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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광하는 현대사', 19금만이 전부는 아니다

[하성태의 사이드뷰] 어느새 당도한 한국 19금 애니의 첫 번째 성취

등록|2014.07.16 09:26 수정|2014.07.16 09:26

▲ <발광하는 현대사>의 공식포스터. ⓒ 콘텐츠판다


시종일관 발광(發狂)을 하면서, 종종 발기(勃起)도 시킨다. 섹시하면서 색(色)다르다. 우리네 현대사가 민주주의를 갈구했듯, '민주'를 갈망하는 '현대'의 여정은 고단하기 그지없다.

이 32살 남자 현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관계들 안에 한국사회의 건강하지 못한 관계망이 보인다. 내면화된 주종관계와 채워지지 않아 더 비뚤어진 욕망, (상대에게) 도달하지 못하는 부유하는 진심들이 적나라한 정사신 위를 떠다닌다. 킬킬대다, 침을 꿀꺽 삼키다 보면 어느새 헛헛한 우리네 관계와 닮아 있는 캐릭터들의 사연에 집중하게 된다. 

상찬 받아 마땅할 '19금' 애니메이션 <발광하는 현대사>는 외적인 면에서도 그 시도 자체로 주목받는 작품이다. 강도하의 동명 웹툰 원작, <돼지의 왕>, <사이비>를 연출한 연상호 감독 프로듀싱, '대한민국 최초' VOD전용 19금 애니메이션, 배급사 NEW가 설립한 부가판권유통 전문회사 '콘텐츠판다'의 첫 번째 작품 등등.

특히 장르나 유통 면에서 <발광하는 현대사>가 주목받을 이유는 충분하다. <블루시걸>과 <누들누드> 이후 끊어져 버렸던 19금 애니메이션의 명맥을 이어간다는 점과 극장 개봉 없이 IPTV를 비롯해 인터넷 모바일 VOD 같은 디지털 플랫폼으로 바로 유통된다는 점, 이 두 가시 실험 측면에서 그러하다.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다. 19금이란 외피 속에 내장된 작품의 함의가 반짝반짝 발광한다.    

이 19금 애니메이션을 주목해야 하는 몇 가지 이유

▲ <발광하는 현대사>의 미정과 민중, 그리고 현대. ⓒ 콘텐츠판다


32살 일러스트 시간강사 현대와 27살 교통정보 리포터 민주, 속궁합을 맞춰가던 둘은 그러나 돌연 현대의 결혼으로 그마저도 그만두게 된 관계다. 오매불망 자신만을 바라보는 (혼인신고도 하지 않은 아내)순이를 두고 현대는 그러나 줄기차게 다른 여자와의 잠자리를 즐긴다.

이유? 아마 자기 자신도 모르는 것 같다. 그저 몸이 가는대로, 흥미가 가는대로, 콜이 오는대로 몸을 맡길 뿐이다. 지속적으로 집착 중인 민주 외에도 현대는 '현대바라기' 아내 순이, 현대의 수업을 받으며 섹스파트너로 격상된 주부학생, 대학후배인 대학원생 조교 미정, 단골카페 알바생 민중, 미술관 관장 영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관계를 가지게 된다.

부러울 것 없다. 현대가 갈망하는 이는 오로지 민주로 보이니까. 그 외의 여자들은 그저 쾌락이거나 욕구거나 습관일 뿐이다. 더욱이 현대의 여자들과 민주의 남자 철수, 현대의 대학 선배이자 미대 학과장인 춘배, 순이의 직장동료 훈이가 얽히고설켜 있다. 때로는 복마전이고, 때로는 순애보이며, 때로는 권력관계인 이 '현대의 사람들'은 그러나 '현대인의 자화상'쯤으로 치부해버리기엔 나이브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전개 자체가 그러하다. 단순히 섹스 코미디 혹은 로맨스물일 거라 착각하기 쉬운 <발광하는 현대사>는 그러나 인물들의 관계망이 드러나는 중편 이후부터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의식을 직접적으로 발산하기 시작한다(<발광하는 현대사> 자체는 짧은 '미드'나 '일드', OVA를  연상시키듯 1회 22분짜리 총 11부작으로 이뤄졌고, 상중하편으로 나뉘어 관람 가능하다). 현대를 둘러싼 인간군상들이 왜 헛헛한 마음을 부여잡고 서로의 몸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지 혹은 그 집착을 버린 이들의 양상은 어떤지를 말이다.

