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월급은 얼마지요?" "노조위원장과 똑같습니다"
[아만남] '노동자자주관리기업' 청주 우진교통 김재수 대표①
▲ 청주지역 버스회사인 우진교통 김재수 대표(사진 앞줄 오른쪽 네번째)와 직원들이 지난 18일 오후 충북 청주 상당구에 위치한 사무실 앞에서 환하게 웃으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05년 1월 20일 노동자들은 회사의 150여억 원 부채를 떠안은 채 경영주체가 되는 노동자자주관리기업을 만든 뒤, 현재 300명의 노동자와 113대 버스를 운영하며 연간 220억 원대 매출을 올리고 있다. ⓒ 유성호
#프롤로그 : 노동자들이 사장을 뽑았다
첫 자리에서 실례를 무릅쓰고 질문을 던졌다.
"김 사장님, 혹시 월급은 얼마지요?"
"노조위원장과 같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상식을 배반한 답변에 무안해졌다. 대표 임금은 노조위원장과 같다는 게 회사 협약위원회 원칙이란다. 노동자 근무일수는 잔업을 포함해 24~25일. 사장이지만 민주노총 파견직인 그의 근무일수는 28일이다. 시간당 임금은 노동자들과 같고, 그는 월 60~70만 원 정도 더 받는다. 지난해 연봉은 4800만 원선. 준공영제 버스회사 사장 임금 가이드라인 1억2000~1억5000만 원보다 턱없이 낮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 그는 노동 교과서대로 실천했다.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 '아름다운 만남'의 두 번째 주인공은 청주 우진교통 김재수 대표다. 10만인클럽 회원인 판화가 이철수 화백과 그의 부인 이여경씨가 추천했다. 우진교통은 노동자 300명이 근무하는 10년차 중소기업이다. 보유한 버스는 113대, 이 버스를 굴려서 연간 220억 원대 매출을 올리고 있다. 지난 6월 18일 오후, 충북 청주시 상당구에 있는 허름한 2층 건물 입구에 도착하니 돌출된 현관에 큼지막하게 흘려 쓴 글귀부터 심상치 않다.
"노동자들의 희망을 실천한다"
다른 회사라면 저 곳에 '친절 봉사'란 표어가 붙어 있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건물 안쪽으로 들어서니 탁구공 튀는 소리와 함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버스 승무원 10여 명이 점심을 먹고 휴게실에서 쉬고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 회의실 문을 여니 승무원 5명이 모여 있다. 그 까닭을 물으니 경영진을 특별감사하고 있단다. 그 감사 대상인 사장실에 들어갔더니 김재수 사장이 쟁반에 음료수를 얹고 테이블로 옮기다가 활짝 웃었다. 순간, 이 분이 사장님인가 의심했다.
김재수 사장은 2005년 1월까지 민주노총 충북본부 사무처장이었다. 당시 우진교통 노조원들은 그를 사장으로 추대코자 했고, 민주노총은 그를 파견했다. 2007년 12월 임기를 마친 그는 민주노총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노동자들은 회사 건물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벌였다. 그는 결국 우진교통에 주저앉았다. 당시에 노동자들은 노조위원장을 뽑듯이 1인 1표로 사장을 선출했다. 그는 노동자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사장 계속하라고 천막농성? 특이하네
사장과 노동자들의 월급이 같고, 노동자들이 사장을 투표로 선출하는 회사는 흔치 않다. 노동자들이 사장실 앞에서 항의농성을 벌이는 모습은 익숙하지만, 사장을 계속하라고 농성을 벌이는 것도 낯설다. 또 업무시간에 회의실에서 경영진의 실수를 감사하는 노조원들. 이뿐인가? 우진교통은 대표를 빼고(법적으로 허용되지 않기에) 전부 노조원이다. 단 1명의 열외자인 대표조차 민주노총 충북지부 사무처장인 '노조 세상'이다.
우진교통이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10년 전에는 여기도 '막장'이었다. 노동자들이 회사를 접수한 뒤 노동자자주관리 기업이라는 새 역사를 썼다.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이날 김재수 대표가 말한 우진교통의 10년은 한편의 연극 같았다. 그와의 질의응답을 재구성해 1인칭으로 정리했다. 노동자들과 함께한 노동자자주관리기업의 역사적 변천사이기도 하다.
#1막 : 노동자, 니들이 전문 경영을 알아?
▲ 우진교통 김재수 대표는 회사를 운영하는 철학을 소개하며 "노동자의 희망을 실천하기 위해 노동자 스스로 운영하는 노동자자주관리기업이며 노동자에게는 복지를, 시민에게는 편리한 교통을 선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설명했다. ⓒ 유성호
2004년, 우진교통은 뜨거웠다. 노동자 240여 명이 운전대를 놓고 길거리에서 싸웠다. 대화운수와 동원교통이 통합한 청주 최대 시내버스 업체였지만 2001년부터 4년여 동안 노동자들이 제 날짜에 임금을 받은 게 딱 2번이었다. 파업 전까지 매년 15~20억씩 적자였고, 자본금을 포함해 60여억 원이 증발됐다. 이 와중에 회사가 차고지까지 내놨다는 소문이 나돌자 노동자들은 일어섰다.
