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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무시한 단두대의 '진실'... 어떻게 봐야 하나

[서평] 레너드 케스터와 사이먼 정의 <세계를 발칵 뒤집은 판결 31>

등록|2014.06.24 13:26 수정|2014.06.24 13:26
역사적인 드레퓌스 사건 재판(1894, 1899)은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발각된 조그만 메모 한 장에서 시작된다. 메모에는 프랑스 육군의 신형 대포와 부대 배치도, 적 공격 계획 등 기밀 정보 목록이 담겨 있었다. 프랑스 육군 정보국은 그 정보들에 접근하려면 범인이 육군 참모부에 속하고, 대포 등 화기에 밝은 인물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육군 정보국은 곧 참모부 소속이면서 군사전문학교 출신 포병인 알프레드 드레퓌스(1859~1935)에 주목했다. 드레퓌스의 필적과 메모 필적을 비교하는 후속 수사가 수사팀에 의해 이뤄졌다. 하지만 필적이 흡사하다는 점 외에 드레퓌스를 스파이로 볼 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뒤 드레퓌스 사건은 핵심 인물인 드레퓌스의 출신 종족과 지역이 빌미가 되어 마녀사냥식 여론재판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복잡하게 얽힌 프랑스 국내 정치 지형도 두루 영향을 미친다. 결국 드레퓌스 사건은 관련자 위증 및 증거 조작과 같은 막장 법정 드라마적 요소를 두루 갖춘 채 프랑스 제3공화국을 뒤흔든 역사적인 정치 스캔들로 비화한다.

<세계를 발칵 뒤집은 판결 31>은 인류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긴 재판과 판결 기록 31가지를 골라 소개한 책이다. 이들은 기원전 399년 아테네에서 열린 소크라테스 재판부터, 최종 결정이 2011년에 나온 일본 벤처 기업인 호리에 다카후미 재판에 이르기까지 세계사 전체에 두루 걸쳐 있다. 제왕의 죄를 묻거나 사람들의 생각을 심판한 재판들, 권력투쟁과 정치공작의 주인공들이 나선 재판 등 책이 다루는 판결의 자장도 넓다.

글머리에 소개한 드레퓌스 재판은 편견과 차별이 부른 재판들 중 하나로 등장한다. 얼치기 필적 감정 결과 외에 그 어떤 물증도 없었던 드레퓌스가 반역죄로 체포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프랑스 정보국이 드레퓌스가 알자스 지역 출신의 유대인이라는 점에 주목했음을 강조한다. 한때 알자스는 독일(구 프로이센) 점령 지역이었으며, 특별히 드레퓌스는 알자스 내에서도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 출신이었다고 한다.

드레퓌스는 '프랑스군에서 복무하는 독일어가 가능한 유대인 = 독일군 스파이'라는 등식에 따라 기소된다. 철저하게 계산된 차별과 편견의 결과였다. 군사법원에 선 드레퓌스는 정보국 소속 위베르 앙리 소령의 위증과 거짓 증거물 등에 걸려 만장일치로 유죄 판결을 받는다. 그에게 내려진 형은 악명 높은 유형지인 '악마의 섬'에서의 종신 유배였다.

드레퓌스 재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드레퓌스가 유죄라고 믿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문자 그대로 '드레퓌스가 배신자일 가능성은 그의 종족만 봐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국수적인 반유대주의자들이었다고 한다. 특정 지역이나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이유로 '마녀사냥'이나 '빨갱이사냥' 식의 여론재판에 휘둘리다가 실제 법정으로 향하는 우리나라의 많은 사례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저자에 따르면 드레퓌스 사건은 시민사회에서 새롭게 부상한 권력인 신문사의 화력을 등에 업고 치른 언론전의 성격이 강했다.

신문사들 가운데는 원래 취했던 노선을 바꾼 곳도 있다. <피가로>는 초기에 드레퓌스 진영에 가담했다가 발행 부수가 급감하자 반드레퓌스 진영으로 노선을 선회한 반면 <르프티 파리지앵>은 처음에는 반드레퓌스파를 옹호했으나 발행부수가 떨어지는데도 점차 드레퓌스 노선에 가담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언론이 정치 논리에 종속되지 않고 오직 진실을 보도하는 메신저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현실에서 증명해 보인, 현대 저널리즘 역사의 터닝포인트였다고도 볼 수 있다. (153쪽)

드레퓌스 사건을 반전시킨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의 그 유명한 '나는 고발한다'는 1898년 1월 13일 자 일간지 <로로르>에 실렸다. 1850년대 20만 부에 그친 프랑스의 일간지 발행부수는 1870년 100만 부를 돌파했다. 1898년 당시 프랑스 일간지 중 무려 48개가 반드레퓌스파로 분류되었고, 재심 요구파는 3개, 친드레퓌스적 논조의 신문은 4개에 불과했다. 재판과 관련된 여론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현대 미디어의 위상을 새삼 돌아보게 하는 역사적 사실들이다.

이 책에는 기상천외한 재판 사례들이 다수 등장한다. 시신을 피고석에 세운 재판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렇다. 이 책 5부('엽기, 광란의 사건과 판결들')에 '카데바 시노드'라는 이름으로 소개된, 제111대 교황 포르모소 재판이 그것이다.

