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북에서 먹은 사슴고기, 그 '실체'에 충격 받다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 20] 호텔서 목격한 해외동포 이산가족 상봉

등록|2014.06.24 15:01 수정|2014.06.24 17:04
지난 세 차례 북한 여행을 다녀온 뒤 내게는 북한에 두고 온 수양딸과 수양조카가 생겼다.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정을 나눈 그들이 다시 보고 싶어서, 더 많은 북한동포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올해도 다시 북한에 다녀왔다. 2013년 8월 15일부터 8월 26일까지 한 차례 그리고 9월 4일부터 13일까지 또 한 차례 북한을 여행했다. 새 연재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를 통해 북한동포들의 지금과 북한의 여러 명소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 기자말

북한에 올 때마다 호텔에서 목격하는 감동적인 장면이 있다. 해외동포들의 이산가족 상봉 순간이 바로 그것이다. 북한 전역에 흩어져 사는 친척들이 평양의 호텔로 모여든다. 각 지방 특산물을 꽁꽁 싸오기도 하고, 어떤 이는 떡과 손수 빚은 술을 신주단지 모시듯 품에 꼭 껴안은 채 발걸음을 재촉한다. 먼 길을 온 동생·오빠·누나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다시 만난 가족들은 식사를 위해 함께 밖으로 나가기도 한다. 상봉 가족이나 친척이 멀지 않은 곳에 사는 경우에는 집으로 찾아가 며칠 지내다 오기도 한다.

▲ 전국 각지에서 온 북한주민들이 이산가족을 만나기 위해 호텔로 들어오고 있다. ⓒ 신은미


이들의 상봉 장면은 금강산에서 이뤄지는 상봉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금강산에서 만나는 이산가족들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상봉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만남의 기쁨보다 '이제 헤어지면 그야말로 마지막'이라는 이별의 슬픔이 더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곳 평양에서의 이산가족 상봉은 기쁨과 행복의 웃음으로 가득 차있다.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해외동포들의 경우, 원한다면 언제든지 북한에 방문해 헤어진 가족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더 이상 자신을 이산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관련기사 : 이산가족 상봉에서 우리의 '야만'을 보았다).

"그저 멀리 사시는 오빠가 온 것 같습니다"

▲ 여동생을 꼭 껴안고 있는 재미동포 이산가족 할아버지 ⓒ 신은미


▲ 재미동포 할아버지로부터 북의 친척들을 소개받은 나 ⓒ 신은미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연재 덕에 심양공항에서 나를 알아보신 재미동포 할아버지도 눈에 띈다. 할아버지는 고려 호텔 로비에서 북녘의 여동생을 꼬옥 끌어안고 있다. 세상의 그 어떤 포옹이 이보다 더 따뜻할 수 있을까. 감싸 안은 팔을 풀고는 정다운 눈길을 주고받는다. 함께 서 있던 또 다른 북녘 친척들이 이들을 미소 지으며 바라본다.

할아버지는 옆에 서서 이 순간을 바라보고 있던 나를 북녘 가족들에게 소개한다. 할아버지 여동생과 인사를 나눴다.

"반가워요. 재미동포 신은미라고 합니다. 오빠를 만나 기쁘시죠?"
"네. 그야 말할 것도 없지요."
"함께 사셨더라면 좋았을 것을…. 전쟁이 가족을 이렇게 떨어뜨렸네요."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이제는 일없습니다. 오래 전부터 오빠께서 1년에 한두 번씩 오시는데, 뭐, 이산가족이라는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저 멀리 사시는 오빠가 고향에 오신 것 같은 기분으로 항상 만납니다."

"그러세요. 사시는 곳은 어디세요?"
"양강도입니다. 여기서 좀 멀지요."
"오시느라 힘드셨겠어요."
"오빠를 만나러 오니 하나도 힘이 안 듭니다. 이역만리 머나먼 타국땅에서 오신 오빠를 생각하며 오빠께 드릴 꿀이며, 술이며, 잔뜩 들고 오는데 하나도 무겁지가 않단 말입니다. 그저 오빠께서 오래오래 사셔서 더 만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인사를 나누는 동안 할아버지께서 소파에 앉아계신 한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다가가 여쭤 보니 누나라고 하신다. 무척 연로하셔서 일어서 계시기 불편한 것 같다. 할아버지는 누나의 손을 말없이 꼭 잡고 있다.

▲ 할아버지께서 가족들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고 있다. ⓒ 신은미


온 가족이 함께 저녁식사를 위해 호텔을 나선다. 손에 손을 꼭 잡고 일렬종대로 걸어간다. 할아버지 누나의 허리가 많이 굽었다. 남편과 나는 그분들을 호텔 출입구까지 배웅해 드렸다.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런데 왜 눈물이 내 가슴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리는 걸까.

