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백남준, 14년간 자신을 따라다닌 여자와 결혼하다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할 때다⑬] 미국에서 TV작업, 독일에서 교수(1974-1979)

등록|2014.06.19 16:59 수정|2014.06.19 16:59
[1부] 백남준의 달과 TV, 몽골과 인류학

▲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 전시장면. 뒷벽에 "황색재앙은 바로 나다(Yellow PERIL! C'est moi!)"라는 글귀가 보인다. 앞 작품은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전시된 작품 중 하나로 제목은 '칭기즈칸의 귀환' 백남준아트센터 소장품 ⓒ 김형순


이영철 백남준아트센터 초대관장도 "백남준은 몽골코드로 파악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백남준과 몽골, 달과 TV의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알아보자.

백남준은 "나는 내 피 속에 흐르는 '시베리안-몽골리안' 요소를 좋아한다"거나 1992년 김용옥과의 인터뷰에서는 "난 몽골을 좋아해. 몽골사람하고 우리하고 3천 년 전에 헤어졌는데 그 때 우리 걸 몽골사람은 지금도 보존하고 있어 [...]"라든가 자신의 혈통에 북방유목민 몽골의 문화심층구조가 깊이 잠재하고 있음을 털어놓는다.

백남준은 1962년에는 "황색재앙! 그건 바로 나다"라고 선언했고, 1965년에는 독일아헨공대에서 바지를 내리는 '황색의자'라는 퍼포먼스를 하면서 몽골반점을 내보였고 1977년에는 "나의 환희는 거칠 것이 없어라"고 했다. 그의 이런 자신감 넘치는 모든 언행은 결국 자신이 몽골후손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황색 재앙(黃禍)'은 칭기즈칸이 유럽을 공포에 질리게 했다는 뜻인데, 백남준은 문화칭기즈칸이 되어 서양미술계를 공포에 떨게 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것이다. 또 몽골반점을 보인 건 자신이 몽골혈통임을 만천하에 알린 것이다. 백남준이 칭기즈칸에게 공감한 건 그의 무력이 아니라 그의 패기 때문이다. 그가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도 그 나라 땅을 차지하기보단 나라 간 연결(네트워킹)에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또한 백남준이 "거칠 것 없는 환희"를 맛본 건 몽골유목민이 초원에서 생존하기 위해선 '세상을 더 멀리 봐야한다(TELE+VISION)'는 관점을 터득했는데 백남준이 창안한 TV아트가 그 의견과 똑같다는 걸 깨달았을 때 경험한 전율을 뜻한다. 백남준은 이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한반도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몽골코드와 연결시켰다.

달과 TV 그리고 백남준의 예술

▲ 백남준 I '달은 가장 오래된 TV(Moon is the Oldest TV)' 12대 TV모니터 설치 1965-2000 ⓒ 김형순


백남준이 자신을 수시로 몽골유전자와 연결시키는 건 그가 생각하는 예술의 근간이 '해'가 아니고 '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남준의 달은 그냥 달이 아니라 '전자 달' 혹은 '달 인공위성'이다. 백남준이 10대 열광한 작곡가 쇤베르크 작품 중에는 '달빛에 취한 광대(Pierrot Lunaire)'도 있는데 이 제목은 백남준을 떠올리게 한다.

백남준이 이렇게 '달의 미학시대'를 연다. 이런 점을 가장 잘 보여준 작품이 바로 '달은 가장 오래된 TV'이다. 그의 'TV연작' 중 가장 독창적이고 가장 백남준다운 작품이라는 평가받는다. 1965년부터 구상해, 1977년부터 본격적으로 선보였고 12대 모니터를 통해 초승달에서 보름달까지의 달 모양을 한 공간에서 동시에 보여준다.

시간의 고정성보다는 가변성을 실험한 이 작품은 백남준 자신의 시간철학을 전자아트로 구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예술이 얼마나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 또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얼마나 시간의 주인노릇을 하며 자신의 시간을 자유자재로 구가하는지와 같은 철학적 질문을 우리에게도 던지고 있다.

우리 조상도 달을 보고 토끼이야기를 지어냈지만 음력권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런 달빛 환상 속에서 회로애락을 달랬고 그 절기에 맞춰 농사를 지었고 축제도 벌렸다. 옛날엔 달이 TV를 대신했다는 백남준의 놀라운 상상력이 이 작품의 동기가 되었다. 그의 '달TV'에는 관객이 작가가 되어 그 나름의 설화를 펼칠 수 있는 요소가 많다.

