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침몰... 알에서 깨어난 것 같아요"
[인터뷰] 인터넷카페 '달콤한 청라맘스' 윤지연 회원
5월 31일 토요일 오후, 인천 주안역에서 세월호 참사 추모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이 행사에 참석한 지인으로부터 여섯 달 된 아이를 품에 앉고 감동적인 발언을 한 사람에 대한 얘기를 전해 들었다. 이틀 후 한 전국일간지에 그녀가 회원으로 있는 인터넷 '카페'에서 낸 '세월호 희생자를 잊지 않겠다'는 내용의 광고를 봤다.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서구 연희동 청라지구에 사는 윤지연(37)씨를 청라에 있는 한 커피숍에서 지난 5일 만났다. 칭얼대는 딸아이, 촛불문화제 추모 발언 때 함께 있던 아이를 어르고 달래느라 의자에 앉지도 못하면서 진지하게 인터뷰에 응하는 모습부터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그냥 청라지역에 사는 엄마들 카페예요. 소소한 가십거리에서부터 육아, 교육 등 다양한 주제를 나누는 커뮤니티예요. 카페 이름은 '달콤한 청라맘스(이하 청라맘)'예요."
청라국제도시에 입주한 주민은 7만여 명이라고 한다. 2011년 1월 개설한 이 카페에 등록한 엄마는 현재 1만3000여 명 정도다.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작년 가을, 서구에서는 SK인천석유화학 공장 증설 문제가 대두됐다. 유해물질을 배출하는 공장 증설에 반대하는 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청라맘 회원들도 '아이들을 유해한 환경으로부터 지켜내자'는 마음으로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
"남의 일이 아니다 싶었죠. 누군가 카페에 집회 참여를 제안했을 때, 적극적으로 참여했어요. 그때 둘째가 막달이라 만삭이었지만 함께 했죠. 그걸 계기로 내 가족만 바라봤던 시야가 주변으로 넓어졌어요."
SK인천석유화학 공장 증설 문제는 아직까지 이렇다 할 해결책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윤씨는 청라맘들의 목소리를 내는 데는 성공했다고 했다. 그 이후 세월호 침몰 사건이 터지면서 청라맘들은 달콤함을 넘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줍음 많은 소녀에서 당당한 엄마로
윤씨는 2012년 말 청라지구로 이사를 왔다. 인천에서 태어나 자라고 결혼까지 한 그녀는 어릴 때부터 수줍음이 많았다. 단둘이 대화할 때는 문제가 없지만 세 명 이상 모인 자리에서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느끼면 고통스러웠다. 대인기피증이라 느껴질 만큼 소극적인 그녀가 사람들 앞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형 참사가 벌어지고 수백 명이 죽었는데 책임 있게 대응하는 사람은 없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매일 벌어지는데 해결은 안 되고 있는 게 너무 혼란스러웠어요. 갓난아이를 두고 진도에 달려갈 수도 없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 무기력했고요.
할 수 있는 걸 찾다가 유가족들이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길을 막았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가 극에 달했어요. 생명이 제일 중요한데, 살려달라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이 사회에서 나도 그들과 함께 목소리내야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 때가 떠오르는지 말을 하면서도 눈물을 글썽였다.
"제가 교회를 다니는데요, 세월호 관련해서 어떤 목사님이 쓰신 글을 읽었어요. '슬퍼하고 분노만 하는 것은 진짜 슬퍼하는 게 아니다. 유가족들 편에서 같이 손잡아주고 차비 없는 사람에게는 차비를 주고 아픈 사람은 돌봐주고 유가족과 같은 목소리로 그들의 안타까운 일들을 널리 알려라. 언론이 제대로 얘기하지 않는 일들을 다른 곳에 전하는 행동이 진짜 행동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어요."
그 후 윤씨는 공중파 방송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내용들을 카페에 나르기 시작했다. 청라맘 회원들은 몰랐던 사실에 놀라며 분노했고, 또 다른 전파자가 돼 다른 곳으로 소식을 퍼 날랐다.
"사건이 터지고 열흘 정도 밥을 거의 안 먹고 울고 분노하면서 또 다른 소식이 없는지 인터넷만 봤어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어떤 엄마는 몸이 상해서 입원하기도 했어요. 이렇게 있다가는 모두 우울증 걸리겠다고, 처음에는 저처럼 너무 힘든 사람들이 서로 위로받고 힐링하자는 취지로 모이자는 제안을 카페에 했어요."