다시 호텔로 돌아오니 또 다른 정겨운 만남이 눈에 들어온다. 시애틀에서 왔다는 목사님 부부가 북녘 가족을 만나고 있다. 손녀뻘 되는 어린아이가 노부부에게 꽃다발을 건네고, 시 낭송을 한다.

이산가족 상봉을 '정치'의 영역에 둬선 안 돼

▲ 시애틀에서 오신 목사님이 북에 있는 조카 손녀딸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있다. ⓒ 신은미


▲ 목사님과 북한에 사는 목사님 누나가 두 손을 맞잡고 있다. ⓒ 신은미


시 낭송이 끝나고 20여 명은 될 듯한 가족들이 호텔 레스토랑으로 향한다. 목사님이 우리 부부에게 가족들을 소개해 준다. 북에서 유명한 문학가라는 누나, 농장에서 큰 공을 세워 훈장을 받았다는 조카, 영화 시나리오 작가인 조카사위 등등…. 황해도에 있는 농장에서 일한다는 목사님 조카는 "토종닭을 삶아 왔으니 함께 들자"라며 우리 부부 손을 당긴다.

농장에서 준비해온 술·과일·떡·음식들만으로도 한 상 가득한데 맥주와 함께 안주까지 더 주문한다. 외부에서 음식을 들여와 펼쳐 놓는데도 호텔 웨이트리스나 관리인들은 아무런 불평이 없다. 그저 먼발치서 이들의 만남을 바라보며 미소만 짓고 있다. 남편은 사진을 찍느라 사방을 휘젓고 다니고, 나는 북한의 민간 음식을 맛보느라 정신이 없다.

▲ 목사님 가족이 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나도 염치없이 합석해 북한의 민간음식을 맛봤다. ⓒ 신은미


한쪽에서는 갓 대학생이 돼 보이는 여학생(목사님의 후손)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맥주를 권하자 수줍어하며 한 잔 받는다. 흐뭇한 모습이다. 이산가족 상봉은 이래야 한다. 가족이 모여 왁자지껄 식사도 함께하고, 가능하면 친척의 집에서 잠도 자고.

재미동포-북한주민 간 이산가족 상봉 영상지난해 9월 북한 호텔에서 찍은 영상. 시애틀에서 온 재미동포 목사 부부가 북한의 친척들을 만나고 있는 모습이다. ⓒ 신은미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남녘의 이산가족들이 떠오른다. 가뭄에 콩 나듯 1년에, 어떤 때는 몇 년에 한두 번, 고작해야 100여 명씩 만난다. 이래서 언제 그 많은 이산가족들이 살아생전 헤어진 가족과 상봉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자. 지금 남과 북이 금강산에서 한다는 이산가족 상봉은 정치적 흥정이나 제스처다.

헤어진 가족을 못 만나게 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인권 중의 하나를 유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이것은 인류에 대한 범죄행위이며, 천륜을 거스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남과 북의 정부에 호소한다. 우선, 해외여행이 자유로운 남한이 먼저 '북에 가족이 있는 이산가족은 원하면 누구나 북에 가서 가족을 만나도 좋다'고 선언하기를. 그리고 북한은 '북에 가족이 있는 남의 이산가족은 누구나 북에 와서 헤어진 가족과 상봉을 해도 좋다'고 선언하기를. 이 선언이야말로 남과 북의 정부가 민족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북한 주민은 데니스 로드맨을 어떻게 바라볼까

레스토랑을 나와 커피숍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데 한 유럽인 관광객이 어떻게 알았는지 "이 호텔에 미국 유명 농구선수 데니스 로드맨이 머무르고 있는 것 같다"라고 말해준다. 나는 가끔 데니스 로드맨을 보면서 '혹시 그가 미국 정부로부터 모종의 임무를 받고 북한을 들락날락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나는 데니스 로드맨이 북한에 처음 방문했을 때부터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데니스 로드맨의 북한 방문을 주선한 회사는 '바이스 텔레비전'(Vice Television)이라는 영상물 제작회사다. 그런데 이 회사의 사장인 세인 스미스(Shane Smith)는 북한에 관광객으로 가장하고 들어가 북한 비방 영상물을 만든 사람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북한으로부터 입국금지 처분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바이스 텔레비전'이 데니스 로드맨의 방북, 그것도 북한 최고 지도자와의 만남을 주선하게 됐을까.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의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미국에서 '코트 위의 악동'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데니스 로드맨의 차림새는 북한동포들의 정서와는 무척이나 동떨어져 있다. 귀걸이에 코걸이까지 한 모습은 미국에서조차 흔하게 볼 수 있는 차림새가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동포들은 데니스 로드맨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마침 옆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북한주민들이 있었다. 넉살 좋은 남편이 고개를 돌려 말을 걸었다.

