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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의병은 '친일옹호 총리후보'를 어떻게 볼까

<한국의병사> 펴낸 이태룡 박사... 고조선~국권회복기 의병활동 집대성

등록|2014.06.16 21:34 수정|2014.06.16 21:34

▲ (사)의병정신선양중앙회 부설 의병연구소장인 이태룡 박사는 최근 '화승총 베개 삼았던 국권회복기 배달겨레의 의병투쟁'을 담은 책 <한국의병사> 상-하권을 펴냈다. ⓒ 윤성효


배달겨레 5000년 역사 중 1000여 차례의 외적침략이 있을 때마다 일어났던 의병(義兵)들은 요즘 '대한민국'에 사는 후손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일제 부역'을 했던 친일파들의 후손이 정치를 하고, 국무총리 후보자가 '일제'와 '친일'을 옹호하는 발언을 내뱉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선조 의병'은 뭐라고 할까.

이태룡 문학박사가 펴낸 책 <한국의병사> 상-하권에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담겨 있다. 상권에는 '고조선 시대부터 병자호란까지', 하권에는 '화승총 베개 삼았던 국권회복기'까지의 배달겨레 의병투쟁이 담겨 있다.

1980년대부터 의병연구를 시작했던 그는 '의병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이 분야의 첫 박사학위였다. 그는 <최익현의 순창의병과 유소 연구> 등 20여 편의 논문과 <한국 근대사의 의병투쟁> 등 20여 권의 책을 펴냈는데, 우리나라 의병 연구 중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다.

'정치사' '농학사'처럼 '의병사'도 있어야 하고, 대학에 '의병학과'도 있어야 한다는 게 이 박사의 생각이다. 그는 책머리에 "의병은 외적이 침략했을 때 스스로 일어선 민병이니, 이를 정리하는 데는 외침을 살펴보아야 하고, 왜 외침이 있게 되었나를 또 살펴보아야 하는 작업이니, 복잡하고 힘이 드는 작업"이라고 설명해놨다.

그러면서 그는 "의병의 삶은 누가 정리할 수 있을까? 의병학과가 없으니, 누가 정리해야 할까? 누군가 정리를 하면, 뒤에 이를 고치고, 또 고치고, 수십, 수백 번을 정리하면 배달겨레의 의병사로 거듭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료·사진 80여 장 수록... 방대한 자료

이태룡 박사는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과 중국의 사료와 사진 80여 장을 곁들였다. 사료 중에는 임진왜란 때 전라도 김제 등지에서 벤 코 3369개의 영수증, 한말 일본 남부군 사령관이 백마를 타고 의병학살을 독려하는 사진 등도 있다.

한·거란·홍건적·여진·몽골·일본 등 이민족은 끊임없이 침략해왔고, 외적을 물리칠 때마다 의병이 일어났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임진왜란·병자호란 때 의병과 한말(국권회복기) 의병을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됐는데, 오랫동안 의병을 연구하거나 자료를 수집해 온 이태룡 박사는 이번에 한반도의 방대한 의병사를 정리한 것이다.

▲ 이태룡 문학박사는 중국 등에 흩어져 있는 자료까지 모아 책 <한국의병사> 상-하권을 펴냈다. 위 사진은 중국에 있는 ‘통구 고분군’으로 고구려시대의 고분군으로 추정되며, 아래 사진은 ‘졸본성’(훗날 오녀산성)이다. ⓒ 이태룡


저자는 박은식(朴殷植)의 <한국통사>에서 규정한 '의병'과 '칭탁의병' '위국의병'을 사례를 들어 설명해놨다. 저자는 <단군고기> <한서> <후한서> <사기> <삼국사기> <수서> <당서> 등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사서도 참고했다.

우리 의병에 대해 처음으로 뜻매김을 한 사람은 영국인이었다. 이 박사는 "국권회복기 영국신문 <데일리 메일>의 대한 특파원이었던 매켄지가 있었다, 그는 의병투쟁을 목격하고 기술한 <한국의 비극>에서 의병을 '정의의 군대(Righteous Army)'라고 했다"라면서 "그는 의용군(Volunteer)'이라는 일반적인 단어보다는 당시 우리 의병에 적합한 용어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려 때는 '승병(僧兵)'의 활약이 컸다. 몽골이 침략해 왔을 때 승려 김윤후는 농민과 승려 등으로 구성된 의병을 지휘해 '살례탑'(몽골 장수)을 화살로 쏘아 죽임으로써 몽골군을 서둘러 철수하게 했다.

"여느 곳의 경우에는 수백 명의 몽골군이 온다는 소리만 들어도 관리들이 달아나거나 항복하였는데, 수천 명의 몽골군을 상대로 변변찮은 무기와 훈련을 받지 않은 민중을 규합하여 70일 동안 항쟁을 벌여, 결국 몽골군을 퇴치하였다는 것은 너무나 큰 승전보였다. 당시 개경을 떠나 강화도에 있었던 집권층은 김윤후를 '상장군(정3품)'으로 삼았고, 의병들에게 벼슬을 내렸다."(본문 중에서)

임진왜란 때 의병에 대해 저자는 "왜군의 침범으로 국왕이 북으로 피난길에 올랐다는 소식에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나면서 왜국을 물리쳤다"라면서 "손쉽게 조선 관군을 격파했던 왜국으로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의병들로 인하여 조선 국왕을 붙잡지 못했고, 나아가 조선 정복의 꿈을 이룰 수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의병(장)의 기개는 어떠했을까. 조헌(趙憲, 중봉. 1544~1592) 선생을 보면 의병의 기개를 짐작할 수 있다. 조 선생은 "오늘은 한번 죽음이 있을 뿐이니 하나의 의(義)자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라" "대장부가 죽으면 그만이지, 구차하게 살 수는 없다"라는 말을 남기며 전투를 독려했다.