청라에 노란 물결이 시작되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 열흘 정도 지나자 청라맘 회원들은 모이기 시작했다. 너무 안타까워 추모의 촛불이라도 들자는 소박한 마음이었다. 청라지구에는 도심 한가운데 물길 따라 조성된 수변공원이 있다. 길게 이어진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이 많다. 공원 한 쪽에서 조용히 시작한 추모였다.
"처음엔 세 명이 아무 형식 없이 촛불 들고 노란 리본 달고 그냥 앉아 있었어요. 평일에 매일 저녁 8시부터 30분 정도 진행했어요. 나중엔 10명이 모이고 30~40명이 모이더라고요. 그러다가 한 명씩 발언하기도 했고요. 그렇게 꾸준히 진행하다가 누군가의 제안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자리를 고민했어요."
이들은 매주 금요일 추모촛불문화제를 열었다. 연주할 사람을 알아보고 체계적으로 문화제 순서를 정해 좀 더 갖춰진 추모를 시작했다. 지나가던 길을 멈춰 동참하는 사람들도 늘었지만,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아저씨와 할아버지들이 우리가 늘 앉았던 자리를 차지하고 '왜 애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느냐'고 욕을 하시더라고요. 우리의 목적은 희생된 분들을 추모하는 거라, 자리를 옮겨서 행사를 진행했어요."
한 번은 추모문화제를 위해 주변 상가의 도움으로 전기를 끌어와 행사를 진행하는데 행사 중간에 전기 사용을 협조해준 사장이 '왜 전기를 빌려주느냐는 항의가 들어와서 끊어야한다'고 얘기해, 겨우 사정해서 마쳤던 적도 있었다.
"그래도 추모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거 같아요. 청라맘 카페에서 같이 추모문화제 준비했던 회원 중 한 명이 신문광고를 제안했어요. 월드컵이 시작되면 세월호 사건이 묻힐 것 같아 '깨어있는 100인의 엄마들을 찾습니다'는 내용으로 카페에 올려 1만 원씩 모아 신문광고를 하겠다고 제안했는데, 24시간도 안 돼 100명이 넘게 입금했어요. 6월 2일자 <한겨레신문>에 냈는데, 광고비가 조금 모자랐는데 좋은 의도로 한다고 광고비를 깎아줬어요."
카페에서 사용하는 닉네임을 열거한 후, '101명 일동'으로 실렸다. 청라맘 회원 중 한 명은 딸과 함께 노란 리본에 옷핀을 달아 만든 배지를 2000개 만들었다. '주민들과 나누고 싶다. 비치해두면 손님들이 자유롭게 가져갈 상점을 찾는다'고 카페에 올렸더니, 연락이 쏟아졌다. 예쁜 바구니에 배지를 담아 20군데가 넘는 가게에 전달했다.
보수적인 남편도 변하게 한 진심
윤씨는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청계광장에서 진행한 범국민추모제에 한 번도 빠짐없이 참여했다. 다섯 살 된 첫째와 여섯 달 된 둘째를 혼자 데리고 간 적도 있고, 남편과 동행한 적도 있다.
"남편이 처음에는 너무 힘들어했어요. 제가 넋 나간 사람처럼 아이나 남편도 안중에 없이 슬픔에 빠져 살았거든요. 내 아이가 예쁜 만큼 희생자 유가족들한테 더 미안하고 슬픈 거예요. 처음엔 남편이 제가 이상해졌다고 화내고 싸우기도 했어요"
세월호 사건 초반에는 식사하는 것도 잊고 밤새 검색하고 퍼 나르느라 잠도 서너 시간밖에 못 잤다. 거의 새벽에 깨서 잠이 안 오고 잠자는 시간도 아까웠다. 다크서클이 생기고 몸이 점점 말라갔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는 남편은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윤씨는 남편과 대화하면서 남편의 입장도 이해했다. 추모의 행동을 멈추지는 않았지만 남편과 가족도 챙겨야겠다고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보수적인 성향의 남편도 세월호 소식에 관심을 가졌고 추모 행동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제가 졸지에 사회운동하는 거처럼 됐는데, 내가 활동할 수 있는 건 남편이 뒷받침 해줘서라고 얘기해요. 제가 더 열심히 활동할 수 있게 남편이 더 열심히 일하겠다고 해요. 정말 고맙죠."
