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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사람들은 잊지 말라고..." 기억과의 전쟁 시작된 세월호

[현장] 두 달 넘은 '세월호 참사'... 단원고에서 합동분향소까지

등록|2014.06.17 14:39 수정|2014.06.17 14:39
세월호 참사 두 달째에 이르는 지난 14일 토요일. '세월호 안산'의 모습을 담기 위해 오후 1시에 사무실에서 단원고로 출발했다.

단원고 정문에 마련됐던 추모 게시판과 추모 글 등은 말끔하게 치워졌다. 너무 깨끗해 한동안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얼마 전까지 이 자리에 서서, 수많은 이들이 간절한 마음을 모아 기원했던 그 기억조차 지운 것처럼 깨끗했다.

▲ 세월호 참사 60일째인 6월 14일 단원고 정문앞. 단원고 동판 아래와 왼편 담벼락을 따라 마련됐던 추모 게시판과 글 등이 말끔히 치워졌다. 추모 게시판이 있던 자리임을 가리키는 상징물조차 없다. ⓒ 박호열


없어진 게시판 때문일까, 아니면 '놀토'라 그럴까. 학교는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고, 오가는 학생들도 없었다. 인근 어르신들로 늘 북적이던 정문 맞은편 정자도 텅 비었다. 정자 뒤 원고잔공원으로 오르는 길도 한적하긴 매한가지였다. 

정문에서 올림픽기념관으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나무에 묶어 둔 줄에서는 노란 리본이 바람에 휘날리며 사근거렸다. '우리는 4월 16일을 잊지 않아', '단원고는 우리가 지킬게, 걱정마'라고 말하듯이.

노란 리본 맞은편 신유빌라가 끝나는 지점에 자리잡은 세탁소 문은 잠겨 있다. 단원고 2학년 6반 전아무개군의 부모가 운영하던 세탁소다. 전군은 뒤늦게 부모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세탁소는 여전히 닫혀 있었다.

▲ 올림픽기념관 건너 단원고로 오르는 길목 왼편에 있는 세탁소. 단원고 2학년 전현탁군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세탁소는 여전히 문이 닫혀 있다. ⓒ 박호열


기억한다. 전군의 어머님이 세탁소 현관문에 무사귀환 글을 붙였던 시민들에게 띄운 편지 글을.

"…아들을 데리고 안산으로 돌아왔는데 세탁소 주변에 노란편지가 가득했습니다.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그러곤 한참을 울었습니다. 못난 엄마지만 그래도 우리 아들을 잘 키웠구나. 내세울 것 없는 부모지만 부끄럽지 않게 잘 키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진도에서 엄마들끼리 수학여행 보내면서 용돈을 얼마 줬는지 서로 물어봤습니다. 대부분이 '10만 원씩 줬다'는데 저는 2만 원밖에 못 줘 미안해 또 울었습니다. 그런데 현탁이를 찾았을 때 지갑에 2만 원이 그냥 있었습니다…

수학여행 전날, 이상하게 아들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생전 처음이었어요. 쓰다가 마음에 안 들어 찢어 버렸던 종이를 아직 갖고 있습니다. 겨우겨우 편지를 써 아들 몰래 가방 앞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듬직하게 잘 커줘서 고맙고 엄마는 네가 있어 정말 행복하다'라고 적었죠…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이 비극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아직도 바다에서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가 많습니다. 이들이 하루빨리 돌아오도록 기도해주세요. 그래서 보내는 길이라도 온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그 마음들, 정말 고맙습니다."

단원고를 지나 화랑유원지 합동분향소로 가는 도로 위로 햇살이 일직선으로 내리꽂힌다. 어머니의 편지 중 뒤늦게 아들을 되돌려준 팽목항 밤바다를 향해 "행복은 이걸로 끝이다. 이놈아!"하고 절규했다던 내용이 떠올라 순간 머릿속이 어질했고, 핸들을 잡은 손은 떨렸다.

▲ 화랑유원지 주차장에서 합동분향소로 가는 길. 적당히 바람이 불어 시원한 길에 오가는 길손이 한 명도 없다. 느릿느릿 이 길 끝까지 걷는 동안 추모객이나 지나가는 길손은 단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 박호열


▲ 화랑유원지 합동분향소가 보이는 길에 노란리본이 바람에 나부낀다. 하지만 분향소를 찾는 추모객들 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분향소 앞 추모 게시판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 박호열


합동분향소 가는 길은 '조용'... 드문드문 추모객 보여

화랑유원지 합동분향소 3주차장. 오후 2시 한낮의 더위 때문일까. 주차장 입구를 정리하던 이들도 없다. 30여 대의 자동차들만이 숨을 헐떡이며 더위와 다투고 있다. 분향소로 가는 길. 외지인의 출입을 한사코 마다하는 외진 산책로마냥 사위가 조용하다. 그리고 길 위엔 아무도 없었다.

