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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독립' 배지 단 홍기섭 KBS취재주간 "길환영 사퇴"

4일 지방선거 개표방송 끝으로 보직 사퇴 의사 밝혀

등록|2014.06.04 20:36 수정|2014.06.04 20:36

▲ 홍기섭 KBS 취재주간이 4일 길환영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보직에서 사퇴했다. 그는 이날 '방송독립' 배지를 달고 개표방송을 진행했다(빨간색 원). ⓒ KBS 갈무리


전 KBS <9시뉴스> 앵커이자 6·4지방선거 개표방송을 진행한 홍기섭 취재주간이 길환영 KBS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보직에서 물러났다. 취재주간으로 임명된 지 3주 만이다. 홍 주간은 4일 '방송독립'이라고 쓰인 노란 배지를 달고 방송을 진행했다.

이날 오후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아래 KBS새노조)는 그가 보직 사퇴 뜻을 밝히며 사내 게시판에 올린 글을 공개했다. 홍 주간은 이 글에서 길 사장의 최근 보복성 인사를 두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인사폭거"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길 사장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동료 부장을 광주에 발령내고, 업무복귀 호소문에 동참하지 않은 총국장의 보직을 박탈했기 때문이었다.

"좌파노조? 해서는 안 되는 말"... 길환영 '편 가르기' 비판

홍 주간은 길 사장의 '편 가르기'도 비판했다. 그는 "좌파노조나 기자 직종 이기주의란 말을 거둬 달라, 협회나 노조가 정치세력화한다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그렇게 규정하면 사장님 편에 설 사람이 몇 명 늘어날지는 모르지만, 스스로 KBS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기자들을 모욕하는 위험한 발언"이라고 했다.

그는 후배들에게 자신의 개표방송 진행을 양해해달라고도 부탁했다. KBS 양대 노조는 현재 길환영 사장의 퇴진과 방송 정상화를 요구하며 파업 중이다. 홍 주간은 파업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개표방송은 공영방송의 중요한 책무"라 번복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관련 기사 : 길환영 해임안 결국 표결 연기 노조 총파업 돌입...KBS 격랑 속으로).

홍 주간은 길 사장에게 "국민의 방송 KBS를 지켜달라"라고 호소했다. 그는 "KBS 정상화라는 더 절박한 것을 갖고 싶다면 먼저 손에 쥔 것을 놓아야 한다"라며 "사장님의 용단을 간절히 기다린다"라고 밝혔다.

KBS새노조는 "이세강 보도본부장 사표와 김종진 디지털뉴스국장, 김진수 국제주간에 이어 홍기섭 취재주간까지 보직 사퇴로 길 사장의 퇴진을 요구했다"라며 "이제 길환영 사장 곁에는 아무도 없다"라고 말했다. KBS이사회는 오는 5일 오후 4시 임시이사회를 열어 길 사장의 해임제청안을 표결한다.

다음은 홍기섭 주간이 사내게시판에 올린 글 전문이다.

저도 이제 보직을 내려놓으려 합니다. 임명된 게 지난 5월 13일이니 딱 3주가 지났군요.

격동의 87년이라고 하죠.  27년 전인가요. 수습꼬리를 채 떼기도 전에 14기 동기 기자들이 공정보도를 외치며 농성하고 대자보를 써 붙인 일로 모두가 지방으로 쫓겨난 적이 있었지요. 그 때도 여기자 2명은 제외됐는데 이번에 동료 김혜례 부장이 아무 연고도 없는 광주로 발령이 났습니다.  어느 총국장은 업무복귀 호소문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임 5개월도 안 돼 보직을 박탈당했습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인사폭거입니다.

사장님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저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나 어느 세력 편에도 선 적이 없는 중간인, 회색인으로 살아왔습니다. 오직 당당하고 떳떳한 보도만을 꿈꿔온 기자일 뿐입니다. 후배들도 저와 다르지 않습니다. 좌파노조나 기자 직종 이기주의란 말은 거두어주십시오. 협회나 노조가 정치세력화한다니요. 해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그렇게 규정하면 사장님 편에 설 사람이 밖에서 몇 명 늘어날지 모르지만 스스로 KBS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기자들을 모욕하는 위험한 발언입니다.

이제 홀가분해졌습니다. 보도본부 국장단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후배·동료의 지방발령인사가 취소되지 않는 상황에서 더 이상 설 자리도 할 일도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본부장마저 붙잡지 못하고 떠나는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자리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너무 염치없는 짓이지요. 후배 부장, 팀장들을 무책임하다고 질타했던 제가 그들 편에 서는 건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자리에 연연해서가 아닙니다. <9시 뉴스>만은 지켜야 한다고 했던 제가 그 사명감을 잠시 내려놓는 건 더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후배 여러분께 한마디 드립니다. 개표방송은 선거기획단장과 보도본부장이 급히 요청해 받아들였지만 차마 번복할 수 없었던 점 양해바랍니다. 개표방송은 공영방송의 중요한 책무라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개표방송을 마지막으로 보직사퇴하려 한 저의 뜻을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사장님, 국민의 방송 KBS를 지켜주십시오. 무언가를 꼭 쥔 두 손으로는 아무 것도 잡을 수 없습니다. KBS 정상화라는 더 절박한 것을 갖고 싶다면 먼저 손에 쥔 것을 놓아야 합니다. 사장님의 용단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보도국장 취재주간 홍기섭

201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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