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술자리서 "노조 만들자"에 권고사직... "이래도 되나요?"

노조 자체를 거부하는 기업과 정부... 19일 전교조 법외노조 판결에 거는 기대

등록|2014.06.18 15:11 수정|2014.06.18 15:11

▲ 전교조 해직교사들이 2013년 10월 30일 오전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정부의 '전교조 법외 노조 통보'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전교조 설립취소 처분' 철회를 주장했다. ⓒ 이희훈


"혹시 저 기억하세요? 이것 참, 이렇게 만나네요. 하나도 안 변했어요. 옛날 얼굴 그대로라서 전 바로 알아봤네요."

파란색 와이셔츠에 잘 정돈된 머리 스타일, 한 손에는 양복을 접어서 걸치고 다른 한 손에는 까만 가죽 서류가방을 든 채로 내가 일하는 근로자복지센터에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누가 봐도 한눈에 영업사원임을 알 수 있는 말쑥한 인상의 30대 중반 남성이다.

가끔씩 센터에 찾아오는 카드나 보험 판매원이거니 했는데 갑자기 알은척을 해서 적잖이 놀랐다. 누굴까? 순간 기억을 더듬으며 머릿속에 여러 얼굴을 떠올려 봤지만 도무지 누구인지 모르겠다.

"아, 누구시죠? 죄송한데, 잘 모르겠네요. 저를 어떻게 아시죠?"

나는 멋쩍게 다시 물었다. 알고 보니 근 20년 전 대학생 시절 알고 지냈던 후배였다. 서로 단과대학이 달라서 얼굴을 자주 보던 사이는 아니지만 용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근로자복지센터에 찾아온 이유는 노동 상담을 받기 위해서였다. 후배는 70여 명 정도의 중소규모 회사에 다니며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을 맡고 있었다. 며칠 전 회사 회식 자리에서 직원들끼리 회사의 여러 가지 불만 사항을 이야기하다가 흥이 올라 '그럼, 차라리 노사협의회 말고 노동조합을 만들자'는 의견까지 나왔다고 한다.

처음부터 노동조합을 준비하기 위해 모인 자리는 아니지만 일사천리로 진행되면서 위원장, 회계감사 등의 구체적 역할까지 이야기가 되었다. 대다수의 직원들이 후배를 위원장으로 추천했고 회식 자리는 마치 노조 결성식처럼 흘러갔다. 다음 날, 이렇게 해서 노동조합까지 결성되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술자리의 약속이라는 게 대부분 그렇지만 어제의 회식 자리에서 오고갔던 이야기를 책임지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노조' 말만 나왔는데 권고사직... "이래도 되는 거예요?"

만일 여기서 끝났다면 후배는 근로자복지센터에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회식 자리에서 노동조합 이야기가 나왔다는 사실이 회사 간부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곧바로 회사 인사담당이 후배에게 면담을 요구했다. 인사담당은 후배에게 사직을 받아들이라는 말과 함께 만일 사직을 거부할 경우 강원도 지점으로 발령을 내겠다고 했단다.

실제로 노동조합을 만든 것도 아니고, 단순히 말이 오갔을 뿐이다. 공식적으로 위원장에 선출된 것도 아니고 추천을 받았을 뿐이었다. 이런 경우 인사 발령을 거부하면 사실상 회사가 전권을 가지고 있는 인사권을 침해한 것으로 간주해 얼마든지 징계에 의한 해고가 가능하다. 사실상의 해고 통보인 것이다.

이때 방법은 회사 권고대로 일단 인사 발령에 따른 뒤 부당노동행위 여부를 다투든가, 실업급여라도 받기 위해 권고사직을 수용하든가 둘 중 하나다. 현실적으로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말에 한껏 풀이 죽은 후배를 마주하고 앉아 있기가 참 미안했다.

▲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경남지부는 2013년 11월 5일 오전 경남도교육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교조에 대한 근거 없는 법외노조 통보와 그 후속조치들을 규탄한다"고 밝혔다. ⓒ 윤성효


"다음에 다시 한번 들르죠. 저도 고민 좀 더 해볼게요. 그런데 노동조합은 헌법에도 있는 국민의 기본권 아닌가요? 인사권을 빌미로 이렇게 해도 되는 거예요?"

노동조합 활동은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이지만 현실에서는 또 다른 법률적 형식에 의해 간단하게 부정되는 경우가 많다. 합법의 탈을 쓴 위법, 탈법, 불법이 공공연히 벌어지는 것이다.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에 대한 법원의 1심 판결이 19일 내려진다. 법률적 핵심 쟁점은 전교조 규약이 현행 노동조합법과 교원노조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노동부는 해직자의 조합원 가입을 허용하고 있는 전교조 규약 부칙 제5조가 교원노조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노동조합법 시행령 9조2항에 따라 '노조 아님'을 통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법리공방이 종결된 사안이 아니며 국제노동기구와 인권위원회 권고 등 국제적, 보편적 기준을 충족시키지도 못하는 것이다.

19일 전교조 법외노조 판결... 정부부터 노동기본권 인정해야

노조법 시행령 9조2항은 대표적 노동악법으로 손꼽히던 옛 노조법의 노동조합 해산명령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제도는 1987년 6월항쟁 직후 여야 합의로 삭제되었는데, 노태우 정부가 국회 심의를 피해 법률이 아닌 시행령으로 끼워 넣은 것이다. 노동조합법에는 이미 설립된 노조의 설립을 취소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 규정이 없다. 대법원 판례에도 노조 설립을 취소할 때는 공익성을 중대하게 침해했을 경우여야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노조 설립 문제는 노동자의 단결권과 관련된 국민의 기본권이다. 정부는 헌법에 보장된 노동자의 자주적 단결권이 침해된다는 비판에 대해서 묵묵부답이다. 만일 전교조에게 법외노조라는 판결이 내려진다면 비단 전교조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전반에 영향을 미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여전히 노동조합을 빨갱이로, 기업을 망치는 세력으로 매도하고,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기업들은 이번 전교조 법외노조 판결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법원이 정부의 손을 들어준다면 그나마 형식적으로 지켜오던 노동 기본권 보장은 모조리 묵살될 것이다. 정부가 솔선수범해서 노동 기본권을 부정한다면 과연 어떤 기업이 노동 기본권을 지키려 노력하겠는가?

후배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그냥 억울하지만 권고사직을 받아들이기로 했단다. 가족과 떨어져서 기약 없이 강원도에서 근무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노동조합도 없이 회사를 상대로 법정 다툼을 이어갈 용기도 없고 무엇보다 회사의 치졸한 처사에 실망이 컸기 때문이었다.

이제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혹여나 억울하게 회사를 그만두고 근로자복지센터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날까 걱정이다. 법원의 정당한 판결로 이런 걱정이 기우에 그치기를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최재희 기자는 서울 구로구근로자복지센터 센터장입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