그해 9월, 나는 파업에 결합했다. 한국노총의 지도를 받아 시작했는데, 노동자들은 민주노총으로 상급단체를 바꿨다. 당시 나는 민주노총 충북본부 사무처장이었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장기화되자 회사는 예정된 수순을 밟았다. 직장을 폐쇄했고 부도를 냈다. 사업면허도 취소했다.
우여곡절 끝에 사용주의 항복을 받았는데, 노사 합의서에 '월급을 주겠다'고 사인을 해봤자 그 약속을 지킬 가능성은 '제로'였다. 노동자 월급은 매달 7억 원씩 나가야 하는데, 현금 보유고는 7000만 원밖에 없었다. 우리는 고민 끝에 사용주에게 요구했다.
"너희들은 회사를 운영할 능력도 안 되니 경영권을 넘겨달라."
노조는 2005년 1월에 150여억 원 부채를 승계하는 조건으로 회사 지분의 50%와 경영권을 넘겨받았다. 그 뒤 나머지 지분도 노동자들이 회수했다.
노동자 '흑자 경영', 그 비법
우진교통을 노동자자주관리 기업이라고 소개하면, 빨간 색깔을 칠해서 해석했다. 일부 지역 언론은 저주를 퍼부었다.
"노동자가 감히 경영을 해? 3개월도 못가서 망할 것이다."
내가 신뢰했던 법무법인과 회계법인에 컨설팅을 의뢰했는데 이런 답변이 되돌아왔다.
"회생불가다. 그동안 살아온 것에 먹칠하지 말고 정리하라."
"회사로서의 기능이 정지된 회사다. 방법이 없다."
이 말을 듣고 끊었던 술을 혼자 퍼먹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버스는 이미 떠났다. 그동안 나를 믿었던 노조원들을 생각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출범할 때 1인당 5백만 원씩 출자금을 낸 노조원들에게 약속했다. 첫째는 투명경영이었다. 매달 노동자들에게 경영실적과 재무상황 등 경영설명회를 열었다. 두 번째는 임금 체불이나 삭감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세 번째는 비정규직 직원들에게 주인의식을 심어주려고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했다. 이 약속을 모두 지켰다. 1년 만에 기적이 일어났다. 흑자였다. 모두들 환호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부패가 만성적자의 원인이었다. 하루 매출이 5천만 원이라면 매일 2500만원의 현금이 들어왔다. 현금을 셀 때 사장이 쥐어 가면 누구도 말을 못했다. 또 회사는 적자인데, 주주들은 직원인 것처럼 속여서 주식배당 형식으로 돈을 가져갔다.
1년에 40억 원(경유)이 기름값이었는데, 기름납품업자와 수의계약을 해서 일반 주요소보다 비싼 가격의 어음을 끊어주고, 그 업자는 사장에게 와서 20~30%의 비율로 어음 깡을 해갔다. 단순계산해도 8~12억이 어음 깡으로 날아갔다. 노동자자주관리기업으로 바뀐 뒤에는 SK와 공장도 가격으로 현찰 직거래했다.
노동자 흑자 경영 비법은 투명경영이었다. 민주노총이 그동안 사회적 교섭이나 사업자별 교섭에서 주장해왔던 원칙과 정신을 주저하지 않고 우진교통에 적용했다.
#2막 : 노동자 눈에 돈과 권력이 보였다
▲ 지난 18일 오후 충북 청주 상당구 우진교통 회의실에서 직원들이 경영진에 대한 특별감사를 하고 있다. 우진교통은 투명경영을 위해 매달 노동자들에게 경영실적과 재무 상황 등 경영설명회를 개최한다. ⓒ 유성호
어려울 때는 단결했다. 하지만 돈과 이를 좌우하는 권력이 보이자 격렬하게 싸웠다. 노조위원장 2명이 사퇴하고 조직이 요동쳤다. 분열의 씨앗은 자주관리기업에 대한 생각 차이였다. 내가 주인인데, 왜 간섭과 통제를 받아야 해? 규율을 왜 지켜? 일부 노동자들은 불평을 했다. 경영팀을 사측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생겨났다.
가령 이런 것이다. 교통사고가 나면 보통 회사는 승무원들이 변상한다. 하지만 우리는 전액 회사가 부담했다. 대신 내부 규정에 따라 징계했다. 다른 회사들과는 달리 징계위원회에도 승무직과 사무직이 반반씩 들어갔는데, 징계 받은 사람들은 반발했다.
"노동자들끼리 무슨 징계를 하냐."
노조위원장 자리를 놓고 자주관리기업을 옹호하는 분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분들이 격하게 싸웠다. 결국 자주관리기업 옹호 그룹이 이겼는데, 반대 그룹 60여 명이 집단적으로 회사를 나갔다. 그냥 나간 게 아니었다. 자주관리기업 이전 사용주가 체불했던 두 달 치 임금과 세 달치 상여금을 한꺼번에 달라고 했다. 회사 수익금과 교통카드를 압류했다. 퇴직금 포함해서 46억 원이 지출됐다. 171일간의 투쟁 때보다 심각한 최악의 위기였다.
