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역사교과서 채택소송 패소하면 안 되는 이유
[일본 왜곡교과서 재판 관람기] "패소하면 일본 전역 확산될 것"
▲ 일본 후쿠오카 고등재판소 전경 ⓒ 심규상
"사진 촬영은 안 됩니다."
오른쪽 팔뚝에 한자로 '재판'이라는 완장을 찬 재판소 직원이 달려 나왔다. 그가 기자의 카메라와 얼굴을 번갈아 응시하며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재판소 건물 밖인데 왜 안 되죠?"
"법원 내에서는 모든 촬영을 금하고 있습니다."
나긋나긋 친절한 말투였지만, 태도는 완강했다.
30일 오전 10시 20분 일본 큐슈 후쿠오카 고등재판소. 첫 방문은 직원과의 실랑이로 시작됐다. 건물외벽에 가로로 '재판원 제도는 국민과 사법의 오작교'라는 글귀가 걸려 있다. 큼지막하게 홍보문구를 내걸고 규정을 들어 건물 사진은 찍지 말라는 직원의 태도가 엇박자로 다가왔다.
10분 후. 미니버스 한 대가 재판소 주차장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한 눈에 오늘 재판을 방청하러온 시민단체인 '교과서네트 구마모토' 시민들임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방청객이자 재판의 원고들이다. 인사 겸, 취재 겸 활짝 웃으며 버스에서 내리는 시민들에게 달려가 카메라 렌즈를 맞췄다. 급한 구두 발자국 소리가 뒤따랐다. 앞의 완장을 찬 재판소 직원이었다.
"사진을 찍으면 안 됩니다."
그가 다시 기자를 제지했다. 할 수 없이 일행들과 재판소 정문 밖으로 이동했다. 이날 재판을 방청하러온 구마모토현 거주 시민들은 약 20여 명. 버스로 2시간 반 거리를 오기 위해 아침 일찍 구마모토현을 출발해 미나마타시를 거쳐 올라왔다.
먼저 담당 변호사가 앞에 섰다. 1심 때부터 변호를 맡은 가토 오사무(67·구마모토 벚꽃 법률사무소)씨다.
"잘 알고 계시는 것처럼 이 사건은 역사를 왜곡한 이쿠호샤(育鵬社)판 공민교과서 부교재를 일방적으로 구입해 일선 학교에 내려 보낸 구마모토현 교육청과 현 지사의 행위가 위법인지 아닌지를 다투는 항소심 첫 공판입니다. 1심에서 패소했지만 2심에서는 승소하기 위해 보다 많은 증거자료를 제출할 예정입니다."
▲ 재판 원고이자 방청객인 '교과서네트 구마모토' 회원들이 재판에 앞서 후쿠오카 고등재판소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심규상
▲ 법원내 규제 조항을 적은 안내판 (일본 후쿠오카 고동재판소) ⓒ 심규상
일선학교 역사왜곡 교과서 불채택... 현교육위원회가 '부교재'로 강제 선정
지난 2012년 일본 내에서 전무후무한 재판이 시작됐다. 아니 앞서 지난 2011년 구마모토현 교육위원회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구마모토현 교육위원회가 이쿠호샤판 공민교과서를 부교재 선정, 관내 공립중학교 3곳에 내려 보냈다. 교과서 구입예산도 이례적으로 교육위원회에서 지출했다. (관련기사:"한국 시민, 일본 역사 왜곡 저지에 힘 모아달라" )
일본도 한국처럼 교과서 선정 권한은 일선 학교에 있다. 교과서 구입예산은 각 학교에서 지출한다. 그런데도 현교육위원회가 교육행정법과 다르게 교재선정과 예산지출을 직접 한 것이다. 해당 중학교에서 역사왜곡 교과서를 선정하지 않자 현교육위원회가 역사왜곡 부 교재를 선정해 가르치게 한 것이다. 공민교과서가 두 종류가 된 것이다.
하타무라 '교과서네트 구마모토' 공동대표가 말을 이었다.
"이제 첫 문제제기를 한 때로 부터 4년이 흘렀습니다. 정부가 자기네 말을 잘 듣는 학생들을 만들려 하는 불순한 의도를 허용할 수 없었습니다. 작은 힘이지만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의미에서 이렇게 모였습니다. 귀중한 시간을 내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곧 바로 법정으로 향했다. 5층 501호 법정. 안내판의 '구마모토현립중학교 부교재 위법지출 주민소송항소사건/ 제 1회 변론'의 글귀가 선명했다. 피고는 구마모토 현지사(한국의 도지사)다. 구마모토현은 충청남도와 30여 년째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지방자치단체다.