알속에서 껍질을 깨고 나온 세상
"좀 이상해요.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경험이 많아서요. 기자와 인터뷰를 네 번씩이나 했어요. 그런데 가장 희한한 것은요, 자신의 안위만이 아니라 주변을 걱정하는 의식이 높은 분들과 만나고 자꾸 인연을 맺어요. 틀을 깨고 나온 느낌이랄까요? 놀라운 경험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의미 있는 사회 변화에 기여하고 싶어요."
색다른 경험의 또 하나는, 청라맘 카페에서의 경고 조치다.
"얼마 전 카페 회원 중 한 명이 제가 확인되지 않은 글을 올려 고소하겠다고 댓글을 달았어요. 카페 운영진 입장도 충분히 이해해요. 카페에서 분란이 발생하니까 정리 차원에서 불가피한 조치라고요."
청라지역 입주민들이 운영하는 카페 중에는 엄마에 한정하지 않은, 남녀노소가 자유롭게 드나드는 카페가 있다. 윤씨는 세월호 소식이 거의 없는 그 카페에 소식을 알리고 싶어 언급했다가 엄청난 댓글 공격을 받고 밀려나오기도 했다.
"많이 상처받았어요. 저를 정치선동꾼으로 몰아가더라고요.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세상도 많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렇지만 세월호 사건에 대해 분노하고 추모하는 사람이 훨씬 많아요."
상처에도 불구하고 계속 활동하겠다는 그녀에게 '보통이 아니'라고 말했다.
"아니에요. 저는 평범하고 보통이예요. 제가 지금까지 가만있었으니까 이렇게 됐다고 생각해요. 저처럼 평범한 사람이 움직여야 세상이 달라지지 않겠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윤씨한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가는 곳마다 주변 사람들이 저를 도와줘요. 제가 아이를 업고 안산에서 행진할 때 뒤에서 오던 청년이 기저귀 가방을 대신 들고 행진했어요. 청계광장에서 행진할 때도 파주에서 오신 엄마 두 분이 한 분은 제 가방을, 한 분은 제 아기를 업어주시고 행진 끝나고 지하철 수유실까지 동행해주셨어요.
청라에서 세월호 추모 촛불모임을 시작하고 같이 촛불 드는 엄마들 중에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청라맘들이 생각지도 않게 자꾸 저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세요. 참기름, 핸드메이드 노랑리본머리끈, 자녀가 읽은 유아동화책들, 홍삼즙, 빵, 아기간식 등을요. 저는 뭘 해드린 게 없는데 이제 저도 좀 베풀며 살아야겠어요'
서구 연희동 청라지구에 사는 윤지연(37)씨를 청라에 있는 한 커피숍에서 지난 5일 만났다. 칭얼대는 딸아이, 촛불문화제 추모 발언 때 함께 있던 아이를 어르고 달래느라 의자에 앉지도 못하면서 진지하게 인터뷰에 응하는 모습부터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 윤지연 카페 ‘달콤한 청라맘스’ 회원 ⓒ 김영숙
"그냥 청라지역에 사는 엄마들 카페예요. 소소한 가십거리에서부터 육아, 교육 등 다양한 주제를 나누는 커뮤니티예요. 카페 이름은 '달콤한 청라맘스(이하 청라맘)'예요."
청라국제도시에 입주한 주민은 7만여 명이라고 한다. 2011년 1월 개설한 이 카페에 등록한 엄마는 현재 1만3000여 명 정도다.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작년 가을, 서구에서는 SK인천석유화학 공장 증설 문제가 대두됐다. 유해물질을 배출하는 공장 증설에 반대하는 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청라맘 회원들도 '아이들을 유해한 환경으로부터 지켜내자'는 마음으로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
"남의 일이 아니다 싶었죠. 누군가 카페에 집회 참여를 제안했을 때, 적극적으로 참여했어요. 그때 둘째가 막달이라 만삭이었지만 함께 했죠. 그걸 계기로 내 가족만 바라봤던 시야가 주변으로 넓어졌어요."
