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 진성여왕 때 창건된 천년고찰 아산 봉곡사(송악면 유곡리) ⓒ 김현자
▲ 봉곡사는 일본의 불교정책을 반대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승려인 만공선사가 오도송을 읊은 곳. 만공탑 둥근 부분에 만공선사의 친필 '세계제일'이 새겨져 있다. ⓒ 김현자
아산 봉곡사는 신라 51대 진성여왕 원년(887년)에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된 천년고찰이다. 절은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중창(의종,1170년)되고, 이후 세종 때 함허화상에 의해 거듭 중창되면서 6개의 암자까지 거느릴 정도로 규모가 큰 절이 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본찰인 봉곡사는 물론 6개의 암자 모두 폐허가 되고 만다. 이런 절이 소생한 것은 인조 24년(1647년)에 중창되면서. 이후 두 차례의 중수(정조와 고종 때)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도선국사가 창건할 당시 이 절의 이름은 '모연고찰'이었다고 한다. 봉곡사라 불리기 시작한 것은 정조 18년인 1794년에 중창되면서부터. 앞서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중창되면서 '석암사'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한때 6개의 암자까지 거느릴 정도였던 봉곡사는 그러나 지금은 규모가 매우 작다. 대웅전을 비롯한 고방채와 삼성각 등 다섯 전각에 불과하고 그 흔한 일주문까지 없다. 게다가 이처럼 오랜 역사를 지녔음에도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때문일까? 언뜻 그리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이름으로 여러 차례 바뀌었음에 애틋함마저 느껴졌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절이었다면 중창 때마다 다른 이름으로 바뀌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나만의 지레짐작 생각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7월 16일, 봉곡사에 갔다. 기차(서울역에서 출발하는 누리로)를 놓치는 등 좀 힘들게 간 길이었다. 봉곡사에서 눈여겨 볼 것은 문화재로 지정된 '봉곡사 대웅전 및 고방(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323호)'과 '만공(선사)탑'이다.
특이하게도 물건들을 보관하는 창고인 고방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서 고방채란 전각에 대한 기대를 하고 갔다. 그러나 하필 공사 중이어서 살펴볼 수 없는데다가, '고방은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이다. 2층 형태로 되어 있으며 대웅전 옆의 80칸의 'ㅁ'자의 요사채 건물 중 일부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란 설명 뿐(대웅전 앞 문화재 안내판의)이어서 아쉽게 돌아서야만 했다. 공사가 끝날 예정인 9월 30일 이후 다시 한 번 꼭 찾으리라 생각하면서.
봉곡사와 함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인물은 일제강점기 일제의 불교정책을 반대했던 독립운동가인 만공선사(1871년~1946년)다. 만공선사가 이곳에서 일체유심조 법을 외우다가 한 깨달음을 얻으며 오도송을 읊었다는 곳이기 때문이다. 봉곡사 입구 왼쪽 언덕에 이를 기념하는 만공탑이 세워져 있다. 탑 둥근 부분에 새겨진 '세계제일'이란 글씨는 만공스님의 친필이란다.
▲ 봉곡사 소나무 숲길 부분. ⓒ 김현자
▲ 봉곡사 소나무 숲길 부분. ⓒ 김현자
사실 봉곡사도 궁금했지만, 봉곡사에 이르는 700여 미터 소나무 숲이 더 궁금해 간 길이었다. 얼마 전 외암민속마을에 간다고 블로그 글들을 검색했는데, 봉곡사를 다녀왔다는 몇 사람의 봉곡사 소나무 숲길에 대한 글들이 언젠가 한번은 꼭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했기 때문이다.
산림청과 (사) 생명의 숲 국민운동본부는 2000년부터 해마다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를 통해 후손들에게 물려줄 가치 있는 숲을 공모. 일부 숲을 선정 수상해 오고 있다. 이 봉곡사 숲길은 제5회(2004년)-천년의 숲(거리숲 부문) 장려상'을 받았다.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아 사람이 거의 오가지 않는 호젓한 길을 사부작사부작 걸어 올라갔다. 산딸기나무나 누리장나무처럼 그리 크게 자라지 않는 나무들과 조금씩 보일 뿐, 거의 소나무들만 보였다. 사진을 찍으며 700m를 올라가 다시 내려오는 동안 자가용 3~4대 가량과 산악자전거를 탄 사람 넷, 나처럼 걷는 사람 6명 정도만을 봤을 정도로 호젓한 길이었다.
소나무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거북이 등껍질 무늬 비슷한 소나무의 줄기 무늬는 오래 자란 소나무에서 나타난단다. 봉곡사 들어가는 소나무 숲길에는 이처럼 인편 모양으로 갈라진 무늬의 줄기를 가진 소나무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래된,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많았다.
예전에 '전우익-<혼자만 잘살믄 무슨 재민겨>'란 책에서 소나무의 살균 효과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오래된 소나무 토막 위에 우유를 올려놓았을 때와 실온에 그냥 뒀을 때의 상태를 관찰했단다. 결과는 실온에 둔 우유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상한 것과 달리 소나무 토막 위에 둔 우유는 3일이 지나도 상하지 않았다는 것. 이와 같은 살균 효과 때문에 프랑스의 고급향수에는 한국산 소나무 성분이 반드시 들어간다는 내용이었다.
