제 저는 업자와 다툼이 생겨 그 업체를 그만 두었습니다. 다른 일자리를 다시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을거 같습니다. 생활력 강한 그분들처럼 저도 다시 힘든 인생살이지만 살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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