이 고비를 넘기는 작업은 눈물겨웠다. 신규인력을 공개 채용하는 동안 기존 노동자들은 쉬지도 못하고 일했다. 근로복지공단에서 500~700만원씩 융자를 받았다. 6개월을 버틸 수 있는 생계비였다. 이것도 받지 못하는 신용불량자도 많았는데, 노동자들은 그들에게 회사 현금 수입에서 1인당 120만 원씩 응급 생활비로 지급하는 것을 허락했다.
단시간 노동자들의 임금은 100% 지급했다. 자기도 힘든 시기에 더 어려운 노동자들을 도우면서 위기를 넘었다. 형편이 되는 분들은 집을 담보대출해서 회사채를 샀다. 심지어 한 노조원은 암 선고를 받고 그 뒤에 나온 암 진단비까지 빌려줬다.
#3막 : 우린 왜 동지끼리 싸웠나?
▲ 우진교통 정비사들이 차고지에서 분주히 버스를 정비하고 있다. 우진교통은 출범 당시 비정규직 직원들에게 주인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 유성호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회사를 정상화시킨 뒤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사람'이었다. 투명경영도 중요하지만 자주관리 체계를 만드는 게 우선이었다. 구성원들이 경영부터 노동, 분배에 이르기까지 직접 관리하고 운영하는 체계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2008년 9월에 이를 골자로 한 4대 과제를 발표했다. 투명경영의 시대를 넘어 직무자치의 시대로 들어갔다.
경영자치와 노동자치, 양 날개로 진행했다. 우선 경영자치의 경우 우진교통에도 대표이사가 있고 임원이 있다. 하지만 회사의 주요한 결정 권한은 자주관리위원회가 행사했다. 총 15명으로 이뤄진 자주관리위원회 위원 중 과반수인 8명이 현장노동자다. 그 외 노조위원장, 대표이사, 임원 3명, 부장 2명이 위원회의 구성원이다. 15명 모두 전직원의 선거를 통해 선출된다. 대표에서 평사원까지 투표권은 '한 표'다.
현장자치모임은 25명쯤 되는데 11개조가 운영된다. 현장에서 운전하면서 벌어지는 다양한 문제를 노동자들이 결정해서 해결했다. 배차 간격, 불친절 민원, 연료비 절감 문제 등은 현장자치조가 결정했다. 대표인 나도 함부로 간섭할 수 없다.
노동자들이 직무자치를 수행하려면 자질을 쌓아야 했다. 직무능력과 자주관리에 대한 이해도도 높여서 '노동의 품격'을 올렸다. 인재육성 프로그램을 만들어 매년 20여 명씩 6개월 동안 자본주의, 노동자 철학, 노동운동사 등을 특별교육 했고, 직무교육을 병행했다. 전체적으로 노동의 질을 기능뿐만 아니라 회사경영에 대해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과정을 밟고 있다.
'행복한 노동'을 싣고 시내버스는 달린다
▲ 진교통은 현장자치모임을 운영하며 현장에서 운전하면서 벌어지는 다양한 문제를 노동자들이 결정해서 해결한다. 배차 간격, 불친절 민원, 연료비 절감 문제 등은 현장자치조가 결정한다. 이는 대표도 함부로 간섭할 수 없다. ⓒ 유성호
▲ 우진교통 승무원들이 점심을 먹은 뒤 휴게실에서 탁구를 치며 동료들과 함께 여가시간을 보내고 있다. ⓒ 유성호
우진교통은 청주시 교통정책을 바꾸고 있다. 지난해 초에 청주 시내버스 업계에서 비정규직 도입을 요구했고 청주시가 이를 허락하려고 했다. 사실 시내버스 업체들은 비정규직을 채용하면서도 편법으로 정규직 보조금을 받고 있다. 우리 회사에 적용되는 일은 아니지만 지역 교통 상황을 악화시키는 정책이다. 이에 우진교통 노조원들은 청주시 교통과를 점거 농성했다. 농성한 지 불과 1시간 30분만에 비정규직 채용을 금지하겠다는 확약서를 받았다.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은 회사를 바꿨고 사람을 바꿨다. 그리고 지역을 바꾸고 있다. 우리 버스의 종착역은 '행복한 노동'이다. 이 실험이 지속가능하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 협동조합? 우리들의 소박한 '노동 공동체'가 이 땅의 노동탄압에 작은 파열구라도 내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요즘 내 고민이다.
ps. 김재수 대표는 그의 사무실에서 한 시간여에 걸쳐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의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펼쳤다. 인터뷰 도중 찾아온 고려대 강수돌 교수 부부와 잠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의 사무실 벽면 곳곳에는 기자에게 낯익은 판화가 걸려있었다. 이철수 화백이 보내준 것이었다. 그와 함께 제천 이 화백의 집으로 향하는 승용차 안에서도 인터뷰는 계속됐다. 이철수 화백과의 아주 오래된 만남은 에필로그에서 이어진다.
[에필로그] '입진보'들이여, 앉은 자리부터 바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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