"TV는 생각하면 할수록 (구석기가 아닌) 신석기가 생각난다"는 백남준의 말 이건 결국 20세기 후반의 산물인 TV가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에 비견할 만큼 사회가 '산업시대'에서 '정보시대'로 획기적으로 바뀔 것임을 예견한 것이리라.

▲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악장체 1568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 전시 때 선보인 자료집 ⓒ 김형순


이처럼 달과 TV와 백남준은 불가분의 관계다. 이런 백남준이 '월인천강지곡(1568)'을 좋아했다는 건 당연하다. 이 작품은 세종이 한글로 쓴 첫 시가로 여기서 '달'은 천 개의 강을 비추는 '부처'를 뜻하고, '강'은 바로 '중생(백성)'을 뜻한다. 백남준은 이렇게 달빛을 전자빛으로 바꿔 '텔레토피아' 제국을 구현하고자 했다.

또 백남준은 1932년 7월 20일 서울서 태어났는데 자신의 생일이 '달'과 불가피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생일이 바로 1969년 미국 우주비행사 루이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해 우주시대의 새 장을 연 날이기 때문이다.

최근 고은 시인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 이어지는 자신의 삶과 문학사상을 담은 대담집 <두 세기의 달빛>을 냈는데 여기에 달빛이 들어간 건 자신이 2세기에 걸쳐 살면서 '햇빛'보단 명확하진 않으나 명암이 뒤섞는 '달빛'이 주는 깨달음에서 문학의 핵심주제를 찾았기 때문이라 했는데 백남준의 달 미학과 바로 통한다.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TV'연대기

▲ 에디트 데커(E. Decker 1953-)가 쓴 백남준 연구서 <백남준·비디오>(1988) 책 표지. 이 작품은 99대 TV로 설계한 'TV깔때기(1984)', 데커는 브레멘대학과 함부르크대학에서 회화·예술사·고고학을 공부했고 1985년 백남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7년에는 뮌스터 조각프로젝트에서 백남준 전을 기획하다 ⓒ 김형순


백남준이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발표한 'TV연작' 중 걸작을 더 들어보면, 물아일체를 응용해 TV를 의인화한 'TV의자(1968-1974)'·'TV물고기(1973)'·'TV촛불(1975)' 과, 에로티시즘을 반영해 TV를 신체화한 'TV브라'·'TV침대'·'TV페니스(1972)' 등이 있고, 80년대로 넘어와선 'TV계란'(1984)'와 'TV샹들리에(1989)' 등이 있다.

백남준은 TV를 혼과 숨결이 있는 생명체로 봤다. 또한 말을 걸며 자식으로 친근한 친구로 여겼다. 때로는 백남준은 천진한 아이처럼 TV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사실 TV는 태생적으로 맞받아칠 수 없는 먹통구조다. 백남준은 이를 못 참고 첫 전시부터 장치를 통해 쌍방적 '참여TV'와 '자석TV(1963)' 등을 고안해낸다. 이런 생각에서 1969년 뉴욕에서 전시할 때는 아예 TV를 '창조적 매체'라고 이름 붙였다.

'TV연작' 중 또 하나의 걸작인 위 작품은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어려서 '섰다(화투)'를 칠 때의 추억에서 떠오른 것으로 그가 한번도 '99(구땡)'를 잡아보지 못해 아쉬워해 깔때기와 팽이모양으로 99대 TV를 거꾸로 세워 공중에 나는 방식으로 구성했단다. 이걸 업그레이드한 작품을 강남구 대치동 포스코서울사무소에서도 볼 수 있다.

문명의 축, '양'에서 '음'으로 전환

▲ 왕싱웨이(Wang Xingwei) I '늙고 불쌍한 해밀턴(Poor Old Hamilton)' 220×280cm 1996 ⓒ 백남준아트센터


위는 중국신세대작가 왕싱웨이의 독창적 작품으로 문명의 축이 서에서 동으로 바뀌고 있음을 암시한다. '늙고 불쌍한 해밀턴'은 '유럽'을, 뒤샹의 대표작을 깨고 울고 있는 아이는 '아시아'를 상징한다. 유럽의 해밀턴은 사고뭉치인 아시아 아이를 야단치지만 그 아이는 딴청을 부린다. 백남준과 뒤샹을 대결시킨 구조방식이 흥미롭다.