길을 꺾어 합동분향소가 보이는 곳에 이르자 추모객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혼자 온 이들은 없고, 두세 사람씩 짝을 지어 왔다. 그늘녘 벤치에는 웃옷을 벗어젖힌 장정 둘이 낮잠에 곯아떨어져 있다. 세상만사를 잊은 듯 평온한 모습이다.

합동분향소 앞 추모 게시판에 남녀가 서서 추모 글을 살피고 있다. 젊은 여자는 햇살을 피하려는 듯 남자에게 재촉하고,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뚫어져라 읽고 있다. 색 바랜 종이 때문에 내용 판독이 잘 안 되는 모양이다. 결국 여자는 남자를 남겨 놓고 쌩하니 돌아서 종종걸음으로 가버린다.

정면에서 본 합동분향소 앞 광장은 신기할 정도로 텅 비었다. 단 한 사람도 없다. 단원고 정문 앞에서 느꼈던 당혹감보다 몇 배 더 곤혹스러웠다. 광장 양 옆에 친 천막 안에 남아 있던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모이는 게 느껴진다.

▲ 기자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화랑유원지 합동분향소 정문. 멀리 분향소 입구에 자원봉사 안내자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한참을 서서 기다렸지만 분향소로 들어가는 추모객을 촬영할 수 없었다. ⓒ 박호열


▲ 화랑유원지 합동분향소 오른편에 마련된 유가족 대기실 천막. '철저한 진상규명 무조건 원합니다' 등의 펼침막이 걸려 있다. 대기실 안에는 유가족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몇 분이 남아 있었다. ⓒ 박호열


뙤약볕 아래서 혼자 서 있는 기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살핀다. '대체, 저 놈은 머하고 있는 거지?' 그들의 시선이 걸친 옷들을 헤치고 부끄러운 속살을 파고들 듯 집요하다.  빨리 도망쳐야 할 것처럼, 당혹스러웠다.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눌러대며 속으로 외쳤다. '난 분향하러 온 추모객이 아니에요'라고.

분향소 오른편에 마련된 유가족 대기실을 촬영하기 위해 카메라를 드는 순간 유가족과 눈이 마주쳤다. 가벼운 목례를 한 후 셔터를 눌렀다. 분향소 안에는 열댓 명의 추모객이 애도를 표하고 있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행이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곳마저 자원봉사자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면 혼자 어떻게 그 절망감을 감당했을까,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했다.

합동분향소에는 14일 기준으로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 위패와 영정 287위(학생 244명, 교사 10명, 일반인 33명)가 모셔져 있다. 추모객들은 아주 천천히 영정을 살폈다. 40대 아주머니 두 사람은 연신 눈시울을 닦는 모습이다. 분향소 양 옆에 설치된 전광판에는 추모 문자 메시지가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해서 올라왔다.

▲ 화랑유원지 합동분향소 안에서 분향을 하고 있는 추모객들. 충분히 시간 여유를 갖고 세월호 침몰로 희생당한 이들의 영정사진과 위패 등을 둘러보며 조의를 표하고 있다. ⓒ 박호열


▲ 화랑유원지 합동분향소 안에 설치된 추모 전광판은 세월호를 잊지 않은 시민들이 보낸 문자 메시지를 일정한 간격으로 되풀이해서 올리고 있다. ⓒ 박호열


"남은 열두 명의 아름다운 이들은 모두 어디에 있나요. 제발 기다리는 가족들이 손이라도 잡아볼 수 있게 돌아오세요."

분향을 마친 추모객들은 출구에 마련된 '수습 및 진상규명을 위한 서명운동'대 앞에 서서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명을 했다. 그들 중에 밖에서 횡 하니 혼자 토라졌던 여자와 그의 남자가 보인다. 여자는 울고 있고, 남자는 가볍게 어깨를 감싸고 토닥여준다.

이날 친구들과 함께 분향을 하러 온 중학교 3학년 학생들과 분향소 밖에서 만났다. 학교와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학생들은 인터뷰에 응했다. 네 명은 학교 친구였다. 둘은 같은 반, 둘은 다른 반. 토요일 오후, 이 아이들이 분향소를 찾은 이유는 뭘까?

