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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총잡이' 이준기가 새롭지 않은 이유, 이거였군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2 드라마 <조선총잡이> 첫 번째 이야기

등록|2014.07.18 11:53 수정|2014.07.18 11:53

▲ 드라마 <조선총잡이>. ⓒ KBS


배우 이준기를 주연으로 내세운 KBS2 수목드라마 <조선총잡이>는 19세기 중후반인 구한말을 배경으로 한다. 이 드라마에는 총을 든 자와 활이나 칼을 든 자의 무예 대결이 자주 나온다.

총은 서유럽에서 개발된 무기다. 그래서 총과 활·칼의 대결은 서양 문물이 들어온 구한말이란 시대적 배경에 잘 맞을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조선에서 총과 칼·활의 대결은 구한말보다 훨씬 이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래서 구한말에는 이 대결이 이미 식상한 것이 되어 버렸다. 총과 조선의 관계를 살펴보면, 이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총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물건이다. 역사학자 르네 그루쎄가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에서 말했듯이, 북아시아 유목민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비결이 기마술이었다면 서유럽인이 세계를 제패한 비결은 바로 총포술이었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유라시아대륙의 서쪽 변방에 불과했던 서유럽은 바닷길과 총포술에 대한 지식을 통해 세력을 팽창하다가 19세기 중반에 중국을 굴복시킴으로써 세계의 권력 지형을 바꾸어놓았다. 

총은 포르투갈과 일본과 대마도(당시엔 독립국)를 거쳐,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3년 전인 1589년 조선에 소개됐다. 일본에는 1543년에 소개됐다. 일본보다 총을 늦게 받아들인 결과로, 조선은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다.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때까지 조선군의 주력 무기가 활이었기 때문이다.

발해가 멸망한 이후로 외국을 침공하기보다는 외국의 침략을 방어하는 데 주력한 한민족은, 적군이 침공해오면 산성으로 들어가 화살이나 대포를 쏘아 적군에 타격을 입히는 전술을 구사했다. 이런 전략은 대체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옛날 한국군은 활을 잘 쏘는 군대로 알려졌다. 게다가 국가가 선비들에게도 활쏘기를 권장했기 때문에, 사회 전반적으로 활쏘기 실력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칼과 창 잘 다루는 사극 속 무사들은 낯선 장면

사극 속의 군인이나 무사들은 칼이나 창을 잘 다루지만, 이것은 우리 역사에서는 낯선 장면이다. 일부 무인들이 창과 칼을 잘 다루긴 했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한국 무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민족 군인들은 칼이나 창을 휴대하고 있을지라도 기본적으로 활쏘기를 더 잘했다. 칼이나 창은 그냥 폼으로 갖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정조 임금 때인 18세기 후반에 나온 <무예도보통지>라는 무예 교본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나라는 … 예로부터 전해오는 것이 활과 화살뿐이다. … 칼과 창은 버려진 무기가 된 지 오래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싸울 때에 왜군이 죽기를 각오하고 돌진하면, 우리 군사는 창을 잡고 칼을 차고 있으면서도 … 속수무책으로 적의 칼날에 꺾여버렸으니, 이는 칼과 창을 익히는 방법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궁수 위주로 병사들을 양성하다 보니, 한민족 군대는 위와 같이 칼과 창에 약한 군대가 되었다. 대신, 활쏘기만큼은 동아시아에서 그 누구도 상대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옛날 한국 정부는 외국 사신에게 활쏘기 쇼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군사력을 과시하곤 했다.

▲ 조총을 제작한 화기도감이 있었던 터. 한때 이곳의 명칭은 조총청이었다. 서울 종로구 화동의 정독도서관 입구에 있다. ⓒ 김종성

그러나 활쏘기에 대한 한국인들의 자부심은 임진왜란(1592~99년) 때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일본군의 조총 앞에서 조선의 활이 무기력했기 때문이다.

이때의 경험을 계기로 조선은 조총 국산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노력은 얼마 안 가 성공을 거두었다. 인조 집권기(1623~1649년) 때에는 조선 내부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 조총이 '메이드 인 재팬' 조총보다 우수하다는 자체 분석이 나왔다.