사진촬영 여부를 지켜보기 위한 듯 재판소 직원들이 번갈아가며 기자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오전 11시. 재판이 시작됐다. 오다이쿠 주요시 재판장을 비롯 3명의 재판관이 들어섰다. 재판관을 중심으로 왼쪽에 변호사를 포함 원고 측 대표 3명이, 오른쪽에는 피고 측 변호사와 관계자 등 5명이 자리했다. 나머지는 방청석 앞자리 몰려 앉아 귀를 쫑긋 세웠다.
"정치권 부당개입+교육중립성 위반..." 9가지 항소요지
▲ '교과서네트 구마모토' 관계자가 재판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심규상
"본 사건은 공민교과서 부교재를 현교육위원회가 직접 예산까지 지출, 선정한 것이 위법인지 여부를 가리는 사건입니다. 현교육위원회가 채택한 부교재는 자민당이 추천하고 채택을 위해 매진해 왔다는 점에서 정치권의 부당개입에 해당됩니다.
또 지방행정교육법이 정한 교과서 선정권한이 일선학교에 있다는 규정을 거치지 않은 위법한 결정입니다. 게다가 편향된 부교재 내용은 헌법이 정한 교육중립성에 위반됩니다."
"(군 위안부 문제나 독도문제, 남경학살 등에 대한) 일방적 기술은 '교과서 검정시 인근 아시아 국가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근린제국조항(일본 문부성이 1982년 제정한 교과서 검정기준)에도 어긋납니다. '보조 교재 사용의 자유원칙'에도 반하는 일입니다."
그는 10여 분 간 조목조목 9가지에 달하는 항소요지를 설명했다. 그가 재판관을 응시하며 마무리 발언을 이어갔다.
"현재 아베 정권이 압도적 다수의 힘을 이용해 행하는 정권 운영은 아주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재판소의 현명한 판단을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법정 안이 더욱 숙연해졌다. 잠시 재판장이 배석한 재판관들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알아들을 수 없는 작은 소리로 말을 주고받았다. 이후 재판장이 말했다.
"잠시 10분 간 휴정합니다."
무언가를 숙의하기 위한 의도로 비쳐졌다. 10분 후 재판이 다시 시작됐다.
"7월 28일 2차 변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재판을 마칩니다."
버스를 대절해 달려와 지켜본 항소심 첫 재판은 이렇게 20분 만에 마무리됐다. 한국에서 하루 전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비용과 공력이 다소 허탈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는 기자의 짧은 소견이었음이 곧 드러났다.
꼭 승소해야 하는 이유 "역사왜곡 주교재 막으나마나...부교재 선정할 것"
▲ '교과서네트 키타규슈 구마모토' 이키쿠시씨가 이번 재판에서 패소하면 안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 심규상
주민들은 다시 재판소 정문 앞에 모였다. 가토 오사무 변호사가 말했다.
"오늘 저는 구마모토현교육위원회가 자민당의 주장을 그대로 실행했다는 점을 들어 교육이 정치적 독립성에 큰 문제가 있다는 점을 새롭게 주장했습니다. 이를 통해 일단 심리를 빨리 종결할 수 없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재판을 통해 부교재 교과서가 아이들에게 잘못된 관념을 주입하려 했다는 점을 실증해 나갈 것입니다."
'교과서네트 구마모토' 회원들을 응원하러 온 '교과서네트 키타규슈 구마모토' 이키쿠시씨가 말을 받았다.
"이번 재판은 정말 중요한 재판입니다. 만약 이 재판에서 패소하면 역사왜곡 교과서가 검정에서 채택되지 않더라도 정부가 구미에 맞는 교과서 부교재를 일선학교에 내려 보내 사실상 왜곡 교과서를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구마모토현교육위원회의 불법이 용인되면 같은 사례가 일본 전역으로 확대 될 것입니다. 좀 더 우리들이 힘을 모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마지막 발언 기회는 기자에게 주어졌다. 대한해협을 넘어온 기자에 대한 배려인 듯했다.
"한국 시민들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해 애쓰시고 계시는 여러분께 감사와 존경의 인사를 드립니다. 한국시민들도 전무후무한 이 재판의 경과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연대의 마음으로 끝까지 재판 경과를 취재해 알리겠습니다."
격려의 박수와 함께 당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재판의 중요성을 널리 알려주십시오. 일본 학생들이 선린우호와 평화공존의 가치관을 배울 수 있도록 한국민들의 힘을 보태주십시오."
관련기사 :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교과서 채택, 문제없다"
"독도는 일본땅? 일본 법원이 교사 권한 침해"
일본 법원 "'독도는 일본 땅' 교과서 채택 문제없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