SK인천석유화학 공장 증설 문제는 아직까지 이렇다 할 해결책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윤씨는 청라맘들의 목소리를 내는 데는 성공했다고 했다. 그 이후 세월호 침몰 사건이 터지면서 청라맘들은 달콤함을 넘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줍음 많은 소녀에서 당당한 엄마로
윤씨는 2012년 말 청라지구로 이사를 왔다. 인천에서 태어나 자라고 결혼까지 한 그녀는 어릴 때부터 수줍음이 많았다. 단둘이 대화할 때는 문제가 없지만 세 명 이상 모인 자리에서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느끼면 고통스러웠다. 대인기피증이라 느껴질 만큼 소극적인 그녀가 사람들 앞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형 참사가 벌어지고 수백 명이 죽었는데 책임 있게 대응하는 사람은 없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매일 벌어지는데 해결은 안 되고 있는 게 너무 혼란스러웠어요. 갓난아이를 두고 진도에 달려갈 수도 없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 무기력했고요.
할 수 있는 걸 찾다가 유가족들이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길을 막았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가 극에 달했어요. 생명이 제일 중요한데, 살려달라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이 사회에서 나도 그들과 함께 목소리내야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 때가 떠오르는지 말을 하면서도 눈물을 글썽였다.
"제가 교회를 다니는데요, 세월호 관련해서 어떤 목사님이 쓰신 글을 읽었어요. '슬퍼하고 분노만 하는 것은 진짜 슬퍼하는 게 아니다. 유가족들 편에서 같이 손잡아주고 차비 없는 사람에게는 차비를 주고 아픈 사람은 돌봐주고 유가족과 같은 목소리로 그들의 안타까운 일들을 널리 알려라. 언론이 제대로 얘기하지 않는 일들을 다른 곳에 전하는 행동이 진짜 행동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어요."
그 후 윤씨는 공중파 방송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내용들을 카페에 나르기 시작했다. 청라맘 회원들은 몰랐던 사실에 놀라며 분노했고, 또 다른 전파자가 돼 다른 곳으로 소식을 퍼 날랐다.
"사건이 터지고 열흘 정도 밥을 거의 안 먹고 울고 분노하면서 또 다른 소식이 없는지 인터넷만 봤어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어떤 엄마는 몸이 상해서 입원하기도 했어요. 이렇게 있다가는 모두 우울증 걸리겠다고, 처음에는 저처럼 너무 힘든 사람들이 서로 위로받고 힐링하자는 취지로 모이자는 제안을 카페에 했어요."
청라에 노란 물결이 시작되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 열흘 정도 지나자 청라맘 회원들은 모이기 시작했다. 너무 안타까워 추모의 촛불이라도 들자는 소박한 마음이었다. 청라지구에는 도심 한가운데 물길 따라 조성된 수변공원이 있다. 길게 이어진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이 많다. 공원 한 쪽에서 조용히 시작한 추모였다.
"처음엔 세 명이 아무 형식 없이 촛불 들고 노란 리본 달고 그냥 앉아 있었어요. 평일에 매일 저녁 8시부터 30분 정도 진행했어요. 나중엔 10명이 모이고 30~40명이 모이더라고요. 그러다가 한 명씩 발언하기도 했고요. 그렇게 꾸준히 진행하다가 누군가의 제안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자리를 고민했어요."
이들은 매주 금요일 추모촛불문화제를 열었다. 연주할 사람을 알아보고 체계적으로 문화제 순서를 정해 좀 더 갖춰진 추모를 시작했다. 지나가던 길을 멈춰 동참하는 사람들도 늘었지만,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아저씨와 할아버지들이 우리가 늘 앉았던 자리를 차지하고 '왜 애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느냐'고 욕을 하시더라고요. 우리의 목적은 희생된 분들을 추모하는 거라, 자리를 옮겨서 행사를 진행했어요."
한 번은 추모문화제를 위해 주변 상가의 도움으로 전기를 끌어와 행사를 진행하는데 행사 중간에 전기 사용을 협조해준 사장이 '왜 전기를 빌려주느냐는 항의가 들어와서 끊어야한다'고 얘기해, 겨우 사정해서 마쳤던 적도 있었다.
"그래도 추모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거 같아요. 청라맘 카페에서 같이 추모문화제 준비했던 회원 중 한 명이 신문광고를 제안했어요. 월드컵이 시작되면 세월호 사건이 묻힐 것 같아 '깨어있는 100인의 엄마들을 찾습니다'는 내용으로 카페에 올려 1만 원씩 모아 신문광고를 하겠다고 제안했는데, 24시간도 안 돼 100명이 넘게 입금했어요. 6월 2일자 <한겨레신문>에 냈는데, 광고비가 조금 모자랐는데 좋은 의도로 한다고 광고비를 깎아줬어요."