"저…, 혹시 데니스 로드맨이라는 미국 농구선수를 아시나요?"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근데…, 그 사람…, 하고 다니는 차림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도 미국 살지만 그런 차림새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거든요."

"그야, 뭐, 우리 인민들 정서와는 전혀 맞지가 않습니다. 우리 인민들이야 그렇게 하고 다니라고 해도 그렇게 할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기런데 기렇게 하고 다니는 건 그 사람 자유 아니겠습니까?

이곳 호텔에 많은 구라파(유럽) 관광객들이 있지만 옷차림이라든가 아니면 공개된 장소에서 남녀가 하는 행동이 우리 인민들에게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단 말입니다. 기렇지만 그들의 문화가 기러니 누가 뭐라겠습니까? 어떤 관광객은 다 헤져서 무르팍과 허벅지가 훤히 보이는 청바지를 입고 온단 말입니다. 외국 관광을 다닐 정도면 자기 나라에서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일 텐데 바지나 하나 새로 사 입고 오지 원…, 참 내…, 다 찢어진 바지를 입고 오다니. 선생님께서도 미국에서 오셨다 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아, 재미동포시군요. 반갑습니다. 사실, 저…, 선생님의 머리 모냥도 여자 단발머리 같은 데다 옷도 울긋불긋한 게 우리 인민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습이란 말입니다. 기렇지만 기걸 갖고 우리 인민들이 뭐라 합니까? 서로 다르니 리해하는 겁니다."

▲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지난해 2월 28일 평양 류경 정주영체육관에서 열린 미국의 묘기 농구단 '할렘 글로브 트로터스'와 조선체육대학 홰불(횃불)농구팀의 혼합경기장에 참석, 방북 중인 전 미국프로농구(NBA) 선수 데니스 로드맨과 환담하고 있다. ⓒ 연합뉴스


북한주민들이 데니스 로드맨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알아보려다 되레 남편이 역공격을 받았다. 이 북한주민은 호탕하고 유머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남편이 화를 내지 않고 배꼽을 움켜쥐고 웃는다. 남편이 말을 이어간다.

"그 찢어진 청바지는 원래 찢어진 채로 파는 겁니다. 값도 찢어지지 않은 것보다 더 비싸답니다."
"찢어진 바지가 더 비싸다구요?"
"바지를 일부러 찢어서 팔라니까 노동이 더 들어가잖아요."

"아니, 왜 멀쩡한 바지를 일부러 찢어서 팝니까?"
"찢어진 바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왜 찢어진 바지를 선호한답니까?"
"그건 나도 모르겠소. 그런데 좀 전에 제 머리가 여자 단발머리 같다고 했습니까?"

" 아니 뭐…, 꼭…, 기런 건 아니고. 기건 기렇고 바깥에 다니시다 바람이라도 불면 머리가 까치둥지처럼 될 텐데 기러면 오케 합니까, 선생님?"
"무슨 둥지요?"
"까치말입니다, 까치. 새 있지않습니까."
"아, 예. 뭐 습관이 돼서 괜찮습니다."

나는 커피숍을 나서면서 이참에 잘 됐다 싶어 남편을 호텔 지하에 있는 이발소로 끌고 갔다. 이발사가 남편의 머리를 보더니 '도저히 답이 안 나온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장발은 해보지 않아 못 깎겠다"란다. 바로 옆에 있는 미장원에 가서 부탁을 하니 남성은 안 된다며 이발소로 가라고 한다. 결국 남편은 북한여행 내내 머리에 '까치둥지'를 트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밖에 나가니 사람들이 남편 머리만 쳐다보는 것 같다.

'사슴고기'라고 해서 먹었는데, 이런...

▲ 저녁식사를 위해 찾아간 식당(오른쪽 붉은 타일로 장식한 건물) ⓒ 신은미


시애틀에서 오신 목사님 상봉모임에서 가족들이 준비해온 음식을 얻어 먹은지라 오늘은 늦은 저녁을 하러 간다. 안내원 김 선생에게 저녁 대접을 하기 위해 프론트 데스크에서 전화로 안내원 김 선생을 찾았다. 김 선생은 이미 예약을 해놨다면서 사슴고기를 안주 삼아 소주나 한잔 하자고 한다.

"신 녀사님, 사슴고기를 드셔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요. 미국사람들은 사냥 가서 잡아 온 사슴고기를 먹는데 저는 먹어본 적이 없어요."
"한 번 드셔 보세요. 좋아하시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썩 내키지는 않지만 안내해주는 대로 호텔을 나와 옆에 있는 식당에 들어갔다.

