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스트립댄서가 산부인과 간호조무사 된 사연

[신간] 쥘리 보니 <나는 알몸으로 춤을 추는 여자였다>

등록|2014.06.30 10:58 수정|2014.06.30 17:11

<나는 알몸으로 춤을 추는 여자였다>겉표지 ⓒ 김준희

한 번도 산부인과에 가본 적 없다. 그렇지만 그곳 신생아실의 모습은 대충 상상이 된다.

갓 태어난 아기들이 그곳에 누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을 것이다. 어떤 아기는 조용히 잠 잘 테고, 어떤 아기는 빽빽거리며 울고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아기는 간호사의 관심을 받고 있을 지도 모른다. 아무튼 산부인과는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곳이면서 동시에 한 엄마가 태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아기가 태어났을 때의 이야기다. 최악의 경우 사산이나 유산이 생긴다면, 그 산모는 생명이 아닌 죽음을 탄생시킨 사람이 된다.

작가가 묘사하는 산부인과의 풍경

물론 이것은 하나의 가능성이다. 생명을 탄생시키거나 죽음을 탄생시키거나. 인간의 몸은 생명과 죽음 중 하나를 만들어낼 수 있다. 죽음이 태어나더라도, 그건 어찌보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애초에 우리에게는 선택권이나 결정권이 있지 않았으니까.

그렇더라도 죄책감은 남을 수 있다. 자신의 몸에서 나온 아기가 죽어버렸다는 사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 아이를 살릴 수 없다는 사실은 어쩌면 오랫동안 상처로 남을 수 있다. 다시 아기를 갖는 것이 두려울 만큼.

이런 점은 어쩌면 아기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아이는 세상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혹시라도 죽을까봐 두려웠을지 모른다. 엄마의 따뜻한 배 속에서 자신을 끄집어내던 거친 손길을 느끼면서, 저 바깥에서 무엇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궁금해한다. 모든 아이들이 세상에 와서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혹시 두려움 아닐까?

쥘리 보니의 2013년 작품 <나는 알몸으로 춤을 추는 여자였다>의 주인공 베아트리스는 탄생과 죽음이 혼재하고 있는 산부인과 병원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하고 있다. 작품의 제목처럼 베아트리스는 예전에 춤을 추던 여자였다. 그녀는 마치 집시처럼 자유분방한 음악인들과 어울려서 유럽을 떠돌아다니는 거리생활을 하며 무대에 올라 춤을 추면서 생활해 왔다.

그러다가 어떤 일을 계기로 해서 거리의 생활을 접고 산부인과 병원에 취직했다. 베아트리스의 눈에 비치는 산부인과 병동은 탄생의 기쁨이 넘치는 곳과는 좀 거리가 있다. 쌍둥이 여아 중 한 명을 사산한 사람도 있고, 모유수유의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다.

작가의 경험이 들어간 자전소설

세상 모든 일들이 마찬가지겠지만, 이런 곳에서 근무하려면 당연히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베아트리스는 왜 자유롭던 거리의 생활을 접고, 의사와 임산부들의 잔소리에 시달려야하는 산부인과에서 일하게 되었을지가 의문이다. 작품은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면서 진행된다.

베아트리스가 현재 근무있는 병동에 대한 묘사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녀의 과거 생활을 추적해가고 있다. 베아트리스는 과거에 무대 위에서 춤을 추었지만, 이제는 산부인과에서 알몸이 된 임산부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알몸으로 태어나는 신생아들도.

작가 쥘리 보니는 실제로 예전에 작품 속의 주인공처럼 유럽을 돌아다니며 순회공연을 하고, 산부인과 간호조무사로 10년 가량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 작품은 그녀의 자전적인 소설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작가는 그곳에서 수많은 탄생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갓 태어난 아기가 엄마의 몸 위에 올라있는 모습, 엄마는 그 아기를 바라보고 울고 웃으면서 아기와 사랑에 빠지는 모습, 세상에 나온 아기가 처음으로 엄마를 만나는 광경 등.

산부인과에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고, 한 명의 엄마가 만들어 지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기적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나는 알몸으로 춤을 추는 여자였다> 쥘리 보니 지음 / 박명숙 옮김. 아르테 펴냄.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