카페에서 사용하는 닉네임을 열거한 후, '101명 일동'으로 실렸다. 청라맘 회원 중 한 명은 딸과 함께 노란 리본에 옷핀을 달아 만든 배지를 2000개 만들었다. '주민들과 나누고 싶다. 비치해두면 손님들이 자유롭게 가져갈 상점을 찾는다'고 카페에 올렸더니, 연락이 쏟아졌다. 예쁜 바구니에 배지를 담아 20군데가 넘는 가게에 전달했다.
보수적인 남편도 변하게 한 진심
▲ 윤지연 카페 ‘달콤한 청라맘스’ 회원 ⓒ 김영숙
"남편이 처음에는 너무 힘들어했어요. 제가 넋 나간 사람처럼 아이나 남편도 안중에 없이 슬픔에 빠져 살았거든요. 내 아이가 예쁜 만큼 희생자 유가족들한테 더 미안하고 슬픈 거예요. 처음엔 남편이 제가 이상해졌다고 화내고 싸우기도 했어요"
세월호 사건 초반에는 식사하는 것도 잊고 밤새 검색하고 퍼 나르느라 잠도 서너 시간밖에 못 잤다. 거의 새벽에 깨서 잠이 안 오고 잠자는 시간도 아까웠다. 다크서클이 생기고 몸이 점점 말라갔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는 남편은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윤씨는 남편과 대화하면서 남편의 입장도 이해했다. 추모의 행동을 멈추지는 않았지만 남편과 가족도 챙겨야겠다고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보수적인 성향의 남편도 세월호 소식에 관심을 가졌고 추모 행동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제가 졸지에 사회운동하는 거처럼 됐는데, 내가 활동할 수 있는 건 남편이 뒷받침 해줘서라고 얘기해요. 제가 더 열심히 활동할 수 있게 남편이 더 열심히 일하겠다고 해요. 정말 고맙죠."
알속에서 껍질을 깨고 나온 세상
"좀 이상해요.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경험이 많아서요. 기자와 인터뷰를 네 번씩이나 했어요. 그런데 가장 희한한 것은요, 자신의 안위만이 아니라 주변을 걱정하는 의식이 높은 분들과 만나고 자꾸 인연을 맺어요. 틀을 깨고 나온 느낌이랄까요? 놀라운 경험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의미 있는 사회 변화에 기여하고 싶어요."
색다른 경험의 또 하나는, 청라맘 카페에서의 경고 조치다.
"얼마 전 카페 회원 중 한 명이 제가 확인되지 않은 글을 올려 고소하겠다고 댓글을 달았어요. 카페 운영진 입장도 충분히 이해해요. 카페에서 분란이 발생하니까 정리 차원에서 불가피한 조치라고요."
청라지역 입주민들이 운영하는 카페 중에는 엄마에 한정하지 않은, 남녀노소가 자유롭게 드나드는 카페가 있다. 윤씨는 세월호 소식이 거의 없는 그 카페에 소식을 알리고 싶어 언급했다가 엄청난 댓글 공격을 받고 밀려나오기도 했다.
"많이 상처받았어요. 저를 정치선동꾼으로 몰아가더라고요.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세상도 많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렇지만 세월호 사건에 대해 분노하고 추모하는 사람이 훨씬 많아요."
상처에도 불구하고 계속 활동하겠다는 그녀에게 '보통이 아니'라고 말했다.
"아니에요. 저는 평범하고 보통이예요. 제가 지금까지 가만있었으니까 이렇게 됐다고 생각해요. 저처럼 평범한 사람이 움직여야 세상이 달라지지 않겠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윤씨한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가는 곳마다 주변 사람들이 저를 도와줘요. 제가 아이를 업고 안산에서 행진할 때 뒤에서 오던 청년이 기저귀 가방을 대신 들고 행진했어요. 청계광장에서 행진할 때도 파주에서 오신 엄마 두 분이 한 분은 제 가방을, 한 분은 제 아기를 업어주시고 행진 끝나고 지하철 수유실까지 동행해주셨어요.
청라에서 세월호 추모 촛불모임을 시작하고 같이 촛불 드는 엄마들 중에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청라맘들이 생각지도 않게 자꾸 저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세요. 참기름, 핸드메이드 노랑리본머리끈, 자녀가 읽은 유아동화책들, 홍삼즙, 빵, 아기간식 등을요. 저는 뭘 해드린 게 없는데 이제 저도 좀 베풀며 살아야겠어요'
덧붙이는 글
<시사인천>에 실림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