백남준은 첫 전시에 만든 포스터 글씨를 조합하면 '추방(Expel)'이 나오고, 전시장 입구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머리를 걸었고, 욕조에 서양미술을 상징인 뮤즈를 난도질했다. 게다가 아시아의 샤머니즘에서 소머리는 은유적으로 '달'을 상징하는데 이는 해의 문화에서 달의 문화로 문명의 축이 바뀔 것임을 미리 내다본 것인지 모른다.

구체적으로 미술사적으로 보면 백남준은 '회화'위주의 피카소의 한계도 극복했고, 전시장에 기성품을 갖다 놓는 '오브제'위주의 뒤샹의 장벽도 뛰어넘었다. 그 대안으로 시공간을 뛰어넘는 지구촌시대를 열어준 '실험TV'와 '위성아트'를 제시했다.

또한 백남준은 근대 문명적 관점을 벗어나 카오스를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진정한 코스모스가 온다고 봤다. 이 '혼돈의 신'은 무질서, 비선형, 랜덤액세스, 화이트 노이즈 등에서 오히려 아름다움을 찾았고, 그 출구의 바깥을 "마음에서 마음으로 위성에서 위성으로" 통하는 보다 넓은 세상의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그리고 서양인이나 백남준 친구인 '보이스'은 문명의 근원을 해가 아니라 달에서 찾았고 고급종교보다 샤머니즘에서 찾았다. 그런 이유가 있다. 보이스는 2차 대전 중 비행사로 복무하다 소련군의 폭격을 받고 남부러시아 크리미아반도에서 추락했는데 안전벨트가 하지 않았음에도 운 좋게 눈 위에 떨어져 목숨만은 간신히 구했다.

하지만 그때 몸에 담요로 싸주고 버터를 발라주는 몽고계 타타르인의 정성스런 간호와 민간요법이 없었다면 그는 죽었을 것이다. 보이스 전시에 기름덩어리, 왁스, 회색, 펠트지, 손전등, 썰매약품 등이 자주 나오는 연유다. 그는 타타르족이 굿하는 것을 자주 봤고 그래서 백남준의 샤머니즘을 이해했고 동양의 달 문명을 받아들인다.

백남준 예술, 인류학적으로 접근

▲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백남준 기획전 때 소개된 인류학 관련자료 ⓒ 김형순


백남준은 1974년 "흐르는 물은 오묘한 거문고가락을 타건만, 이런 한두 가락도 아는 이 없구나"라며 시대를 읽지 못하는 이들을 질책했지만, "원주민의 심성과 사고는 야만적인 게 아니라 오랜 경험과 지식에 의해 체계화된 자연의 이해방식"이라고 말한 당시 유행한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적 사고'에 동조했고 이에 고무됐다.

예술인류학자 박정진씨는 <굿으로 보는 백남준 비디오아트 읽기(2010)>에서 백남준 계보를 '텍스트·기표·고급종교·존재·이(理)철학·양(陽)사상·진(眞)중심'의 '부계전승'보단 '이미지·기의·샤머니즘·생성·기(氣)철학·음(陰)사상·미(美)중심'의 '모계전승'으로 다시 말해 백남준의 예술은 모성이 있어야 부성이 힘을 쓴다고 봤다.

박정진씨는 백남준은 이렇게 '대모 신'이나 '마고(Mago)'같은 여성적 가치를 높게 여겼고 문명의 축을 양에서 음으로 바꾸려 한 작가로 봤다.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백남준 예술을 서양의 페니스에 대한 동양의 버자이너의 반격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2부] 백남준의 결혼과 독일에서 교수활동

암 발병으로 시게코, 14년 만에 결혼

▲ 백남준의 아내 구보타 시게코가 들려주는 그의 삶과 사랑이 담긴 책 <나의 사랑 백남준(2010년)>. 이 책에서 시게코는 백남준을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고 우주처럼 심오했던 남자"라고 적고 있다 ⓒ 출판사 이순


70년대 후반 백남준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의 결혼과 독일에서 교수가 된 이야기를 뺄 수 없다. 시게코는 40세에 14년간 백남준은 따라 다니다 1977년 백남준과 결혼한다. 20대 만나 같이 사는 건 좋지만 작가가 되려면 아이를 부양하는 게 부담이 된다며 독신주의를 그리도 고집하던 백남준이 왜 결혼을 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이에 대한 이야기는 시게코가 쓴 <나의 사랑 백남준> 책에서 생동감 넘치는 문체로 소상하고 실감나게 기록하고 있다. 그 중 일부를 여기서 재구성하여 소개한다.