이 정도로 조선의 조총 개발은 매우 빠르게 발전했다. 일본한테만큼은 질 수 없다는 경쟁심도 조총 기술의 발전에 적지 않게 기여했을 것이다.

조선 정부가 조총 국산화에 열정을 바쳤다는 점은, 1653년 제주도에 우연히 표착한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하멜 표류기>에 따르면, 당시의 임금인 효종은 하멜 일행을 환대하고 이들을 경호부대에 배속시켰다. 효종이 이들을 자기 옆에 둔 것은 서양의 총포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효종 7년 7월 18일자(양력 1656년 9월 6일자) <효종실록>에 따르면, 하멜이 조선에 온 지 3년 만인 1656년에 효종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총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이 네덜란드인 히딩크에게서 새로운 것을 배운 것처럼, 조선 군대도 네덜란드인 하멜로부터 새로운 것을 배웠던 것이다.

네 발 중 한 발 적중... 총 잘 쏘는 나라로 알려진 조선

조선은 군대의 주력을 궁수 부대에서 총수 부대(포수 부대)로 바꾸는 데도 주력했다. 이런 시도도 단기간에 결실을 보았다. 일례로,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1614년에 여진족과의 전쟁에 파견된 조선군 병사 1만 명 중에서 총수의 숫자는 궁수와 똑같은 3500명이었다.

얼마 뒤인 17세기 중반에는 총수가 궁수를 압도하고 조선군의 주력이 되었다. 조선이 얼마나 열심히 총수를 양성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19세기 초반이 되면 조선군은 4만 5천 자루의 총을 보유하게 된다.

총수가 궁수를 압도한 17세기 중반은 조선왕조 5백년의 중간 시점이다. 17세기 중반에 총수 부대가 조선군의 주력 부대가 됐다는 것은, 총수 부대가 조선왕조 5백년의 절반인 2세기 반 동안 조선의 안보를 책임졌다는 뜻이다. 이것은 '조선은 총잡이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님을 뜻하는 것이다. 

▲ 총을 든 조선 순사의 모습. 1890년 5월 10일자 <런던뉴스>에 실린 삽화다. ⓒ 런던뉴스

조선군은 국산 총을 제작하고 총수 부대를 확충하는 데만 성공을 거둔 게 아니라, 총을 다루는 기술의 연마에서도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총을 잘 쏘는 나라라고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점은 나선정벌의 성과에서도 잘 드러난다. 나선(羅禪)은 러시아를 가리킨다.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통해 동아시아에 진출한 17세기부터, 동아시아에서는 나선에 대한 공포심이 생겨났다. 나선정벌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단행된 조선·청나라의 합동 작전이었다.

나선정벌은 1654년과 1658년에 만주 동북부에서 단행됐다. 조선은 두 차례의 싸움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조선군이 승리를 거둔 원동력은 바로 총이었다. 조선군의 화려한 사격술 앞에서 러시아군이 와르르 무너진 것이다.

출정 전에 행해진 사격 연습에서 조선군의 적중률은 25.8%였다. 네 발 중에서 한 발은 적중한 셈이다. 만약 이때쯤 제2의 임진왜란이 벌어졌다면, 일본군은 부산에도 상륙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을 것이다.

조선은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럽의 총을 경험한 나라다. 그런 나라가 반세기 만에 유럽 국가인 러시아를 총으로 격파했다. 이것은 조선이 총이라는 무기에 대해 얼마나 빠르게 적응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처럼 조선은 이미 17세기에 총잡이의 나라가 되었다. 미국인들이 아메리카대륙에서 서부시대를 개척하기 훨씬 이전에 조선에서는 수많은 총잡이들이 양산됐던 것이다.

조선이 이렇게 빨리 총에 적응한 것은 예로부터 한국인들이 신무기 개발에 특별히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14세기 후반에 최무선이 화포를 개발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국이 한반도 주변 해역의 제해권을 장악한 사실에서도 드러나듯이, 예로부터 한민족은 어딘가에 좋은 무기가 있다는 정보가 들리면 그것을 어떻게든 개발해서 실용화하는 나라였다. 이런 문화 덕분에 17세기 중반에 이미 총잡이 민족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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