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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 하는 순간 한달치 일당이..." 수입차 대리주차 알바의 지옥 실상

차보다 사람이 긁히는 게 더 싸... 일당 8만원에도 못버티는 노동조건

등록|2014.06.21 21:43 수정|2014.06.21 21:43
"쿵!"

자동차 정비센터 5층. 나는 자동차 수리공과 함께 차량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차량용 엘리베이터에 차를 올려두고 잠깐 돌아보는 동안, 그 자동차 수리공은 엘리베이터 문을 열림 상태로 잡아두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앞이 번쩍했다. 폭이 3미터가 넘는 고철문을 머리로 받은 것이다. 머리를 들이받는 순간, 기절하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 바로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아픔이 완전히 가시길 기다렸다.

1층에 있는 주차 관리실로 홀로 걸어 내려왔다. 비닐봉지에 얼음을 담아 혹이 난 머리에 댔다. '앞으로 취업 시험도 치러야 하는데, 하필 머리를 다치다니….' 아프고 쓰린 건 머리보다 마음이었다.

취업 실패 일주일 뒤... 나는 '실장'이 됐다

▲ 나는 '새로온 실장'으로 다른 실장들에게 소개됐다. 그곳에 실원은 아예 없었다. ⓒ 오마이뉴스


지난 4월 중순, 수습기자가 돼 취재현장을 누비겠다는 꿈에 부풀어있던 나는 한 일간지 3차 실무평가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주말, 자취방에서 홀로 지내기 힘들 것 같아 부모님 댁으로 돌아갔다. 실망이 컸던 부모님은 한마디 위로의 말도 건네지 않으셨다.

무너지는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그 이유가 세월호 참사 때문에 희생된 안산 단원고 아이들 때문인지,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진 내 처지 때문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얼얼한 가슴을 달래려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낼 뿐이었다.

그로부터 일 주일도 지나지 않아 나는 '실장님'이 됐다. 며칠 만에 대단한 인생역전 드라마가 펼쳐진 건 물론 아니었다. 꿈을 놓지 않으려면 돈이 필요했다. 용역회사에 다니는 친구에게 "한 달 정도 일할 곳을 알아봐 달라"라고 부탁했다.

며칠 뒤 친구에게 "강남에 있는 수입차 서비스센터에 대리주차하는 자리가 났다"라는 연락을 받았다. "굉장히 힘든 곳인데 괜찮겠냐"라며 염려하는 친구에게 나는 "괜찮다, 지금 그런 거 가릴 처지가 아니다"라고 말해줬다. 하루 일당 8만원. 서비스센터로 의뢰된 수입차를 근처 주차장으로 옮기는 일이라고 했다. 물론 서비스 센터 직접 고용은 아니고 용역회사 직원 신분이었다.

이튿날 나를 맞은 직원은 센터 사람들에게 나를 '새로 온 실장님'이라고 소개했다. 공중전화 부스보다 조금 더 큰 주차관리실에는 실원은 없고, 실장만 세 명 있었다.

사고는 가벼웠지만, 수리비는 무거웠다

▲ 주차관리실에서 스트레칭을 하는 대리주차 노동자. 그는 점심식사도, 휴식도, 스트레칭도 주차관리실 안에서만 했다. 주차관리실에 어울리지 않는 가죽소파는 근처 주택가에서 버리려고 내놓은 것을 주워온 것이다. ⓒ 원승연


실장이 된 바로 다음 날, 사고를 냈다. 내가 몰던 차의 뒤범퍼가 주차돼 있던 다른 차의 앞 범퍼에 부딪혔다. 내가 받는 임금으로는 2년 넘게,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서,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살 수 있는 차가 뭔가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는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이런 곤혹스러움은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사고는 가벼웠지만, 수리비는 무거웠다. 범퍼 하나를 수리하는 데는 그곳에서 하루 9시간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4주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 필요했다. 180시간 노동의 대가가 독일에서 왔다는 고철판 하나를 교체하는 비용밖에 되지 않았다. 보험처리가 되고도 내가 내야 했던 자기분담금은 50만 원. 다행히도 이 돈은 나를 파견한 용역회사가 부담했다.