우종영-<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란 책에서도 소나무 관련 글을 읽었다. 어떤 의사가 스트레스가 심하게 쌓였다 싶으면 자기만의 나무로 정해둔 오래 자란 소나무로 찾아가 소나무 등걸에 몸을 기대거나 등과 같은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털어내곤 한다는 내용이었다.
오래된 소나무를 찾아가 기대는 것만으로 스트레스 해소가 가능할까? 소나무 성분에 살균효과는 물론 심신 안정의 효과까지 있음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음은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 그러니 가능하지 않을까. 아니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 봉곡사 소나무 숲길에서 만난 들꽃 중 한가지인 큰뱀무 꽃. ⓒ 김현자
▲ 봉곡사 소나무 숲길에서 만난 들꽃 중 한가지인 짚신나물 꽃. ⓒ 김현자
소나무가 울창해도 봉곡사 들어가는 숲길은 그늘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소나무가 넓은잎나무(활엽수)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마른장마로 전국이 30도를 웃돌았던 16일 그날, 그럼에도 봉곡사 들어가는 길은 그리 무덥지 않았다. 아니, 잠깐 의자에 앉아 쉬었는데, 5분도 채 되지 않아 등골이 시원해질 정도로 시원한 길이었다. 아마도 나무들 덕분이리라.
봉곡사 소나무 숲길을 걷는 동안 어떻다 딱히 표현할 수 없는 향기들이 느껴졌다.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보니 아동기와 청소년기에 고향 마을의 뒷산에서 맡았던 그 향기였다. 읍내와 가까운 때문에 다른 곳보다 빨리 발전하면서 시골 마을의 옛 정취를 많이 잃어버린 내 고향 마을에서도 이제는 결코 맡을 수 없는, 나 어렸을 적 오래전의 그 자연의 향기 말이다.
7월 봉곡사 소나무 숲길엔 산딸기가 붉게 익어 가고 누리장나무가 꽃을 피우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짚신나물과 등골나물, 큰뱀무 등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소나무가 주는 왠지 맑음과 편안함을 느끼며, 야생화들을 만나며 걷는 그 순간들이 무척 행복했다.
그러나 봉곡사 가는 길의 소나무들이 저마다 깊은 상처, 그 흔적을 지니고 있어서 마음 아팠다. 일제는 패망직전 부족한 연료를 송진으로 대체, 전국의 소나무들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이런지라 오래된 소나무가 많은 곳에서는 당시의 상처를 간직하며 자라는 소나무들을 볼 수 있다. 봉곡사 소나무 숲길의 소나무들도 그 상처들을 새긴 채 자라고 있었다.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많기 때문인지 봉곡사 소나무들의 상처는 더욱 두드러지는 것 같다. 아름드리 소나무마다 밑둥 가까이 크고 작은 상처들을 지니고 있었다. 처음엔 크기가 비슷했을 상처들은 그러나 자라면서 성장에 따라 달라졌을 것, 어떤 것들은 하트 모양을 하고 있기도 했고, 언뜻 웃는 듯한 모습의 상처를 가진 나무들도 있었다.
▲ 일제강점기 일본이 송진을 연료로 쓰면서 남긴 상처. ⓒ 김현자
▲ 일제강점기 일본이 연료로 쓰고자 송진을 채취한 흔적. ⓒ 김현자
'나무는 그렇듯 우리 인간들에게 수많은 것들을 주기만 하는데 인간들은 왜 그리 탐욕을 앞세워 상처를 내기만 하는 걸까?'
봉곡사 소나무들의 상처들을 보며 자신의 작품 사진 구도에 맞지 않거나 사진 촬영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울진 소광리의 220년 된 금강송을 비롯한 수십 그루의 소나무들을 잘라냈다는 모 사진작가의 파렴치한과 일제가 나무에까지 저질렀다는 만행 그 흔적들이 겹쳐 떠올랐다.
수도권에서 봉곡사 소나무 숲길에 가려면 온양온천역까지 간 후 버스를 타면 된다. 숲이 시작되는 봉곡사 주차장까지 가는 버스(140번)가 있으나, 왕복 6차례만 운행된다. 인근의 유곡1리 마을회관까지 141번과 132번 버스가 가나 이 버스들 역시 그리 자주 다니지는 않는단다.
이런지라 대중교통편으로 가는 것은 좀 불편할 수 있다. 그래도 나무와 숲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꼭 찾아가볼만한 곳으로 추천하고 싶다. 봉곡사 들어가는 길에 만나는 시골마을들이나 가로수가 아름다운 길 등, 내 고향처럼 읍내와 가깝다거나 교통이 편한 시골마을에선 이미 수십 년 전에 사라진 풍경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가까이에 외암민속마을이 있다. 이 두 곳은 거리상으로는 가깝다. 그러나 봉곡사 쪽 교통편이 그리 많지 않아 대중교통으로 두 곳을 하루에 가는 것은 좀 버거울 수 있겠다. 그래도 두 곳을 갈 거라면 '봉곡사 먼저 들른 후 나오는 길에 외암민속마을에 가는 것이 좋겠다'이다. (봉곡사에서 나오다 송남초등학교나 송악농협에서 내려 조금 걸으면 된다.)
4일과 9일에 온양온천역 일대에 오일장이 열린다. 워낙 풍성하게 열리기 때문에 다른 지역 사람들도 많이 찾을 정도란다. 오일장에 맞춰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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