저자 이 박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사를 정리했다. 그는 "왜군이 침략했을 때 반란을 일으킨 노예와 빈민들도 상당수 있었다"라면서 "그들은 그동안 부패한 양방․관료들에게 가혹한 착취와 천대를 받은 나머지 이러한 기회에 복수하기 위해 관아를 파괴하고, 혹은 양반을 살해하여 그 재산을 탈취하고, 심한 자는 적에게 아부하여 입신하기를 도모하기도 하며, 심지어 자칭 왜군이라 하여 왜복을 입고 왜군에 가담하기도 하였다"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배달겨레 대부분은 단결하여 나라를 지키기 위해 떨쳐 일어섰다. 관군이 도처에서 패하고 국토는 왜군에게 유린되고, 겨레와 나라의 앞날이 바람 앞에 등불 같이 위태하니, 나라의 부름을 받지 않고 스스로 의병이 되어 왜군을 물리쳤던 것이요, 왜군의 침략에 맞서 거족적인 궐기를 했던 것이다. 의병을 주도했던 의병장은 대부분 전직 관리나 유생들이었으나, 의병은 민중이었으며, 그들이 단결하여 무기를 잡고 싸웠던 것이다."(본문 중에서)

한민구 국장부장관 후보의 조부, 한봉수는?

갑오왜란(1884)부터 국권회복기 당시의 의병은 어땠을까. 이태룡 박사는 "본격적인 의병은 일제에 의해 왕비가 참살당하고 이어 단발령이 내리자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게 됐다"라면서 "일제가 부왜인과 함께 군대를 동원해 궁궐을 침범해 왕비를 참살한 을미왜란에 대해 의분을 참지 못하고 전국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은 '문석봉'이었다"라고 소개했다.

▲ 이태룡 박사가 펴낸 <한국의병사>에 실려있는 ‘코 영수증’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전라도 김제 등 지방에서 벤 코 3369개를 보내고 받은 영수증인데, 현재 일본 오사카성 천수각에 소장하고 있다. ⓒ 이태룡


이 책에는 홍주의병, 안동의병, 춘천의병, 관동의병, 호좌의병, 진주의병, 호남의병, 황해도의병, 관서·관북의병 등 전국 각 지역의 이름을 붙인 의병봉기와 이를 이끌었던 인물 그리고 그들의 활약상이 기록돼 있다. 이 책에는 국방부장관에 내정된 한민구 후보의 조부로 알려진 '한봉수'에 관한 내용도 있다.

"의진에 참여하여 의병투쟁을 벌였던 금산 출신 박대선·황목룡과 옥천 출신 김성권은 모두 15년 징역형을 받았으나 한때 의진의 부장(副將)이었던 청주 출신 한봉수(韓鳳洙)는 궐석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의병장이 숨은 곳을 가르쳐 줄테니 자신의 죄를 면죄해 달라'고 일본 경찰과 협상을 벌여 경술국치 대사령 이후 재판에서 면소 처분을 받았다."(본문 중에서)

'연해주의병'도 있었다. 이태룡 박사는 "연해주의병은 1908년부터 수 차례 두만강을 건너 공격했고, 국내 의진과 연계하여 의병투쟁을 벌였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라며 "마침내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병장이 하얼빈에서 일제침략의 괴수 이토를 처단하자 다시 의병투쟁의 기운이 세차게 일어나게 돼 경술국치 이후까지 이어졌다"라고 소개해놨다.

"언제부터인지 러시아나 중국, 유럽 각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순국지사나 애국지사의 후손 대하기를 가난한 이방인쯤으로 생각하고, 그들이 서훈 신청을 수차례 하여도 국가보훈처에서는 이른바 '자료 미비'라고 하여 후손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있다. 자료가 미비하면 국가가 나서서 보완해야지, 배우지 못한 후손들이 어떻게 자료를 찾아낸단 말인가."(본문 중에서)

이태룡 박사는 의병 관련 자료를 찾아내 국가보훈처에 서훈신청을 하기도 했다. 2008년부터 현재까지 그 숫자가 무려 828명에 이른다.

한편, 이 박사는 이번에 <국권회복기 고창 동학농민혁명과 의병> <국권회복기 무주·덕유산 의병>이란 책도 펴냈다. <한국의병사>에 대해, 이태룡 박사의 스승인 려증동 경상대 명예교수(국문학)는 다음과 같이 칭찬했다.

"참으로 큰일을 했다."

▲ 이태룡 문학박사는 최근 <고창 동학농민혁명과 의병>, <무주-덕유산 의병>이라는 제목의 책 두 권을 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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