시게코는 1937년 교육자집안에서 태어나 도쿄교육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했다. '오노 요코'의 권유로 '플럭서스'에 가입한다. 학창시절 급진적 반체제학생운동의 간부였고 다다이즘 등 현대전위아트에 몰입한 나름 상당한 반항기가 있는 예술지망자였다.

1963년 6월, 시게코는 <요미우리>에서 '파괴의 아름다움'이라는 제목의 백남준 관련기사를 보고 그를 알게 된다. 기사사진에서 가름한 얼굴, 우수에 젖은 듯한 눈매, 메마른 몸매, 고독한 표정의 잘생긴 얼굴에 반한다. 프랑스 천재시인 랭보를 떠올린다. 기사를 잘라내 벽에 붙여놓고 날마다 "이 사람을 내 남자로 만들겠다!"고 주문한다.

그러던 중 시게코는 1964년 5월 일본전위예술의 아지트인 '쇼게츠 홀'에서 피아노를 도끼로 부수고 구두에 물을 담아 마시는 백남준의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보고 매료된다. 시게코는 당시 그를 "고상한 척하지 않고 속된 유머를 거침없이 구사하면서도 지적인 매력과 왠지 범접할 수 없는 고결함이 묻어났다"고 회상했다.

▲ 백남준 I '슈톡하우젠의 오리기날레(괴짜)에게 바치는 비디오' 영상제작: Wolfgang Ramsbott(볼프강 람스보트) 1961. 그가 29살 때 모습. 시게코는 천재시인 랭보를 닮은 백남준에게 반한다. 그녀는 백남준이 40년 전에 자신의 '욘사마 열풍 1호'라고 했다. Courtesy Kunsthalle Bremen ⓒ The Estate of Nam June Paik ⓒ 백남준아트센터


시대의 반항아다운 면모를 갖춘 백남준이 퍼포먼스에서 뿜어내는 눈부신 에너지에 마음이 뺏긴 그녀는 꽉 막힌 것 같은 현실에서 느낀 답답함을 털어냈다. 그녀는 문화계친구와 함께 그를 에워싸며 찻집으로 데려가 겨우 대화를 시도한다. 그의 세계미술사 조류와 철학 등에 관한 내용이 그녀의 지적갈증을 해소시켰다.

마침 1964년 시게코는 도쿄에서 신문지를 전시장에 산처럼 싸놓고 그 위에 흰 천을 덮어 벽 위에 청동조각상을 설치한 '연애편지'라는 첫 전시가 열렸는데 당시 언론들은 외면했으나 백남준은 이를 우연히 보고 창의적이고 독특하다고 칭찬한다. 그의 격려에 힘입어 시게코는 새로운 예술을 하고자 뉴욕으로 떠났고 거기서 그를 재회한다.

뉴욕 집값이 워낙 비싸 둘은 예술동지로 같이 살았다. 하지만 백남준은 당시 여신 같은 미모를 갖춘 '샬럿 무어먼'과 뚝하면 유럽순회를 떠나 시게코의 질투를 샀다. 그런 참에 시게코는 자신에게 열렬히 구애하는 유태인 부잣집아들과 결혼했으나 시댁과 갈등으로 3년 만에 파탄이 나, 백남준에게 돌아왔다. 그때도 그는 그녀를 받아준다.

둘의 동거는 이어졌고 시게코도 40세이 돼 갑자기 애를 갖고 싶어 병원에 가보니 자궁암이라 임신이 안 된다는 진단을 받고 충격을 받는다. 미국에선 의료보험 없인 수술비를 감당하기 없기에 이를 포기하고 일본으로 가려했는데 백남준은 내 후원단체가 날 보험에 가입해 뒀으니 나와 결혼하면 혜택을 받을 거라며 결혼을 제안한다.

백남준은 이런 자신의 결혼동기가 보험 때문이라는 걸 전혀 입 밖으로 내지 않은 것은 결국 그녀에 대한 속 깊은 배려에서 온 것이리라. 하긴 45살이 된 백남준에게 일찍 당뇨가 찾아와 그를 돌봐줄 엄마 같은 여자가 필요하기도 했다.