몸의 대화, 그 적극적인 의지를 절묘하게 풀어낸 성인용 만화  

▲ <발광하는 현대사>의 민주와 훈이. ⓒ 콘텐츠판다


부연하자면 이렇다. 민주는 6년째 기다려온 철수를 갈망한다. 그 철수를 아내인 영희가 (사랑 없이) 또 기다린다. 그 영희와 현대가 우연찮게 관계를 맺는다. 그 현대에게 종속당한 주부학생은 이혼을 감행한다.

그 주부학생에게 전화 스토킹을 당하는 순이는 순수한 훈이에게 마음이 간다. 그 훈이는 민주와 (섹스 없는) 동거 중이다. 그 민주에게 집착하는 현대는 알바생 민중과 몸을 섞는다. 그 민중을 걱정하는 춘배는 미정의 스폰서다. 그 미정과의 관계가 알려짐과 동시에 (또 다른 이유로)현대는 일종의 파국을 맞는다.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현대사, 로 단순히 읽기에 <발광하는 현대사>는 무척이나 중층적이다. 일견 강렬한 욕망과 일탈의 드라마로 읽기엔 인물들 전부 처연하기 짝이 없다. 각자 돈과 권력, 젊음과 안정이 너울거리는 삶을 영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 자신이 진짜 원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는 서로를 파괴하거나 더 나쁜 방향으로 이끄는 것만 같다.

당연하다. 그들이 종속된 대상과 관계 이전에 이미 그들은 (현대를 그리 만든)세상에 단단히 종속돼 버렸으니. 이미 권력에, 돈에, 지위에 종속당한 이들은 그 헛헛한 관계를 무 자르듯 잘라낼 생각이 없다. 춘배에게 구속당하는 미정이나 서로 이혼하지 못하는 철수와 영희는 물론 현대의 몸을 사랑이라 착각하는 주부학생까지도.

그 와중에 가장 이 구속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워 보이는 영혼의 이름이 '민중'이라는 점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그것이 강도하 작가가 보여주는 일말의 낙천성에 기인한다 해도 말이다. 그리하여 <발광하는 현대사>는  왜 우리가 더, 제대로 몸을 부대껴야 하는지를 설파하는 일종의 관계의 심리학으로 읽어도 무방해 보인다. 흡사 "몸을 통해 비로소 외부의 대상이 주어진다"던 '몸철학'의 대가 메를로 퐁티의 전언을 떠올리게 하는 것도 그래서다.

그렇게 <발광하는 현대사>는 몸에, 관계에, 섹스에 탐닉해도 정신을, 마음을 채우지 못하던 현대처럼은 되지 말자는 일종의 충고이자 슬픈 다짐과도 같다. 돌고 돌아, 끝내 민주와 현대가 그 '종속'의 굴레를 끊어냈으면 하는 바람이 비춰지기에, 둘의 몸부림은 더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한국 19금 애니메이션의 빛나는 성취 <발광하는 현대사> 

▲ <발광하는 현대사> 언론시사회에 참석한 (좌로부터)연상호 감독, 강도하 작가 이민지, 이상희 배우, 홍덕표 감독, 정영기 배우. ⓒ 콘텐츠판다


그렇다고 심각하게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민주(주의)'와 '(한국)현대(사)'라는 지시적인 상징에 함몰될 필요는 없단 뜻이다. 현대와 주변인물들이 보여주는 리얼리티와 (남성 혹은 여성)판타지의 뒤섞임은 그 자체로 한국 성인들의 공감대를 자극하기에 충분해 보이니까. 각 캐릭터의 관계들을 엮어가는 에피소드나 찰진 대사들을 즐기는 재미만으로도 <발광하는 현대사>는 한국 19금 애니메이션의 성취라 할 만 하다.

제작진이 "세게, 더 세게"를 외쳤다는 애정신도 과하지 않을 선에서 충분히 색다르다. IPTV를 중심으로 형성된 19금 소비자층이 만족하기에 적절한 수준이랄까. <돼지의 왕> <사이비>에서 성우가 아닌 배우들과 호흡을 맞췄던 연상호 감독의 손길을 거친 만큼, 정영기, 이은우, 박효준 등이 참여한 배우들의 목소리 녹음도 매끄럽게 다가온다.

그래서 단점은 없느냐고? 있다. 러닝타임이 복병이다. 한 편의 장편영화처럼 받아들였다가는 4시간 넘게 홀랑 탕진하고 진이 빠질지 모를 일이다. '미드' 마니아들이 밤 새는지 모르는 것처럼. 대신 상편 이후 점점 진중해지는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만 되어 있다면, <발광하는 현대사>는 분명 색다른 체험을 안겨줄 것이다. 그간 한국 19금 애니메이션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재기와 발광, 애상(哀想)까지 탑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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