▲ 화랑유원지 합동분향소에서 분향을 마친 추모객들이 출구에 마련된 세월호 수습 및 진상규명을 위한 서명운동 앞에서 서명을 하고 있다. 서명을 마친 중학생들과 밖에서 인터뷰를 했다. ⓒ 박호열


"분향소는 각자 한두 번씩 왔었어요. 저는 부모님하고 왔고, 얘들은 친구들이랑 왔고. 오늘 온 것은 사회수업 조별 과제로 내가 사는 지역에 대해 알아 오는 게 나와서 같이 왔어요. 우리 조 친구들하고 주제를 뭐로 할까하다가 세월호 사고의 현재 모습을 알아보자고 결정해 대표로 온 거예요."

"지난번에 부모님하고 왔을 때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한참 기다렸어요. 추모하는 시간도 너무 짧아서 대충 지나치듯이 봤는데 오늘은 단원고 형하고 누나들 얼굴까지 자세하게 봤어요. 그때는 (영정)사진이 엄청 많아서 멍했는데, 오늘 보니까 가슴이 막 뛰면서 이상해지더라고요."

"집에서 저녁에 뉴스를 볼 때 아빠가 세월호가 너무 빨리 잊혀진다고 화를 내시면서 안산에 사는 우리는 그러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그때는 그 말이 뭔지 잘 몰랐거든요. 근데 여기 오늘 와보니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저희도 사람들이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어요. 토요일이라 많이들 올 줄 알았는데 너무 없어서 실망했어요. 사람이 하도 없어서 사진 찍기도 뭐 했어요."

"아직도 단원고 형들을 다 못 찾았다는 거 알고 있거든요… 이거는 만약인데, 우리가 배사고 나서 바다에 잠기면 어떻게 되나 생각하니까 너무 끔찍한 거예요(이 대목에서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한참을 설왕설래했다). 어른들이 제대로 구하지도 못하는 데다가, 시신도 찾지 못하면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아프실까 생각하니까 어디를 가든 나 혼자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아이들과의 인터뷰가 끝나고 유가족 대기실 뒤편에 있는 흡연석에서 담배를 최대한 깊게 빨아들였다. 자기들이 사고 났을 경우 어떻게 될지에 대해 벌겋게 흥분한 모습으로 격론(?)을 벌이던 아이들이 눈에 자꾸 밟혔다. 횡설수설하긴 했지만 아이들이 내린 결론은 야무졌다. '어른들과 정부는 믿을 게 못 된다는 것.'

어디선가 컴퓨터 자판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딜까, 고개를 내밀고 살펴보니 '시민기록위원회' 천막이 눈에 들어온다. 천막 안에 활동가로 보이는 남자가 부지런히 자판을 치고 있다. 인터뷰를 위해 잠시 기다렸으나 요지부동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진지해 사진만 찍고 발길을 돌렸다.

▲ 세월호 참사 이후 안산 시민들의 기억과 기록들을 수집해 역사로 남기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시민기록위원회 천막에서 한 활동가가 작업을 하고 있다. 기록위원회는 지난 4일 합동분향소 뒤에 설치됐다. ⓒ 박호열


'세월호 기억 저장소' 건립 추진... 잊지 않겠습니다

세월호 침몰사고 재난극복을 위해 범시민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는 시민기록위원회는 세월호 참사 이후 안산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기억과 기록들을 수집해 역사로 남기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세월호의 눈물을 기억하고 무책임한 박근혜 정부를 근본부터 개혁해 나가기 위한 '기억투쟁'은 이 뿐만이 아니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에서 고잔동에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세월호 기억 저장소'는 세월호 관련 기록들을 수집해 진상 규명과 향후 치유활동에 활용하기 위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기억 저장소는 사고 초기부터 희생자와 가족들이 남긴 각종 기록, 자원봉사자들이 현장에서 찍은 사진과 동영상, 관련 신문기사 등을 모으고 있다. 또한 희생자와 가족들의 사연, 팽목항 자원봉사자들의 선행, 일반 시민 상대의 구술, 취재기자들의 못 다한 이야기 등도 본격적으로 채록할 계획이다. '미안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행동하겠습니다'라며 저마다 세월호와 약속했던 기억이 이제 일상생활 속에서의 기억투쟁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투쟁을 하는 이 시간, 진도 팽목항 앞바다에는 아직도 단원고 학생 6명, 교사 2명, 승무원 1명, 일반시민 3명 등 12명의 실종자가 수습되지 못한 채 수장되어 있다. 그에 앞서 학생 244명, 교사 10명, 승무원 8명, 일반인 31명 등 293명이 숨진 채 가족의 품으로 돌아 왔다.

우리는, 4월 16일을, 잊지 않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그래스루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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