그날부터 나는 차가 무서워졌다. 매번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사고의 공포에 시달렸다. 친구에게 소개를 받지 않았다면 당장 그만두고 싶었다. 차는 분명 사람을 위해 있는 건데, 그곳에서 나는 차를 위해 존재했다.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이 녀석은 그저 사람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기계일 뿐, 난 요령껏 다루면 그만이야'라고 다짐했지만, 늘 차가 다칠까봐 조마조마했다. 나는 그곳에서 '차가 긁히는 것보다는 내가 살짝 긁히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싸겠다'라는 생각을 난생 처음 해봤다.

내가 낸 사고는 최근 한 달 반 사이 네 번째로 일어난 사고로 기록됐다. 사고가 난 뒤 일이 힘들어서 떠난 실장도 같은 기간에 세 명이나 있었다. 짧은 기간에 네 번째 신입 실장이 된 내가 네 번째 사고를 친 것이었다. 사고가 난 날부터 나는 센터 밖 길 건너 언덕에 있는 외부주차장을 '미친 듯이' 오갔다. 이것은 대리주차 업무 중 하나였다. 일을 시작한 첫날부터 발바닥을 흠씬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집에 돌아가서 잠자리에 누웠을 때는 불에 댄 듯 쓰리고 쑤셨다. 자려고 눈을 감는데, 나도 몰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둘째 날, 감각이 무뎌진 발바닥을 질질 끌며 일했다. 고참 실장이 언덕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대고 퇴근하라고 했을 때, '또 나보고 언덕에 가라고?'라고 생각하며 차에 올라탔다. 후진을 하다가 '쿵' 소리가 났다. 차가 뜻하지 않은 지점에서 멈추면서 내 생각도 함께 멈췄다.

이후 '또다시 사고가 날 수 있다'는 생각은 지워지지 않았다. 일이 지나치게 많고 일손이 부족한 게 문제인데, 센터 안에 차가 밀리면 모든 책임은 신기하게도 실장이 게으르고 무능력한 탓이 됐다. 나는 이 구조적 문제에 제대로 맞서지 못했다. 한때는 신앙의 힘으로 이 문제를 극복하려 했다. 차에 앉을 때마다 사고가 나지 않길 기도했다.

월차 보장도 안 돼... 사고가 나지 않는 게 기적

▲ 주차관리실과 옆 건물 사이는 실장 전용 흡연공간이었다. 날씨가 더운데도 실장들은 팔을 걷어서라도 두꺼운 긴팔티셔츠 입기를 고집했다. 원청에서 준비한 하얀 반팔티셔츠 뒷면에는 'Vallet Parking(발렛 파킹)'이란 검정색 글자가 낙인처럼 커다랗게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 원승연


다행히도 그 뒤로는 사고를 치지 않았다. 하지만, 사고는 내 몸에 났다. 첫 사고가 나고 3주 정도 지났을 때였다. 자동차용 엘리베이터 문에 머리를 부딪친 그날도 점심시간을 빼고는 쉴 새 없이 일해야 했다.

근무 중 잠깐이라도 앉아서 쉬려고 하면 고참 실장은 눈치를 줬다. 고참 실장 뒤에는 센터 곳곳에 설치된 CCTV로 실장들을 지켜보는 지점장이 있었다. 이중감시는 나를 쉬지 못하게 했다. 그저 힘들 때마다 애꿎은 CCTV만 노려보는 게 전부였다. 차량용 엘리베이터 문에 머리를 다친 날, 점심시간 이후로는 걸어 다닐 기운도, 서 있을 기운도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쉬지 않고 작업 속도를 올리다 보면 결국 어디에선가 사고를 치기 마련이었다. 돌이켜보니 사고가 나지 않은 날은 그 자체로 기적이었다.

한 달 넘게 일하고 난 후 회사에 월차를 쓰겠다고 했다. 그러라고 했다. 하지만 하루 쉬고 돌아와 보니 '월차'가 아닌 '무단결근' 처리가 돼 있었다. 황당했다. 근로계약서도 쓰지 않았다. 머리를 부딪힌 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병원으로 달려가 이런저런 검사를 했다. 꽤 많은 비용이 나왔고 회사에 산재처리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병원비는 받았지만 말이다. 한 고참 실장은 "왜 그걸로 병원을 가냐, 그리고 그 돈을 왜 회사에 청구하냐"며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두 번의 사고를 내고, 또 이것을 잘(?) 마무리하고 나는 대리주차 일을 하는 파견노동자에겐 과분했던 실장 직함을 내려놨다. 5주가 조금 넘었던 아르바이트 기간, 온종일 골목에서 도로에서 일하면서 책과 신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세상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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