포르모소 교황은 복잡하게 얽힌 중세 가톨릭 정치 지형 속에서 시신 상태로 피고석에 앉게 되는 비운의 주인공이다. 중세 최대 엽기 재판의 당사자가 된 것이다. '시체 재판'의 의미를 갖는 '카데바 시노드(Cadaver Synod)'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897년 1월 스테파노 1세는 역대 교황들이 잠들어 있는 지하 묘지에서 9개월 전 안치된 포르모소의 시신을 꺼내 교황청의 정전으로 옮겨왔다. 이미 상당히 부패되어 백골이 드러난 시신은 포르모소가 생전에 입었던 교황의 대례복을 그대로 입은 채 의자에 앉혔다. (중략) 
포르모소 재판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다. 먼저 스테파노가 거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포르모소의 죄상을 조목조목 밝히고 온갖 저주의 말을 퍼붓는다. 그가 제풀에 지쳐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 포르모소는 자신에게 적용된 혐의를 반박한다. 물론 죽은 포르모소가 스스로 변호할 수는 없으니 그 역할은 스테파노가 지명한 젊은 사제가 맡았다. (243~244쪽)

흔히 중세 전반을 통틀어 '암흑 시대'로 지칭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저자는 그렇게 부른 이들이 기독교를 극도로 비판적으로 바라본 계몽주의자들이었다고 지적한다. 저자가 보기에 진정한 암흑 시대는 9세기부터 11세기 중반까지 교황청이 타락하고 정국이 혼란에 빠진 시기에 국한된다고 주장한다. 가톨릭 교회 역사에서 가장 기괴하고 당혹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엽기 재판 카데바 시노드야말로 그 암흑 시대의 시작을 알린 서곡이었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이 책에는 '세계를 발칵 뒤집은 판결'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여러 가지 흥미진진한 부수적인 얘깃거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단두래'의 대명사 '기요틴(Guillotine)'이 특히 그렇다. 기요틴은 1791년 의사 출신의 혁명 인사 조세프 기요탱이 고안한 사형도구다. 1791년에 최초로 사용된 이래 1981년 프랑스에서 사형제가 폐지될 때까지 공식 사형 도구로 사용되었다.

보정대로 고정된 죄수의 머리 위로 칼날이 떨어지도록 되어 있는 이 기구는 섬뜩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사형 도구가 죄수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말하면 믿을 수 있겠는가. 저자에 따르면 단두대는 프랑스의 인도주의적 혁명 정신을 교정 분야에서 실천하기 위해 고안된 첨단 사형 도구였다.

혁명 전까지 프랑스에서 사형은 망나니가 칼이나 도끼로 목을 치는 참수형으로 집행되었다고 한다. 문제는 망나니의 숙련도나 당일 컨디션, 기타 다른 여러 요인 때문에 사형수마다 겪는 고통의 강도가 다른 경우가 많았다는 것. 죄수들은 재수가 좋으면(?) 목이 단칼에 떨어져 고통이 덜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죽음에 이르기까지 극심한 고통을 당해야 했다고 한다.

단두대는 이러한 처형 방식을 표준화하기 위해 혁명 정부가 공식적으로 채택한 해결책이었다. 사형수들에게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형을 가하고, 가능한 한 그들의 고통을 최소화하여 목숨을 빼앗는 방법으로서 말이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세계는 하나의 무대요, 모든 남녀는 배우일 뿐"이라는 셰익스피어의 말을 인용한다. 사람들에게서 종종 생애 최고의 퍼포먼스를 끌어내는 무대가 되는 장소로서의 법정 이미지를 환기하기 위해서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피고와 변호인, 검사, 방청객 등이 등장하는 법정은, 연극무대와 공간적 구조 자체가 상당히 닮은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허구의 극이 끝나면 배우들이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연극에서와 달리 재판에서는 감옥이나 형장으로 끌려가는 이들이 생겨난다. 재판 결과가 사회에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내거나, 그것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기도 한다. 재판의 엄중함과 자장권이 그만큼 크고 넓다는 말이겠다.

며칠 전 끝난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취소소송 판결 결과를 놓고 교육계를 포함하여 온 나라가 한바탕 회오리에 휩싸일 것 같은 분위기다다. 전교조를 비롯해 재판 결과에 비판적인 진보 진영에서는 사법부가 노동기본권의 시계를 군부독재 시절인 1980년대 후반으로 되돌려 놓았다며 격렬하게 반발하고 있다.

그런데 며칠 전 판결은 겨우 1심이었다. 2심, 3심으로 가면서 어떤 반전이 있을지 지금으로선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재판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이런저런 요인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튀어나올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당대 프랑스 최고 인기 작가였던 에밀 졸라가 일간지 <로로르>에 쓴 <나는 고발한다>가 여론을 크게 움직이면서 드레퓌스를 극적인 반전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만든 것처럼 말이다.
덧붙이는 글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세계를 발칵 뒤집은 판결 31>(L. 레너드 케스터·사이먼 정 지음 / 현암사 / 2014. 5. 30. / 507쪽 / 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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