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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많이 벌어도 힘든 삶... 대체 뭐가 문제일까?

['좌충우돌' 사회적경제 7] <살림/살이 경제학을 위하여> 이야기

등록|2014.07.23 20:07 수정|2014.07.24 10:11
사회적경제가 대세라고 한다. 협동조합기본법 제정 뒤 수많은 협동조합이 생겨나고 있고, 정치권은 이에 편승해 사회적경제를 시대의 화두인양 조명했다. 먹고 사는 문제라며 서로 앞다투어 사회적경제를 이야기하는 형국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혹자들은 사회적경제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자본주의의 대안으로까지 거론되지만 아직 사회적경제의 힘이 너무 미약하기 때문이다. 과연 전체 경제 규모의 1%도 되지 않는 사회적경제가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을까? 뭐든지 대기업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작금의 시스템에서 협동조합이 생존 그 이상의 성과를 낼 수 있을까?

당위성은 인정해도 가능성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는 현실. 이런 괴리는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맹신에서 비롯된다. 이 시대의 자본주의 체제는 우리에게 공기와도 같기 때문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시스템에 복속되어, 시스템 안에서 영위하는 삶. 그러니 자본주의 시스템 그 너머를 상상하는 것 자체가 어려울 수밖에.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자본주의 체제에 안주했던 것은 아니다. 다행히 인류는 마르크스나 칼 폴라니 등과 같은 자본주의 그 너머를 상상했던 사람들 역시 배출해냈다. 홍기빈 박사도 그 중 한 명이다.

우리가 잊어버린 '살림/살이 경제학'

▲ 살림/살이 경제학을 위하여 ⓒ 지식의 날개

홍기빈 박사의 <살림/살이 경제학을 위하여>는 다른 방식으로 경제를 사유하는 법을 보여줘 새로운 상상을 하게 하는 책이다.

저자는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경제가 결코 전부가 아님을 지적하며 따라서 '경제'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현재의 시스템도 절대적인 게 아니라고 이야기 한다.

우리는 현재 모든 행위 및 일상을 '경제적 합리성'으로 재단하지만 그 '경제적 합리성'도 결국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현재 우리가 쓰는 경제라는 개념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정리한다. '살림/살이 경제'와 '돈벌이 경제'가 바로 그것인데, '살림/살이 경제'란 공동체 안에서 구성원들이 물질적인 자급자족을 위해 벌이던 경제생활을 의미하며, '돈벌이 경제'란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생활의 일부분을 의미한다.

사실 처음 들어서 낯설 뿐이지 '살림/살이 경제'는 결코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이전,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인간 사회의 경제 행위를 칭하는 것으로서, 공동체 속에서 삶을 목적으로 개인이 필요한 것들을 얻어왔던 방법들을 의미한다. 물물교환은 물론이거니와 화폐를 이용한 제품의 교환 역시 이에 해당한다.

혹자들은 화폐의 등장을 자본주의의 등장과 등치시키지만 조선시대에도 시장이며 화폐는 물물교환을 도와주는 수단으로 존재했었다. 살림/살이 경제에 있어서도 일정 규모를 넘어서게 되면 최소한 '계산수단으로서의 화폐'의 사용은 불가피했던 것이다.

문제는 그와 같은 화폐가 근대국가의 형성과 함께 경제 전면에 나서면서부터 발생되었다. 16세기 서유럽은 보편적 전쟁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데 당시 군주들은 전쟁에 필요한 화폐를 조달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화폐, 즉 돈벌이를 위한 경제학을 통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경제를 조직하고자 하는 근대국가의 등장. 이는 기존의 살림/살이 경제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살림/살이 경제가 돈벌이 경제와 하나로 혼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 등장한 건 바로 이때였다. 그는 '인간이 노동을 투하하여 쓸모 있게 만든 세상의 모든 것이 부'라고 주장하며 살림/살이 경제와 돈벌이 경제를 하나로 통합시켰다. '보이지 않는 손'이란 '자연적 법칙'을 바탕으로 살림/살이 경제를 '회계적인 합리성'이 지배하고 있는 돈벌이 경제학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후 경제학자들은 돈벌이 경제를 경제의 유일한 개념으로 정리한 뒤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인간의 모든 행위 및 생산물들을 노동시간 등과 같은 동일한 기준으로 환산해 가치의 세계로 치환했으며, 이를 가격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비록 칼 마르크스와 같은 사회주의자들이 이와 같은 자본주의에 반기를 들었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은 기존의 시스템을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들 역시 돈벌이 경제학이 전제로 삼은 '경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오히려 논리적으로, 경험적으로, 역사적으로 완결된 '가치 법칙의 세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살림/살이 경제학의 복원