▲ 1974년 뉴욕 웨스트베스 작업실에서의 백남준과 시게코. Photo: Tom Haar ⓒ 출판사 이순


1977년 3월 21일 결혼 후 신혼이 채 가시기 전 좋은 소식이 날아왔다. 그해 여름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뒤셀도르프 미대 크리케(Kricke) 학장이 자기 대학에 비디오과가 신설되는데 백남준이 적격이니 교수로 초빙하고 싶다는 뜻밖의 제안을 전화로 물어왔는데 마침 백남준이 자리에 없어 시게코가 전화를 받고 얼른 수락했단다.

뒤셀도르프 미대는 독일미술의 거장 '리히터' 등 유명작가를 배출한 독일 최고명문으로 '파울 클레' 등도 이 학교의 교수였다. 백남준와 시게코는 뉴욕에 근거를 두고 작업하고 있었지만 1977년부터 1987년까지 10년 간 독일에서 '감격시대'를 보낸다.

시게코는 백남준을 만난 지 14년 만에 결혼했고, 백남준은 독일에서 첫 전시를 연지 14년 만에 독일에서 교수가 된다. 대학에서도 백남준 같은 세계적 작가를 초빙한 걸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백남준은 첫 전시부터 충격적 사건을 일으켜 이름이 났다.

그때 백남준은 당뇨가 발병해 교수채용기준에 수치를 맞추려고 고생한다. 그런 와중에도 당뇨는 몸속 당분이 뇌세포를 자극해 작품이 더 좋다고 익살을 떨었다.

그들은 독일에서 신혼을 보내며 오래간만에 뉴욕에서처럼 썩은 과일을 먹지 않아도 되는 호사를 누렸고, 라인 강이 내다보이는 고급아파트에서 살았다. 독일에서 교수의 권위와 재량권은 워낙 커 한 달에 한 번해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을 정도다.

뉴욕을 오가며 수업을 했고 백남준은 수입이 많다고 생각해 학생을 레스토랑에 데려고 가 실컷 먹이고 심지어 도박할 돈까지 줬다. 이에 학부모의 항의보단 경제를 가르친다고 좋아했단다. 때론 그들에게 비행기 표를 사줘 미국에 현장학습을 시켰다.

독일인은 백남준에 대해 "독일에서 공부해 비디오아트를 탄생시킨 자랑스러운 독일제 작가"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6개 국어를 하는 그는 동서 문명에 박식할 뿐만 아니라 양 문화를 경계 없이 두루 융합하는 경계 없는 지구인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치즘을 경험한 독일인에게 서구의 우상인 합리주의, 이성주의, 과학주의의 허상을 깨면서 전후 그들이 받은 마음의 상처에 해방감과 청량감을 줬기에 독일인들은 그를 좋아했고 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 백남준을 독일대표로 보내기도 했다.

플럭서스 창시자 '마치우나스' 사망 추모

▲ 백남준 & 보이스 I '미치우나스 추모를 위한 피아노2중주(Piano Duet in Memoriam to G. Maciunas)' 1978년 7월 7일 뒤셀도르프. 사진: G. Theil.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클로스 업으로 찍은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소장품 ⓒ 서울시립미술관


끝으로 70년대 말 사건 중 한두 가지 더하면 백남준은 1977년 뉴욕 카네기홀에서 '감옥에서 정글로' 연작 중 '과달카날 레퀴엠'을 선보인다. 이 작품은 2차 대전 격전지 인 태평양 솔로몬군도 과달카날 섬에서 백남준과 무어먼이 벌린 퍼포먼스로 반전의식과 정치색이 짙다. 백남준은 이곳 공연이 그 많은 공연 중 가장 인상 깊었단다.

그리고 1978년 백남준, 시게코, 보이스와도 떼래야 뗄 수 없는 인물인 플럭서스 창시자 '마치우나스'가 사망한다. 보이스와 백남준은 그를 추모하기 위해 그해 7월 7일 뒤셀도르프 미대에서 '피아노이2중주(Piano Duet in Memoriam to G. Maciunas)'를 연다. 47살에 사망한 숫자를 거꾸로 한 74분간 소음에 가까운 괴짜연주를 한다.

그리고 다음해 백남준은 비엔나, 쾰른에서 기획전 등으로 그의 70년대를 접는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