▲ 애피타이저로 먹은 묵 무침 ⓒ 신은미


▲ 강냉이국수(옥수수국수) ⓒ 신은미


평양소주와 함께 애피타이저로 묵이 나온다. 돼지고기를 썰어 넣고 오이와 김으로 향을 냈다. 거기에 계란으로 색깔을 더했다. 고소한 묵맛에 그 독한 평양소주를 두 잔이나 마셨다. 김 선생이 "사슴고기는 소주와 함께 먹어야 한다"라면서 또 한 잔을 따른다. 정신이 없다. 머리가 뱅뱅 돈다.

사슴고기는 생각보다 상당히 연하고 부드러웠다. 특히 가는 새끼손가락 굵기 정도의 뼈 주위에 붙어있는 살이 아주 연하다. 왠지 들짐승 특유의 냄새가 날 것만도 같은데 그렇지도 않다. 갈비찜 비슷하게 요리를 했는데 상상했던 것보다 맛이 좋다.

식사를 하겠냐고 묻길래 '강냉이국수'를 주문했다. 나진-선봉에서 먹었던 바로 그 옥수수국수다. 국물을 들이키며 안내원 선생에게 말했다.

"김 선생님, 저는 구수한 이 '강냉이국수'가 너무 좋아요. 이 국수를 갖고 여러 가지 요리를 개발할 수가 있을 것 같아요. 비빔국수, 또 서양식 파스타 등등 온갖 구상이 떠오르네요. 북에는 논이 부족해 쌀 생산량이 모자라는 것 같은데, 옥수수가 쌀 대신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에요."
"우리 인민들은 국수를 간식으로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저 밥을 먹어야 한 끼 먹은 것으로 생각하니까요."

안내원 김 선생은 시큰둥한 표정이다.

요즘 남쪽의 식생활이 바뀌어 1인당 쌀 소비량이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북한도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지금의 북한 쌀 생산량이 수요를 넘어설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된다면 만성적인 쌀 부족 현상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고 건실한 농업구조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과 유엔세계식량계획(WFP)의 자료를 근거해 추산했을 때 북한의 식량자급률이 90%를 넘었다는 견해도 있다). 식당을 나서자 김 선생이 묻는다.

▲ 평양 단고기 뒷다리 토막찜 ⓒ 남소연


"녀사님, 오늘 사슴고기가 어땠습니까?"
"생각보다 훨씬 맛있었어요. 고기가 그렇게 연할 수가 없네요."
"오늘 드신 것은 찜인데 그 고기로 탕도 만들고 뭐 여러 가지 많습니다. 외국 관광객들도 조선식 사슴고기를 아주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다음엔 탕을 한 번 드셔보시라요."
"네, 탕도 먹어 보고 싶네요."
"오늘은 장마당 덕분에 대접 잘 받았습니다. 내일은 제가 사슴고기탕을 대접할 테니 오늘은 들어가서 푹 쉬십시오."

안내원과 헤어진 우리는 대동강 맥주를 마시기 위해 호텔 2층 카페로 갔다. 웨이트리스가 우리를 반갑게 맞는다.

"이제 오십니까?"
"네, 오늘은 저녁식사가 좀 늦었어요."
"맛있는 것 좀 많이 드셨습니까?"
"사슴고기 요리를 먹었어요."
"사슴고기요?"

웨이트리스는 혼잣말로 "평양에 사슴고기집도 있나"라더니 이내 다시 묻는다.

"사슴고기를 오데서 드셨댔습니까?"
"호텔 밖 오른쪽에 있는 식당에서 먹었습니다."
"입구에 계단 올라가는 그 식당 말입니까?"
"네."
"2층에서 드셨습니까?"

"아니요, 1층에서요."
"2층은 중식이고 1층은 단고기 요리인데…."
"무슨 고기요?"
"단고기 말입니다."
"단고기요? 개고기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아, 감쪽같이 속았다. 사슴고기가 아니라 개고기였다. 이틀 전 우리에게 개고기를 먹어본 적이 있느냐고 묻길래 질색을 하며 절대 안 먹는다고 말했던 게 생각났다. 그래도 비위가 나보다 좋은 남편이 살살 약을 올린다.

"내가 뭐랬어. 김 선생이 오늘 장마당 문 닫았다고 했을 때 내가 공산당 새빨간 거짓말에 안 속는다고 하니까 왜 사람을 그렇게 못 믿냐면서 당신이 나한테 핀잔 준 거 기억나?"

비위가 상한 나는 대동강맥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우리집 반려견 요키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맥주에서 강아지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내일 만나기만 해봐라. 불타는 복수심을 가슴에 품고 방으로 올라갔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