인간의 일상을 모두 잠식해 갔던 돈벌이 경제학. 그러나 저자는 최근 들어 돈벌이 경제학에 균열이 가고 있음을 지적한다. 재화와 서비스의 상품화가 이뤄진 뒤 인간노동, 자연자원, 화폐나 법적 권리 등과 같은 사회적 요소들까지 모두 마치 상품인 것처럼 시장에서 거래되고 심지어는 인간까지 자산이 되어버렸지만, 그만큼 부작용이 심각하게 대두되었고 그 결과 영원하리라 믿었던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회의가 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벌어진 월가 점령 운동 등이 바로 그 대표적 예이다.

저자는 칼 폴라니를 인용하여 그 이유를 설명한다. 살림/살이 경제와 돈벌이 경제의 영역이 완전히 중첩되어 하나로 통일될 정도로까지 상품화가 진행될 수 없다는 것. 사회의 보편적 상품화가 진행될수록 이것이 사회 조직 자체를 와해시키는 효과를 낳기 때문에, 사회를 보호하고 상품화의 진전을 막는 일종의 길항작용(상반되는 2가지 요인이 동시에 작용하여 그 효과를 서로 상쇄시키는 작용)인 '이중적 운동'이 벌어진다는 논리이다.

물론 이와 같은 이론이 우리의 현실에서는 얼마나 적합한지 알 수 없다. 철도민영화부터 시작해서 의료민영화까지 아직 우리 사회는 경제와 관련된 모든 것을 상품화, 물신화 시키는 과정에 있으며, 적지 않은 이들이 이와 관련된 돈벌이 경제의 신화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천민자본주의가 우리의 현실 아닌가.

그러나 조금 더 멀리 바라볼 때 저자의 지적은 절대적으로 옳다. 민영화 이야기가 나오는 만큼 시민사회의 반발은 거세지고 있으며, 빈부격차 등과 같은 자본주의의 폐해가 결코 나와 멀리 있지 않다는 공감대가 점점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사회적경제는 바로 이와 같은 움직임의 한 부분이다. 비록 그 형태는 자본주의 첨단에 서 있는 기업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 마을기업 등은 앞서 언급한 돈벌이 경제 보다는 살림/살이 경제에 가깝다. 그들의 목적이 결코 최대 이윤 추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살림/살이의 문제가 돈벌이의 문제와 뚜렷이 구별되는 독자적인 가치와 조직 원리를 가지고 있다며 그것을 '좋은 삶'이라고 규정한다. 결국 최고의 이윤을 쫓지 않아도 좋은 삶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살림/살이의 합리성이라는 것인데, 이는 앞서 언급한 사회적경제 조직들의 목적이기도 하다. 여느 기업들과 달리 최고의 수익보다는 자신들이 누리는 좋은 삶의 혜택을 좀 더 나누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바로 그것이 저자가 규정한 살림/살이 경제 속에서 공동체가 생존하는 방식인 것이다.

당장 눈을 돌려 주위를 돌아보자. 우리들의 소득수준은 그래도 꾸준히 늘어가고 있지만 예전과 달리 쓸데없는 곳에 돈을 써야 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믿을 만한 이웃이 없기 때문에 보모를 고용해야 하고, 함께 나눌 이웃이 없기에 출장뷔페를 불러야 하는 각박한 우리의 현실. 과연 우리의 삶은 나아지고 있는 것일까?

저자는 우리들에게 묻고 있다.

"그래, 여러분들의 살림살이는 좀 나아지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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